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벨 강스의 <나폴레옹>(1927)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일대기에 관련한 일련의 영화들은 유럽 각국의 영화계에서 꾸준히 생산되었다. 다만 대부분은 세인트헬레나 유배 시기를 다룬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1929, 베를린의 EFA 스튜디오에서 주로 작업했지만, 일부는 실제 세인트헬레나 섬 로케이션으로 촬영)이나 나폴레옹과 조세핀 부부의 결혼과 이혼까지의 기간을 그린 <왕실 이혼>(A Royal Divorce, 1938, 1923년 동명 영화의 리메이크)처럼 나폴레옹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 소품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몽테크리스토 백작>(1934)과 같이 스토리상 간접적으로 나폴레옹의 존재가 드러나는 작품에서 단역으로 자주 모습이 비치곤 했다.

(여담으로 영국 시절 히치콕의 <39 계단>(1935)으로 낯이 익을 명배우 로버트 도냇의 로맨틱한 연기가 돋보이는 1934년판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브이 포 벤데타>(2005)에서 V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기사 갑옷을 상대로 혼자 놀기(...)를 할 때 틀어놓고 있던 바로 그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기의 나폴레옹 관련 작품들은 전시의 특성상 국민의 사기를 고무, 진작시키고 애국심을 일깨운다는 국가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짙어진다. 트라팔가 해전으로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이 좌절될 시기에 영국의 내각을 이끌었던 수상 윌리엄 피트(일명 소(小) 피트)를 주인공으로 한 캐럴 리드(<제3의 사나이>(1949)와 <올리버>(1968)의 그 감독이 맞다)의 <더 영 미스터 피트>(1942)는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 독일의 공습이라는 외침에 맞서던 당시 영국의 투쟁과 유사성을 지닌 역사적 대응물로 전쟁 도중에 촬영되었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동부전선 진격에 맞서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소련 역시 러시아 원정 온 나폴레옹을 물리친 전략가 미하일 쿠투조프의 활약상을 그린 <쿠투조프>(1943)를 내놓는 식이었다.

1950년대 들어서 시네마스코프(아나몰픽 렌즈를 활용한 2.39:1 촬영) 의 보급과 함께 시대극의 붐이 밀어닥친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도 나폴레옹은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왔다. <욕망이란 이름의 열차>(1951)와 <워터프론트>(1954)에서의 열연으로 크게 약진하던 말론 브란도의 주연작 중 하나인 <나폴레옹과 데지레>(1954)도 특기할 만한데, 진 시몬즈가 데지레 클라리(나폴레옹은 회고록에서 그녀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사랑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를 연기한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을 맡은 말론 브란도는 액터드 스튜디오에서 내공을 갈고닦은 메소드 연기자답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초상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과 같은 놀라운 싱크로율과 대중 관객이 기대하는 나폴레옹의 영웅적 카리스마를 강렬하게 표현해냈다. 영화 자체는 평작에 그쳤지만 브란도의 나폴레옹 연기만큼은 작품 자체를 압도하는 가치를 뽐냈다는 평을 얻었다.

반면 킹 비더의 <전쟁과 평화>(1956)는 할리우드 초창기의 명감독에 헨리 폰다와 오드리 헵번을 기용하는 화려한 포진을 과시했지만, 평단의 반응이 크게 엇갈렸고 600만 달러를 들인데 겨우 625만 달러를 거두어 흥행도 크게 실패했다. 허버트 롬이 연기한 나폴레옹도 큰 인상을 각인시키진 못했는데, 506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시나리오 초안을 다섯 번에 걸친 개작을 가하면서 대폭 줄여버려 앙상한 서사의 줄기만을 의무적인 수준에서 유지할 뿐 극의 설득력과 원작 소설의 주제의식을 상실해버린 탓이 컸다. 도리어 이 할리우드판 <전쟁과 평화>의 의의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게 되는데, 톨스토이의 고향이라 할 러시아, 즉 소련 영화계를 자극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버전의 <전쟁과 평화>(1966~1967)를 만들게 했다는 점이다.

냉전의 시대에 할리우드에 대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던 소련 영화계에서는 킹 비더의 <전쟁과 평화>를 자국에 대한 문화적 도발(!)로 받아들였고, "미국 영화를 능가하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소련 영화 산업에 있어 명예가 달린 문제입니다"라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감독 선임에 일시적인 난항을 겪다 세르게이 본다르추크가 총대를 메고 메가폰을 쥐게 된 <전쟁과 평화>(1965~1967)는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1만 이상의 사단급 군 병력, 총 연인원 75만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며 사회주의의 위엄(?)을 과시했는데, 1~4부 도합, 484분(미국에서는 431분)에 달하는 이 대작은 소련에서만 1억 3500만 장의 티켓을 판매하는 흥행을 기록했고, 소련 영화임에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영화에서의 나폴레옹은 폴란드계 러시아 배우인 블라디슬라브 스트르즈헤리크힉이 맡았다.

한편 원조 <나폴레옹>(1927) 감독인 아벨 강스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나폴레옹 시대의 전장을 재현하는 대작 <아우스트리츠의 영웅>(1960)를 발표했다. 전반부는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정치적 상황, 후반부는 전투의 전개 과정에 할애하는 2막 구성의 이 영화는 전성기의 역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연출과 규모였지만, 교황 비오 7세 역으로 <자전거 도둑>(1948), <움베르토 D>(1952)의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미남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배우로도 자주 활동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 역에는 당대 최고의 미녀배우로 ‘CC’란 약칭으로 칭해지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신무기를 제안하러 온 로버트 풀턴 역에 <시민 케인>(1941)의 그 오손 웰즈를 캐스팅하는 위용으로 화제를 모아 프랑스 국내에서만 350만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선전했다. 리들리 스콧이 <나폴레옹>(2023)에서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새롭게 고증하기까지, 오랫동안 이 영화는 해당 전투를 다룬 유일한 영화로 남아있었다.

(풀턴은 1797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군용 잠수함을 설계하여 프랑스 총재 정부에 선보였다. 이 잠수함 ‘노틸러스’(Nautilus : 그리스어로 ‘항해자’) 이름은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에도 차용된다. 풀턴은 1800년 12월, 나폴레옹을 만나 자신의 신무기를 제안하지만 무시당했고 <아우스트리츠의 영웅> 영화에서도 이 부분을 묘사하고 있다. 이후 풀턴은 영국으로 건너가 개량된 잠수정과 어뢰의 채용을 제안한다.)

소련판 <전쟁과 평화>는 역으로 할리우드에도 엄청난 쇼크를 안겨주었다. 아무리 막대한 자본의 할리우드라지만 미국에서 저 스케일을 재현하려면 족히 세 배 이상의 비용은 든다는 추산이 나오는 판이었으니 <전쟁과 평화>의 규모는 실로 경악할 만했던 것이다. 컬럼비아와 파라마운트는 ‘적과의 동침’(?) 격으로 모스 필름과 접촉해 공동제작에 합의하며 또 다른 대작을 추진했고, (뒷날 <듄>(1984)의 제작자로 데이빗 린치 경력의 흑역사를 안겨준) 디노 드 로렌티스가 추진하고 존 휴스턴이 감독으로 선임되어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였던 기획안 하나가 살아나게 된다. 바로 <워털루>(1970)였다.

<워털루>는 ‘데탕트’란 말이 있기도 훨씬 전에 할리우드의 자본과 구소련의 값싸고 풍부한 물량이 결합된 기적의 프로젝트였다. <전쟁과 평화>의 제작사 모스 필름은 보병 15000명에 기병 돌격 재현을 위해 2000명의 카자크 기병을 추가해 엑스트라로 제공했다. 당시 전투 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드넓은 평원지대에서 두 개의 언덕을 헐어버리고, 5마일 길이의 진짜 도로를 깔고 주변에 5,000그루의 나무를 공수해 이식하고 역사적인 대형 건축물 네 채를 재현하는 등, 문자 그대로 산과 강을 갈아엎는 대공사를 진행해 총제작비 2,500만 달러 중 전투 장면에만 5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지금에 와서는 <포레스트 검프>(1994)의 군중신처럼 ‘뻥튀기‘하면 되겠지만, 화면 구석구석, 멀리 지평선 너머에 개미처럼 꿈틀거리는 인원 하나하나가 놀랍게도 다 실제 동원된 인력이었다. 때문에 ’세르게이 본다르추크(감독)야말로 세상에서 7번째로 큰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란 농담이 돌 정도였다.

그러나 로드 스타이거를 나폴레옹,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의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아서 웰즐리(웰링턴 공작)으로 캐스팅한, 지금 봐도 놀라운 수준의 고증과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이 야심찬 블록버스터는 유럽에서 제법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익분기점을 넘기진 못해 최종적으론 흥행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되는 이 영화의 전설적인 전투 시퀀스는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2003)의 클라이맥스라 할 로한 기마대 돌격신을 연출하는 데 영감을 주는 등, 영화사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았지만 당대에는 <클레오파트라>(1963)의 실패와 더불어 한동안 대형 서사극 제작의 숨통을 끊은 격이 되었다. 그리고 이 <워털루>의 실패는 뜻하지 않게 한 위대한 창작자의 꿈을 꺾어놓고 말았다. 피해자의 이름은 스탠리 큐브릭이었다.
(다음 3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