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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지니어스〉 능력과 돈을 환전하는 세상 속에서 망가져 간 사람들

성찬얼기자

출신 대학이나 수능 성적이 한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건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이 사람이 얼마나 선량한 사람인지, 취향은 어떻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떤지, 평상시 행동거지는 어떻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11월이면 올해 수능은 어땠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의 성장 과정과 성취를 수능과 대입 여부로 평가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저 사람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인재로 성장했나”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부 머리’는 개인의 ‘능력’으로 환전되고, 그 능력은 이 사람이 앞으로 얼마나 안정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나 하는 미래 전망으로 환전된다. 결국은, 돈인 것이다.

〈배드 지니어스〉
〈배드 지니어스〉

나타우트 푼피리야 감독의 2017년 작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이 환전의 고리를 다소 일찍 깨달은 고등학생들을 다룬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성적이 우수한 자신을 탐내는 명문고 교장 앞에서 협상에 임한다. 중학교 3년 내내 A만 받아온 구내 수학 경시대회 1위 수상자, 낱말 퍼즐 국내 챔피언인 린은 분명 교장에게는 탐나는 인재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린은 그 자리에서 1년치 부대비용을 암산해낸다. 1학기 등록금 6만 바트, 연간 12만 바트, 하루 교통비 80 바트, 연간 교통비 13,600 바트, 식비, 학용품, 교복까지 하면 연간 총액 15만 바트(약 550만원). 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가격 대비 큰 가치는 없네요.” 내가 탐난다면 학교 측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라는 이야기다. 학교는 수업료와 식비를 무상으로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자신의 두뇌가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린은 얼핏 협상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린은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단짝친구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와 우정을 쌓으며 학교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이스는 말한다. 교내 연극에 나가려면 학점 평점이 3.25는 되어야 하는데, 공부 못한다고 연극도 못하게 하는 건 부당하지 않냐고. 수학 선생에게 개인교습까지 받았는데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린은 단짝인 그레이스를 위해 수학 과외를 해주지만, 공부 머리는 별로 없는 그레이스는 좀처럼 따라오지 못한다. 그레이스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린, 그런데 시험 당일 펼쳐 본 수학 시험지가 어쩐지 이상하다. 그레이스가 ‘수학 선생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며 들고 왔던 문제지와, 수학 시험지 속 문제가 정확하게 일치한 것이다.​

〈배드 지니어스〉
〈배드 지니어스〉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린은 멀리까지 생각하진 못한다. 이미 본 문제니 그레이스도 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레이스는 문제를 기억해내지 못한 채 눈물만 그렁그렁하다. 린은 재빨리 정답을 지우개에 적어서 뒷자리의 그레이스에게 전달한다. 그레이스의 평점은 3.87이 되고, 원했던 대로 연극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해도 의도는 선했다. 그런데 그레이스의 남자친구이자 태국 유명 호텔 체인 소유주의 아들 팟(티라돈 수파펀핀요)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태는 달라지게 된다. 팟은 한 과목 당 3천 바트를 제시하며 시험의 정답을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체육을 제외하면 한 학기 당 13과목, 수요자는 6명, 시험 한번 볼 때마다 23만 4천 바트(약 855만원). 팟은 말한다. “네 두뇌에 주는 돈이야. 계산 끝? 학교에 뇌물을 냈으면 우리도 뭔가 얻어야지.”

​뇌물? 그게 무슨 소리인가? 팟은 말한다. “몰랐어? 성적 나쁠 수록 돈 많이 내잖아.” 그레이스도 덧붙인다. 난 40만 바트씩 내. 팟은 학교에 아이맥 20대 기증했고. 그러니까 이상할 정도로 수학 시험지와 문제가 일치했던 수학 개인교습 문제지 또한, 돈으로 사들인 것이었으리라. 린은 자신은 장학금 받고 들어왔노라 이야기하지만 팟은 고개를 젓는다. “그건 명목 상이고. 학교에 돈 들어갈 데가 많거든.” 린은 아버지가 자신 몰래 학교에 입학금 명목으로 20만 바트(약 731만원)을 납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협상에서 성공한 줄 알았던 린은 분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묻는다. 날 왜 이 학교로 보낸 거야? 아버지는 말한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대부분 장학금 받고 유학 간다더라. 다 우리 딸 앞날을 위한 거야. 어른들이 엮어내는 돈의 네트워크는 린의 생각보다 훨씬 더 조밀하고 촘촘했다.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학교는 입학을 빌미로 학부모들에게 돈을 받고, 문제를 빼돌려 값을 지불하는 학생들에게 유출하고 있다. 린은 이제 자신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팟이 제안한 컨닝 비즈니스에 뛰어든다.

〈배드 지니어스〉
〈배드 지니어스〉

능력으로 돈을 살 수 있다면, 돈으로 능력을 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린과 팟, 그레이스가 얽힌 비즈니스는 점점 규모가 커진다. 단순히 학교 시험 하나 정도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열리는 STIC(미국 대입시험 SAT를 모델로 삼은 가상의 시험) 시험이 무대가 된다. 태국보다 시간대가 빠른 나라에 가서 응시하면 시차를 이용해 태국의 ‘고객’들에게 정답을 알려줄 수 있다. 잠재 고객들을 앉혀놓고 자신들의 컨닝 계획을 브리핑하는 자리, 팟은 흡사 스티브 잡스처럼 차려입고 이것이 대단한 혁신인 양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시험에 꼭 합격합시다! 대학으로 가는 정답은 저희가 드립니다! 대학이 우리를 고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갈 대학은 우리가 고릅시다!” 돈으로 능력을 살 생각에 부푼 잠재 고객들은 기립박수를 친다.

〈배드 지니어스〉
〈배드 지니어스〉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 린도, 어쩌다가 이 컨닝 비즈니스에 함께 휘말리게 된 뱅크(차논 산티네톤쿨)도, 더는 예전처럼 웃음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추악하고, 두 사람 또한 적극적으로 능력과 돈을 부당하게 환전하는 일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누비게 될 거야.”라고 서로에게 말해보지만, 그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무겁다. 어차피 세상이 정당하지 않으니까 이 정도의 반칙은 괜찮은 게 아닐까 하는 합리화를 반복하며, 두 사람은 더는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능력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수학능력시험일이 다가오면 나는 어떤 덕담을 건네야 할지 몰라 말을 버벅대곤 한다.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그럼에도 수능 잘 치르라고? 글쎄, 이 모순된 두 문장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보면, 우리가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평가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회의가 든다. 수험생들이 시험지를 붙들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 시간, 나는 돈과 능력을 숨 가쁘게 환전하다가 망가져 버린 〈배드 지니어스〉 속 린과 뱅크를 생각한다. 그저, 아무도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