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글에 'Finnish Nightmares'를 검색하면 재밌는 짤들이 여럿 나온다. 핀란드인의 전형성을 '마티'라는 캐릭터로 포착해 내는데, 이런 식이다. 마티는 외출하려는 찰나,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그 누군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현관을 나선다. 전력 질주해서 버스를 잡아탔더라도, 정작 버스에 올라타서는 전혀 숨차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뚱한 표정을 짓는다. 버스 정류장에서는 앞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두어 줄을 서고,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서비스가 좋지 않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부터 들며 자기반성에 빠지는, 마티는 그런 사람(?)이다.

참 사랑스럽지 않은가. 평화로움과 조용함, 개인 공간을 중시 여기는 핀란드인들의 정중한 개인주의자적 면모란. 데드팬 코미디(Deadpan, 무표정한 얼굴. 동작이나 표정 없이 유머를 보여주는 코미디) 의 대가인 핀란드 출신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도 핀란드인의 속성을 알면 그저 사랑스럽게 읽히는데, 오는 20일 그의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개봉한다. 스케치북 고백 따위의, 로맨틱한 관계로만 수렴되는 사랑이 지겹다면, 은유로의 전쟁이 아닌 진짜 전쟁이 발발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카프카적 시대'에 걸맞은 독특한 로맨스가 만나고 싶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12월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오늘은 영화 속 핀란드적 모멘트를 모아봤다. 학업으로 핀란드에 머물렀던 과거 2년간의 기억을 더듬었다.

8년 전, 헬싱키를 가기 위한 중간기착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최소비용으로 헬싱키까지 도달할 방법을 고민하다 러시아를 경유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이동한 후, 5만 원 안팎의 열차 값을 지불하고 3시간 30분 만에 핀란드 수도에 닿을 수 있었다. 러시아와 핀란드가 국경을 맞대고 있음을 물리적으로 체감한 순간이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두 주인공 안사(알마 포이스티)와 홀라파(주시 바타넨)의 로맨스의 배경음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속보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다.
안사는 헬싱키의 슈퍼마켓에서 노숙자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나눠주다 해고되고, 곧이어 취직한 펍에서도 사장이 마약거래로 체포되면서 빈털터리가 된다. 한편 건설 현장 노동자인 홀라파는 술 없인 밤낮으로 기능할 수 없다. 그는 술 문제로 몇 차례 해고를 당해 마땅한 거처도 없이 떠도는 중이다. 적막함만이 감도는 무료하고 쌉쌀한 이들 삶의 여백을 채우는 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속보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핀란드에게,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실재하는 공포이자 암울함 그 자체이다. 두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과 이들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사뭇 냉담하다. 하지만 감독은 비관하지 않고, 그들을 데드팬코미디로 구원하리라 마음 먹는데.
핀란드인들의 가라오케 사랑

이 고독한 두 남녀, 안사와 홀라파는 가라오케바에서 처음 만난다. 핀란드의 가라오케는 한국의 가라오케와는 조금 다르다. 보통 술집 구석에 자그마한 무대 형태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핀란드인들은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평화로움과 조용함을 즐기는 과묵한 핀란드인들 아니었던가. 나서서 노래 부르는 모습이 좀체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시라. 현실 고증 100%의 이 장면에서 한껏 달아오른 흥을 주체 못 하는 핀란드인들을 볼 수 있으니. 열창하는 누군가와 그 누구도 호응하지 않는, 그 진귀한 순간들을 훔쳐보기 위해 학교 근처 바에 하릴없이 앉아 있던 순간이 생각나서, 필자는 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렇게 가라오케바에서 짧은 눈 맞춤을 나눈 안사와 홀라파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핀란드인들

새로 구한 직장의 사장이 대마초를 유통한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에게 말을 건네며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이어간다. 두 번의 스침 끝에 둘은 드디어 커피와 풀라(pulla, 핀란드식 시나몬롤, 영화 <카모메 식당>에도 나온 그 시나몬롤이다)를 나눠 먹으며 데이트를 시작한다. 핀란드는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세계 최대다. 매년 인당 12kg가량을 소비하고, 커피에 시나몬롤을 곁들여 먹는 것은 핀란드의 오랜 전통이다.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자 가난한 이들의 삶에도 왠지 생기가 도는 듯하다. 둘은 내친김에 영화관까지 동행한다. 짐 자무쉬 감독의 <데드 돈 다이>(2019)가 과연 첫 데이트에 적합한 영화인지 평가는 접어두자. 영화가 맘에 드냐 물어보는 홀라파의 질문에 "그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안사는 답했으니.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웃음의 정의와 강도는 각자 다르기에.

세계는 전쟁 중이고,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며, 홀라파의 알코올중독 문제와 이어진 사고로 시작하는 연인들의 로맨스도 위기를 맞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연대, 존중, 그리고 희망의 토양을 딛고 다시 연애하기 좋은 계절, 가을을 맞는다. 부당한 해고의 순간 안사의 동료 두 명은 연대하여 함께 마트를 떠났고, 데이트할 때 입고 갈 변변한 재킷 하나 없는 홀라파를 위해 옆방 하숙인은 자신의 유일한 재킷을 선물한다. 한 간호사는 사고 후 퇴원하는 홀라파에게 전 남편 옷인데 맞을지 모르겠다며 옷 무더기를 내민다. 꺼지지 않는 희망 같은 것이 무뚝뚝한 핀란드인들 사이로 낙엽처럼 뒹군다.
'I like dogs, mankind I don't care for too much.'
강아지는 항상 옳다.

핀란드에 머물던 시절, 40킬로는 족히 되는 대형견의 버스 탑승에 놀랐고, 좁은 학생 아파트에서 레트리버, 포터 등이 당당히 주인과 발을 맞출 땐 경이로웠으며, 곳곳에 마련된 개공원들은 부럽기만 했다. 핀란드인들의 개사랑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진다.
영화에서 안사의 작은 아파트는 거리에서 안락사 직전의 한 강아지를 데려오면서 영화적으로, 비유적으로 확장된다. 개를 데리고 오며 영화는 처음으로 안사의 소박한 간이 주방과 소파 옆 공간을 비춘다. 안사가 개를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수건으로 열심히 털을 말릴 때, 안사의 빨간 블라우스, 개의 부드러운 황금색 털, 수건의 라벤더색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 장면은 행복은 기분을 전환하는 색상에, 동행하는 동물에, 그리고 사랑을 기다리는 소소한 시간 속에 존재한다 말해준다.

핀란드가 배경인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을 볼 때마다, "난 강아지를 좋아하고 인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아지들은 정직하고 거짓말을 안 한다"라는 무뚝뚝한 인터뷰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보낸 핀란드에서의 2년, 그리고 건조하지만 따뜻한 이들이 떠오르며, 뱅긋 웃음이 난다.
마침내 술을 끊은 홀라파는 안사에게 향하다 기차에 치이고 안사는 홀라파의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는다. 처음으로 "그 사람 이름은요?"라고 묻는 안사의 말은 앞으로의 날들을 홀라파와 함께 하겠다는 결심에 다름없는데, 그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서로의 이름을 묻고, 안부를 걱정하고, 연락을 기다리며 인간성을 되찾겠다는 감독의 의지이기도 하다. 강아지를 아끼는 사람은, 고통받는 인간도 차마 지나칠 순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