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마틴 스코세이지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만큼 예술적으로 풍성하고 비옥한 토양에 기반한 관계가 또 있을까. 두 사람이 일곱 번째로 함께한 최신작 <플라워 킬링 문>은 디카프리오가 주연뿐 아니라 총괄 프로듀서로 제작에 참여해 다방면에 걸친 그의 영화적 야심을 담아냈다. <타이타닉>의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에서 <레버넌트>의 황량한 설원까지, 디카프리오는 끊임없이 도전적인 역할을 추구해왔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하고도 선구적인 감독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왔으며 진정한 파트너이자 협력자가 된 스코세이지 감독과 함께 연기력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디카프리오는 과거에 묻힌 오세이지 족의 비극 속 사건의 열쇠를 쥔 어니스트 버크하트라는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통해 백인들의 약탈, 탐욕, 인종적 불의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인 사건에 휩쓸린다.
죄악에 가까운 유아적인 무지, 조증 환자같은 가벼움, 투명한 욕망과 그 욕망에 충실한 행동들을 보여주는 그는 의치를 사용해 외모를 바꾸는 노력으로 연기에 몰입한 것은 물론, 총괄 프로듀서로서 영화의 서사와 완성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각본 집필 중 진짜 이야기는 어디 갔는지 질문을 던져 영화는 FBI요원 톰 화이트가 주인공인 탐정 스릴러 스타일의 영웅 서사에서 어니스트 버크하트라는 보통 이하의 인물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에 기반한 서사로 탈바꿈했다. 상업적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에서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들여다보는 심리 드라마가 된 것이다. 노련한 배우들은 커리어가 쌓일수록 자신의 영화에 좀 더 예술적으로 창의적으로 개입하며, 재정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업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주도권을 가져가고 싶은 배우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보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위험과, 평론가와 관객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디카프리오가 주연은 물론 총괄 제작자라는 역할을 맡은 것은 단순한 연기자에서 영화 제작이라는 더 넓은 캔버스로 예술성을 확장시키는 행보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 눈독을 들인 영화 관계자가 한 둘이 아니었던 것처럼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에 매료된 배우는 디카프리오가 처음이 아니다. 브래드 피트는 같은 작가의 또 다른 논픽션 「잃어버린 도시Z」 에 반해 주연과 제작자로 참여하겠다며 영화화를 이끌었다. 아마존에서 사라져버린 영국인 탐험가 포셋 역할은 결국 찰리 허냄에게 돌아갔지만, 브래드 피트의 플랜B가 적극적으로 제작에 나선 탓에 제임스 그레이 감독 특유의 잔잔하고도 묵직한 연출에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의 색감과 스타일이 더해진 수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들이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에 이토록 매료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 속 역사적 맥락의 세세한 결을 밝혀내는 그랜의 치밀한 탐사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진보, 발전이라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문명사회와 토착 원주민 사이의 충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충돌로 인한 필연적 비극을 강조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서사로 가득한 이 실화들은 배우와 프로듀서에게 풍부한 영감 그 자체가 되어준다. 실화에 기반한 스토리는 전 세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화 작업을 통해 책에서 스크린으로 옮겨온 이야기는 더 많은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복잡한 캐릭터와 사건을 극적이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스코세이지는 결국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 영화의 역할과 실제 사건과 문화를 묘사하는 데 따르는 책임을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깊게 고민한 흔적이 가득하다. 이렇게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를 존중과 진정성을 담아 전달하는 동시에 매력적인 영화를 제작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일은 무척 어려운 도전일 것이다. 그가 ‘테마파크’ 같다고 한 영화들은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장대한 역사적 스케일의 <플라워 킬링 문>은 백인 중심 주류 미국 문화에서 너무 오랫동안 감춰 왔던 끔찍하고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몰리의 침묵과 응시를 통해 조명해냈다. 스코세이지의 전작들처럼 이 영화 역시 조직의 우두머리부터 그 아래 모든 사람에게 바이러스가 퍼지듯 개인적 차원의 부패, 비양심적 행위가 확산되는 과정을 그렸다. 차갑고 절제된 톤과 스타일 곳곳 충격적이고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대담하게 펼쳐지는 사건의 디테일은 감독의 의도가 단순히 역사를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대부분 백인인) 관객들에게 양심적 질문을 던지고자 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과거의 범죄에 대한 침묵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며 도덕적, 정치적 비극과 그 해결되지 않은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떠돌이에 빈털터리인 어니스트는 어느덧 교묘하게 내부인이자 집단의 일원이 되어 자각할 겨를조차 없이 사소한 범죄에서 살인 교사까지 휘말리게 된다. 몰리에게 코요테로 불리는 그의 매력은 유치하다 못해 유아적인 무지에 기반하고 있다. 어니스트는 완벽히 순결할 정도로 결백하고 일말의 죄책감은 물론 자신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반성은커녕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통찰력이 전혀 없는 순진한 미국적 모순의 인물 그 자체인 것이다. 영화 속 1921년 털사 인종 대학살의 뉴스를 내보내며 페어팩스에서 벌어진 학살이 “털사와 똑같다”고 강조하는 대사가 나온다. <플라워 킬링 문>을 보는 관객들이라면, 어느 문화권이거나 언어권이거나 그들이 지나온 가장 참혹한 역사의 순간과 그 참혹한 비극의 순진무구한 가해자를 떠올리며 가혹하고 야만적인 침략과 착취의 시대를 지나왔음을 떠올릴 것이다.
여든이 넘은 스코세이지는 또 하나의 위대한 영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영화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전 지구적으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예술이며, 애써 은폐한 어두운 과거에 빛을 비춰 세상에 내어놓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잠재력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무성 영화의 변사처럼 직접 내레이터로 영화에 등장하는 노력까지 감수하면서 말이다. 인슐린이라는 어니스트의 자백에 끝까지 기회를 주고자 한 몰리가 침묵하며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응답한 직후였으므로 배우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 그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영화를 만나는 경험이라면 기꺼이 몇 시간이고 상영관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싶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