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들리 스콧의 장대한 시대극 필모그래피를 <글래디에이터>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면, <나폴레옹>은 가장 현대와 가까운 시점의 영화다. 1793년, 혁명의 불꽃이 프랑스 전역을 밝히기 시작한다. 코르시카 출신의 장교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 영웅으로 떠오른다. 한편, 사교 파티에서 영웅 나폴레옹을 만난 조제핀(바네사 커비)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를 선택하고, 나폴레옹은 마침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물론 리들리 스콧의 데뷔작 <결투자들>(1977)이 나폴레옹 시대를 배경으로 1816년 파리까지 이어지는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나폴레옹>보다 더 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리들리 스콧이 거의 50여 년 만에 다시 데뷔작이 다뤘던 시공간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폴레옹이라는 소재 그 자체보다 의미심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결투자들>(1977)
‘결투’라는 기이한 욕망
“결투자는 만족을 원한다. 그는 명예에 굶주려 있다. 이것은 괴상한 욕망을 다룬 실화이다.” ‘결투’라는 기이한 욕망을 다룬, 조셉 콘래드 원작의 「결투」는 위와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후 영화는 1800년 나폴레옹 시대의 스트라스부르를 시작으로 1816년 파리까지 두 장교 두베르(키스 캐러딘)와 페로우(하비 케이틀)의 오랜 숙명적 결투 이야기를 담아낸다. 리들리 스콧이 데뷔작부터 시대극을 만들려고 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1977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다.

영국 출신 앨런 파커 감독의 데뷔작 <벅시 말론>(1976)에 넋이 나간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는 제작자인 데이비드 퍼트넘에게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영국 신인감독을 추천해달라고 했고, 그는 영국 광고업계의 스타 중 하나인 리들리 스콧을 연결해줬다. 그즈음 극영화 데뷔를 꿈꾸고 있던 리들리 스콧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다. 하지만 파라마운트는 영국에서 온 나이 든 신인감독에게 통 큰 투자를 할 수 없었고, 적당히 90만 달러의 제작비를 내놓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광고를 찍으며 단련된 장인 리들리 스콧은 느긋했다. 부족한 인원으로도 규모 있는 군대 장면을 연출했고, 제작비 문제로 조명에 공들일 수 없었음에도 흐린 날씨와 자연광만을 이용해 비장하고 몽환적인 결투 장면을 만들어냈다. 할리우드에서 최고 예산의 시대극을 연출하는 그의 현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결투자들>이 칸영화제의 환대를 받은 이후 두 번째 영화 <에이리언>(1979)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결투자들>때문이었다.
<1492 콜럼버스>(1992)
‘공존’이라는 종교적 메시지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은 이른바 ‘영웅’들이 등장하는 영화들과, ‘공존’의 메시지를 던지는 종교 영화, 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1492 콜럼버스>는 후자다. 중국에는 가난한 집도 지붕을 황금으로 얹었다는 소문이 횡행하던 유럽의 대항해 시대.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탐험가 콜럼버스(제라르 드빠르디유)는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서쪽 바다로 향한다. 이자벨 여왕(수잔 서랜든)이 콜럼버스의 계획을 지원하여 1492년, 드디어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배 3척이 항해를 시작한다. 하지만 예정된 기간보다 항해가 길어지자, 선원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저주 받은 항해’라며 불만이 쌓여간다. 그렇게 극심한 공포와 난관을 헤치면서 드디어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신대륙에 발을 내딛는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들 중 주인공의 머나먼 여정이라는 점에서,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1492 콜럼버스>의 콜럼버스는 유대민족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향하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 이하 <엑소더스>)의 모세와 닮았다. 더구나 그 땅으로 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의 필연적인 충돌을 야기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여기서 이민족과의 조화, 종교적 평화에 대한 갈구라는 관점에서 <1492 콜럼버스>와 <엑소더스>는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맨 처음 원주민들을 맞닥뜨렸을 때 부관은 “총을 들라”라고 외치지만 콜럼버스는 그만두라고 말하며, 화살과 창 등 각종 무기로 무장한 그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렇게 원주민들의 마을로 들어간 콜럼버스 일행은 그들을 맞이하는 족장의 웃음과 함께 사이좋게 어울려 지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발견했다. 세상의 처음이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이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무력이 아닌 설득으로 해야만 할 것이다. 이들은 야만인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대하듯이 해야 할 것이다. 저들의 신념을 존중하고 약탈과 강간은 엄히 다스릴 것이다”라는 콜럼버스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꽤 긴 기간 머무른 콜럼버스는 다시 스페인으로 떠나며 족장에게 “다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과 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족장은 “왜?”라고 묻는다. 콜럼버스가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자, 족장은 “우리에게도 이미 신은 있다”고 답한다. <엑소더스>가 얘기하는 ‘공존’의 메시지는 이미 이때부터 잉태돼 있었다.
<글래디에이터>(2000)
나폴레옹처럼 되기 싫은 아웃사이더
평소 머빈 르로이의 <쿼바디스>(1951),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1959),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타커스>(1960), 안소니 만의 <로마 제국의 멸망>(1964) 등 과거 스튜디오 대작 영화들에 매혹됐었다고 말해온 리들리 스콧에게 있어 <글래디에이터>로 시작된 본격 시대극의 역사는 어딘가 <나폴레옹>으로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공교롭게도 <글래디에이터>에 출연했던 호아킨 피닉스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리들리 스콧과 <나폴레옹>으로 만났다는 것도 꽤 의미심장하다.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친아들인 자신을 제쳐두고, 막시무스(러셀 크로)를 더 나은 권력의 계승자로 총애한다는 점에 대해 엄청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아버지를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나폴레옹>의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도 힘겹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만 계속 자신을 흔들어대는 조제핀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최고 권력자의 내면에 숨은 뒤틀린 욕망과 결핍이라는 점에서, 코모두스와 나폴레옹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로빈 후드>(2010)
운명을 따라 떠도는 또 다른 아웃사이더
‘권력’이라는 컨셉으로만 보자면, <로빈 후드>는 <나폴레옹>의 완벽한 극과 극을 이루는 작품이다. 일단 <로빈 후드>는 <킹덤 오브 헤븐>(2005)처럼 오랜 십자군 원정의 피로감으로 가득한 영화다. 영화 속 누군가가 십자군 원정으로 국력이 쇠퇴한 영국에 대해 말하길, ‘취사병만으로 공격해도 영국을 정복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오프닝의 전투가 끝난 다음, 우연히 군인들의 막사를 찾은 사자왕 리차드(대니 휴스턴)는 로빈 후드(러셀 크로우)에게 “신이 우리가 바친 제물을 기뻐하실까?”라며 솔직한 심경을 묻는다. 이에 로빈 후드는 ‘아니오’라고 솔직하게 답하고 줄줄 얘기한다. “아크레의 대학살 때문입니다. 2500명의 모슬렘 백성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내 발밑의 팔이 묶인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두려움도 분노의 눈빛도 아니었습니다. 처량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녀는 알았던 겁니다. 폐하께서 우리에게 그들의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을. 그 순간 우린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리차드는 그의 솔직함을 칭찬하며 “이게 바로 영국인이다!”라고 얘기하지만 곧장 그를 가둔다. 이교도와의 공존, 신에 대한 부정 등 <로빈 후드> 역시 십자군 원정을 매개로 <엑소더스>와 같은 맥락 위에 놓이지만, 권력에 대한 부정과 환멸이라는 점에서는 한편으로 <나폴레옹>과는 전혀 다른 맥락 위에 있다. 하지만 ‘떨쳐내지 못하는 무언가’로 고민하는 모습은 의외로 닮았다고 여겨진다. 로빈 후드는 어느 날 얻게 된 칼의 손잡이 옆에 ‘봉기하라, 양이 사자가 되는 그날까지’라는 문구를 떨쳐내지 못하고 전혀 다른 운명의 길로 빠져든다. 더불어 6살 때 자신을 세상 밖으로 내몬 아버지의 환영이 내내 그를 괴롭힌다. <나폴레옹> 역시 조제핀으로부터 ‘선택당한’ 이후 전혀 다른 운명에 접어든다.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
리들리 스콧 시대극의 가장 오래된 버전
사실 <프로메테우스>와 <나폴레옹> 사이, 리들리 스콧에게 있어 시제의 한계란 없어 보인다.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에 맞서 40만 노예를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모세의 여정과 이집트에 닥친 끔찍한 재앙을 그려낸 <엑소더스>는 고유명사처럼 다가오는 ‘리들리 스콧 시대극’이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간 버전이다. 말하자면 리들리 스콧 시대극의 양 끝에 <엑소더스>와 <나폴레옹>이 있다. 그는 왜 다시 모세 이야기를 끄집어냈던 것일까. 어쩌면 그가 줄곧 그려온 선택 받은 남자의 이야기,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모세와 출애굽은 반드시 다뤄야만 했던 이야기다.

리들리 스콧의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거칠게 <글래디에이터>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면, 그는 그렇게 콜로세움으로 향하는 글래디에이터처럼 버텨왔고, 또한 명맥이 끊겼다고 생각되어온 할리우드 시대극을 찬란하게 부활시킨 장본인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거대한 것을 좋아한다. <글래디에이터>를 만들 당시에는 작품에 어떻게 숨결을 불어넣어야 하는지, 당시 사람들의 삶을 똑같이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엑소더스>에서도 이집트 문화를 최대한 비슷하게,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모습으로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하는 리들리 스콧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 내린다. “<엑소더스>가 보여주는 모세의 일생은 시대를 초월하는 가장 위대한 모험이자 영성의 추구였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는 그 어떤 포상과 벼슬도 바라지 않고 그저 ‘아내의 머리처럼 검은 흙에다 낮에는 허브향, 밤에는 재스민 향이 나는’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말만 한다. 바로 거기에는 아내와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엑소더스>에서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려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시오니즘과 별개로 아내와 아들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기도 하다. <킹덤 오브 헤븐>의 발리안도 종종 밭에서 일을 하는, 죽은 아내의 환영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랬던 리들리 스콧의 남자들이 이제야 모세의 몸을 빌려 비로소 고향에 가게 된 것이다. 열정과 확신에 가득 찼던 이전 남자들에 비하면, 한없이 지쳐 있는 모세의 근원적인 피로감의 이유가 된다. <나폴레옹>에서 드러나는 호아킨 피닉스의 표정에는 그런 피로감이 역력하다.

한편, <엑소더스>는 ‘이 영화를 동생 토니 스콧에게 바친다’는 마지막 자막에 큰 울림이 있다. 어쩌면 진짜 고향으로 돌아간 동생을 보면서 자기 영화 주인공들에게 ‘귀향’의 순간을 선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소박한 귀향을 꿈을 꿨던 이전 시대극 속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나폴레옹>은 가장 다르다. <글래디에이터>나 <로빈 후드>처럼 캐릭터 자체가 영화 제목이 된 영화들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 둘과 비교해도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리들리 스콧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나폴레옹은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궁금한 존재가 되었다.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