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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영화에 담지 못한 틈새 정보들

성찬얼기자
장군의 지위가 힘겨워 보인다
장군의 지위가 힘겨워 보인다

나폴레옹의 인간적 면모는 둘째로 치더라도 76전 64승 12패의 전쟁광적 면모를 싫어하는 밀덕은 없을 것이다. 영화 <나폴레옹>(2023)에서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은 시대가 불렀고, 이에 감응한 영웅이었다. 그렇기에 그 몰락이 더 흥미롭게 그려지기도 한다.


Sir Scott

이 사극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은 SF만큼이나 역사의 재해석에 능숙하다. 그는 늘 과거를 본보기 삼아 현재를 반추해왔다. 공평함을 기리고 자유를 지지했으며 페미니즘적 질문 등을 꽤나 관능적인 영상으로 던지는 명장이지만, 고증보다는 흥미를 앞세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보고나면 미드 한 시즌을 본 기분이다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보고나면 미드 한 시즌을 본 기분이다

​17세기의 프랑스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새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여기저기 숨어든 왕정 세력의 반항은 완강했고, 혁명의 기운을 저어했던 주변국들은 프랑스를 집어삼키려고만 하는 데다, 나폴레옹이라는 군인이 모든 권력을 잡아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정부의 긴 시간으로 인해 혼란과 공황에 시달린 국민들은 나폴레옹을 추대했다. 영웅이 곧 답이라는 나이브한 생각을 가져서일까? 나폴레옹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국력을 안겨줬지만 시위대에게 직접 대포를 겨누기도 했고, 전쟁으로 300만이라는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행사에 참여하자 국제적 비난 여론이 일었던 것 또한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서 기인한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행사에 참여하자 국제적 비난 여론이 일었던 것 또한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서 기인한다

영화는 프랑스 혁명이 절정이었던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형에서 시작하여 나폴레옹이 사망하는 1821년까지의 시간을 다루면서 그의 주된 전투 3개와 흥망성쇠, 그리고 아내였던 조세핀(바네사 커비)과의 관계를 다룬다. 리들리 스콧의 사극 중 <킹덤 오브 헤븐>(2005)과 <로빈 후드>(2010) 모두 극장 개봉 버전과는 별개로 감독판이 존재하는데, 전자의 경우는 50분이 더 긴 감독판이 일반판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번에도 개봉한 <나폴레옹> 역시 2시간 38분이지만, 감독 인터뷰에 의하면 4시간 30분 분량의 디렉터스 컷이 있다고 한다. 일반판은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찬찬히 흘러가야 할 포인트를 건너뛰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가 놓쳤던 지점을 되짚어 보는 글을 마련했다.


​프롤로그 전

전쟁사는 나폴레옹의 전과 후로 나뉘기에 수많은 군인들이 그처럼 전투하길 원했다. 뿐만 아니라 정교분리, 능력주의 확립, 법치주의 구현, 민법전 제정 등 정치적 공적도 있었다.​

당시 귀족 자제들 중 한 명 정도는 군인이 됐다. 하지만 정훈이나 작전 등 편한 병과로 빠졌다. 이에 줄도 빽도 없던 나폴레옹은 기피과인 포병으로 빠졌는데, 수학과 물리에 능했던 그에게 최고의 선택이 됐다. 그는 장비, 교육, 훈련 등을 개혁하며 최초로 포탄의 무게로 포를 구분하여 편제를 구성하기도 했다. 게다가 혁명이 터져 귀족집안 자제들은 죽거나 사형당했지만 전투 병과인 나폴레옹은 살아남기도 했다.​

과격 혁명가들은 국왕 일가의 궁전에 침범하기도 했다. 그들의 호위병인 스위스 용병들은 차마 시민들을 공격할 수 없다며 망설였다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나폴레옹은 이런 대처를 한심하게 생각했기에 시위가 발생하면 잔인하리만큼 초기에 진압을 했다. 영화 속에서 나폴레옹은 봉기하는 시민들에게 포격하기도 하는데, 잔인하게도 곡사도 아닌 무려 직사 포격이었다.


​툴룽 포위전 (1793)

영화의 첫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열심히 성채를 올라가 영국 배를 향해 포격을 한다. 이 승리로 인해 당시 24세였던 나폴레옹은 일약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혁명군에 맞선 왕당파들이 봉기를 할 때였고, 혁명의 기운이 자기에게 오지 않기를 바랐던 주변국들이 왕당을 지원할 때였다. 당시 지휘권이 없었던 나폴레옹은 원래 전투에서 제외된 예비 편제 소속이었지만 프랑스 보병들이 스페인-영국-왕당 연합군을 물리치지 못하자 투입되어 승리를 거머쥔다.

그리고 이집트 원정에서 피라미드에 포를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집트 원정에서 피라미드에 포를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

<나폴레옹>의 메인 예고편의 초반에 등장하는, 오스트리아 군을 수장 시키는 그 전투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에게 맞서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깨부수고 대승을 올렸다.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육군을 정비하며 당시의 군대의 기본 운용 단위였던 연대를 개조하여 사단과 군단의 편제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된다. 나폴레옹 덕분에 각 병과들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통섭적 전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위력이 제대로 발휘된 것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인 것이다. 각개격파 당한 연합군은 산을 넘을 수 없자 얼어있는 호수 쪽으로 대피했는데, 이때 영화 속 전투 장면처럼 포를 쏴서 수장 시킨다.​

이 전투의 승리 소식을 들은 영국은 향후 10년간 프랑스의 승승장구를 점치기도 했다. 그러나 차면 기울듯, 너무나 뛰어난 전투 능력 덕에 주변국을 떨게 만든 나폴레옹은 자신의 힘을 믿으며 외교를 등한시했고, 이는 몰락의 시초가 됐다.

박진감 넘치는 연출 덕에 사상자가 수 천명쯤 되어보이지만 호수에서 사망한 인원은 200여 명이었다
박진감 넘치는 연출 덕에 사상자가 수 천명쯤 되어보이지만 호수에서 사망한 인원은 200여 명이었다

​워털루 전투 (1815)

더 커진 연합군을 상대하는 나폴레옹에게 두 악재가 있었다. 우선 땅이 질어 대포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지휘관이 지휘를 도맡은 것이었다. 영국군이 부상병을 물리는 것을 본 당시 지휘관은 그들이 퇴각하는 줄 알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그때 만나는 것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는 영국군의 보병 방진이었다. 결국 이를 깨지 못한 기병대는 영화 속의 결과처럼 큰 패배를 부른다. 당시 지휘관은 나폴레옹처럼 포병-보병-기병의 콜라보를 능숙히 다루지 못한 탓이었다.

여기서 나자빠진 나폴레옹은 대서양 한가운데로 유배를 가고, 거기서 죽음을 맞이한다.​

보병의 방진은 〈글래디에이터〉(2000)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보병의 방진은 〈글래디에이터〉(2000)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감독의 시선

프랑스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는 절대자를 추대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나폴레옹의 권력을 허했다. 연출자는 이런 태도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영웅이라고 하는 편한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길을 열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라는 것이다.​

외로워서 시작한 연인들은 자유롭고 싶어서 헤어진다. 마찬가지로 영웅적 지도자를 갈망하는 대중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모든 걸 독점하려는 지배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