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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핀란드 영화 거장의 달콤씁쓸한 멜로〈사랑은 낙엽을 타고〉

추아영기자
〈사랑은 낙엽을 타고〉메인 포스터 (제공 : 찬란)
〈사랑은 낙엽을 타고〉메인 포스터 (제공 : 찬란)

데드팬 코미디의 대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스무 번째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12월 20일 개봉한다. 제7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번 영화는 냉소적인 그의 영화 중 가장 밝은 작품이다. 영화는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리는 멜로이자 코미디 영화다. 영화의 아이러니한 코미디는 미국 인디 영화의 거장 짐 자무쉬 감독의 감정적으로 절제되면서도 엉뚱한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 영화의 화려한 컬러는 자크 드미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안사(알마 포이스티)와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드미의 영화 속 연인들처럼 서로 엇갈린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겼다는 이유로 슈퍼마켓에서 해고된 여자 안사와 술과 담배로 우울함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공장 노동자 홀라파. 둘은 가라오케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이후 둘은 두 번의 우연을 거쳐 다시 만나게 되고, 카페와 영화관에 가는 데이트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극장 앞에서 둘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만, 각자의 이름과 사는 곳도 모른 채로 헤어진다. 홀라파는 안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았지만 이것 마저도 잃어버리고 만다.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2017년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희망의 건너편>이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6년 후,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영화 <사랑을 낙엽을 타고>를 만든 이유는 그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시달리던 중,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주제에 관해 쓰기로 결심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자연, 삶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프롤레타리아 3부작’을 잇다

처음 영화 데이트를 하고 나온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난 안사와 홀라파
처음 영화 데이트를 하고 나온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난 안사와 홀라파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줄곧 핀란드의 우울한 정조와 함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왔다. 그의 차가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특히 연인들의 무미건조한 표정과 아이러니한 유머의 대드팬 코미디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주된 연출특징이다. 드라이 유머라고도 불리는 데드팬 코미디는 감정적 중립 또는 무감정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주제의 우스꽝스러움이나 부조리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코미디적 전달 방법이다. 이런 전달은 대체로 퉁명스럽거나, 아이러니하거나, 매우 솔직하면서도 간결하게 이뤄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데드팬 코미디는 외롭지만 자기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빈정대는 말투로 타인을 밀어내는 ‘상남자’ 스타일의 남자 주인공 캐릭터를 형성한다. 그는 계속 우울해하면서 자기 세계 안에 갇혀 있다. 때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조리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발언으로 나타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에게 ‘죽은 얼굴’은 단순한 연기 디렉팅이 아니라 그의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번 영화가 그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를 잇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왔다. 이번 영화도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있는 안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계속해서 일터를 옮겨다닌다. 여러 노동 현장을 전전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안사가 주방보조로 가게 된 캘리포니아 펍의 사장은 그녀를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또 식당은 탈의실은 커녕 공용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실정이다. 홀라파의 노동환경도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던 홀라파가 부상을 입는다. 공장장은 낡은 부품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줄 알지만, 그의 알코올 수치가 확인되자마자 알코올 문제로 사고를 무마시킨다. 결국 홀라파는 맨몸으로 공장에서 쫓겨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꼬집으면서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처럼 노동자가 부조리한 환경에서 맞닥뜨리는 구조적인 문제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과 문화생활, 냉소적인 사랑에도 주목한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소외되는 노동자의 삶을 페이소스를 담은 유머로 풀어낸 찰리 채플린 식의 희비극에 더 가깝다.

 

“사랑, 연대, 희망…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주제”

안사와 유기견이었던 그녀의 강아지
안사와 유기견이었던 그녀의 강아지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소식을 다루는 라디오 뉴스를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전쟁을 기억하기를 바랬다고 언급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성냥공장 소녀>에서도 중국의 천안문 광장 시위를 다룬 뉴스가 계속해서 나온다. 다만 <성냥공장 소녀>의 이리스(카티 오우티넨)가 뉴스에 반응하지 않는 것에 반해 안사는 러시아군의 극장 공습 보도를 듣고 “망할 놈의 전쟁”이라고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기존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스스로를 국외자로 인식하는 캐릭터들과 달리 안사는 유기된 강아지를 데려와 보살피고, 국제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타자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감독은 "안사라는 이름은 핀란드어로 '갇힌'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삶이 갇혀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임금이 적고 계속 일자리를 잃어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고 전했다.

안사와 홀라파의 로맨스는 관계 외적인 문제의 영향을 받는다. 시대적 상황, 노동자들의 계급화와 착취, 빈곤, 고용 불안 등은 멜로의 내러티브에 있어 두드러지게 작용한다. 두 인물의 삶은 암울한 국제 정세와 반복되는 노동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영화는 인생의 짐을 짊어진 외로운 두 남녀가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남녀의 마음을 대신 전하는 음악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음악은 관객에게 전해지지 않은 서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는 안사와 홀라파의 속마음을 알게 해주는 내레이션이 전무하다. 게다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두 인물의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하고 있으면 음악이 표현되지 않은 둘의 감정을 대신 전한다. 영화 데이트 후 안사는 홀라파의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좀처럼 그의 연락은 오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두고 ‘Etkö uskalla mua rakastaa’(번역-감히 날 사랑하지마) 음악이 흘러나온다. 사랑할 용기가 없냐고 말하는 가사는 다가오지 않는 홀라파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안사의 마음이기도 하다. 홀라파가 금주를 결심하고 간 바에서 울려 퍼진 인디 팝 음악 Maustetytöt의 ‘Syntynyt Suruun, Puettu Pettymyksin’(번역-슬픔을 안고 태어나 실망의 옷을 입다)은 알코올 중독증을 고치지 못해 안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홀라파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외에도 각각 다른 두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 허리게인(Hurriganes)의 로큰롤 ‘Get on’과 올라비 비르타(Olavi Virta)의 ‘Mambo Italiano’ 등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2024년에 이질적인 감각을 불어넣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프랑스 국민 이브 몽땅의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이 흘러나오며 여운을 남긴다. 


씨네플레이 추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