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두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들던 감독은 이제 한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그 영화에서 풋풋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연기한 배우는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감독과 배우, 두 사람은 10년 만에 다시 만나 죽음을 앞둔 한 중년의 연극영화과 교수의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70년 전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아녜스 바르다의 초기작에서 이름을 따온 이 영화의 제목은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다. 그리고 마법처럼 10년 만에 다시 만난 두 배우와 감독의 이름은 김주령, 장건재다. 공교롭게도 10년 전 이들이 함께했던 영화 <잠 못 드는 밤>(2012)에서 김주령은 신혼을 맞이한 요가 강사 주희를 연기했다. 마치 하룻밤이 지나고 그다음 날 오후 5시가 된 것처럼, 외적으로 바라본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은 10년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24시간이 채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에서 김주령이 연기한 주희는 더 이상 신혼의 풋풋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잠 못 드는 밤>에서 주희는 남편 현수(김수환)와 아이를 갖는 문제로 관계의 불화를 겪지만, 10년이 지난 주희는 10%의 확률로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함께 이미 소원해져 버린 남편과의 관계의 문제를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그리고 배우 김주령과 감독 장건재의 영화 인생 역시 그때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배우 김주령은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서 한미녀 역을 맡으며 전 세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으며, 감독 장건재 역시 이후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로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중이다. <잠 못 드는 밤>과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배우 김주령과 감독 장건재, 둘 사이에 놓인 10년이라는 시간의 궤적을 좇다 보면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잠 못 드는 밤> (2012)

김주령 배우와 장건재 감독이 처음으로 합을 맞췄던 영화 <잠 못 드는 밤>은 정말 단순하고 곁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혼 2년 차지만 딩크족으로 지내며 연애하듯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는 신혼부부 현수와 주희의 삶은 소박하다. 주희는 요가 강사를 하고, 현수는 멸치 공장에서 일하며, 저녁이 되면 맥주 한 잔에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티비 앞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소박한 일상을 보낸다. 퇴근할 때면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고, 늦은 밤에는 피임한 채로 관계를 맺기도 한다. 두 부부의 한가로운 일상에 균열을 주는 것은 임신과 육아라는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잠 못 드는 밤>은 육아나 임신의 현실을 공포나 위기(<십개월의 미래>), 혹은 가혹한 현실 그 자체(<첫번째 아이>)로 그려내지 않는다. 차라리 육아와 임신은 부부를 둘러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상징 같은 존재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기에, 두 부부의 동상이몽은 재빠르게 여름날의 풀벌레 소리와 버려진 자전거 따위의 문제로 치환된다. 신혼을 맞이한 부부가 직면할 현실의 불안감이 매일 밤 두 부부가 영위하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무화되는 마법같은 영화는 어쩌면 그 당시 배우로서의 김주령과 감독으로서의 장건재가 품었을 법한 걱정과 일상이 아니었을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그럼에도 매일을 겪어나가는 일상의 풍경이 <잠 못 드는 밤>에 담겨 있다.
배우 김주령: 고민의 시기를 거쳐 세계로 향하다.

2000년 영화 <청춘>으로 데뷔한 뒤 2012년 장건재 감독과 <잠 못 드는 밤>을 찍을 당시까지, 김주령의 연기 인생에는 고민과 고뇌가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매년 상업 영화의 단역과 독립영화의 주조연으로 출연하면서, 극단 ‘드림플레이’ 생활을 통해 연극에도 종종 오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기를 펼쳤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의 뇌리에 그녀의 이름을 각인시키게 된 것은 <도가니>(2011)에서 기숙사 사감 윤자애 역이었다. 잔혹한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능청스러운 말투로 무마하려는 그녀의 연기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도가니>의 흥행과 함께 그녀의 연기 인생에도 활로가 모색되는 듯싶었지만, 임신과 육아로 인해 그녀는 가족과 함께 LA 근교에서 3년간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3년 뒤 <아수라>에서 김수진 역으로 특별출연하며 스크린 복귀에 성공했고, 이후 오랜 기간을 다양한 드라마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약하며 대중들의 눈에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드라마 <SKY 캐슬>의 세리 이모 역으로 출연해 윤세아(노승혜 역)와 나눈 통화 장면은 <오징어 게임>의 흥행 이후 해외 팬들에게 재조명되었다. 한영 혼용의 긴 대사를 뱉어가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 그럼에도 당시 그녀는 배우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고민의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도가니>에서 합을 맞춘 황동혁 감독이 그녀에게 손을 건넨 <오징어 게임>은 김주령의 연기 인생을 180도 바뀌게 했다. <오징어 게임>에서 연기한 한미녀 역의 강렬함 덕분에 그녀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올해 초에는 할리우드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오랜 노력과 고뇌의 시간이 모여 그녀에게 큰 선물을 안긴 셈이다. 그럼에도 김주령은 끊임없이 독립 영화와의 인연 역시 잊지 않고 있었다. 올해 가을 개봉한 <안녕, 내일 또 만나>(연출 백승빈), 단편 <재활>을 비롯하여 장건재 감독과 10년 만에 다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로 만나며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독 장건재: 독립영화의 아이콘으로

그의 첫 단편영화는 1998년 공개된 <학교 다녀왔습니다>로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류승완 감독과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그의 첫 장편 영화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의 첫 장편 영화 <회오리 바람>은 단편 제작 이후 11년 만인 2009년에야 완성되었고, 김주령 배우와 함께한 두 번째 장편 <잠 못 드는 밤> 역시 3년 뒤에 제작되었다. 당시 그는 결혼 3년 차였던 자신의 일상을 녹인 영화를 만들었고, 이제 막 두 번째 장편을 제작하며 불안정한 자신의 미래에 걱정하던 그의 시선이 영화 곳곳에 잘 담겨 있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차기작 계획으로 가와세 나오미의 제안으로 한일 합작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고 밝혔는데, 그 작품이 그의 인생을 뒤바꾼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였다. 지금까지도 많은 독립영화 팬이 사랑하는 이 작품은 감독 장건재라는 이름에 신뢰감을 주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배리어 프리 영화 연출(기존 영화에 화면을 설명하는 음성해설/소리 정보를 알려주는 자막을 넣은 버전)에 힘을 쏟기도 했고, <달이 지는 밤>(2020)이라는 무주산골영화제 프로젝트 영화를 연출했으며, 신동민 감독의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0)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제작자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괴이>(2022)의 연출을 맡고, 책을 기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잠 못 드는 밤>에서 임신 이후 닥쳐올 불안정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던 그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양한 작업으로 채워진 셈이다. 그리고 10년 만에 만나게 된 김주령 배우와의 조우 외에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초청된 <한국이 싫어서>,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기억> 등 2023년은 어쩌면 장건재 감독의 영화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바쁜 한 해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아 보인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3)에서 따온 것만 같은 장건재 감독의 신작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설정마저 매우 유사하게 흘러간다. 클레오는 점성술사에게서 죽음을 예언 받고 고통스럽게 거리를 배회한다면, 주희는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두려워한다. 하지만 주희는 클레오와 달리 거리를 떠돌지 않는다. 연극영화과 교수인 주희는 그저 가만히 자신의 연구실에 앉아있고, 오히려 학생과 동료, 주변인들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소원한 남편(문호진)은 부부 사이의 이야기를 극본으로 담아 무대에 올리며 위안을 얻는다. 어쩌면 <잠 못 드는 밤>의 주희는 10년이 지나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온 뒤, 안정성을 담보로 권태를 얻은 것이 아닐지 싶다. 그리고 권태가 자리 잡은 허구와 예술의 공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10년 전 <잠 못 드는 밤>이 장건재 감독과 김주령 배우의 30대를 대변하는 영화였다면,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10년이 지난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궤도에 오른 두 배우와 감독이 지금에야 할 수 있는 예술적 소회에 가깝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