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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순 백치미 가득한 한선화만 안다면

씨네플레이
한선화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에서 청순 백치 캐릭터, 한지연으로 대중에게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한지연의 인상이 한선화의 밝은 페이스와 잘 붙었던 걸까, 연기자 한선화, 하면 이제 모두 한지연을 떠올린다. 하지만, 2013년부터 무려 10년 넘게 꾸준히 배우의 길을 걸어온 그를 단순히 한 캐릭터에 한정 짓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광고천재 이태백>에서 조연 이소란 역으로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력에 물이 오르며, 데뷔한지 1년 만에 <신의 선물-14일>에서는 제니 역으로 ‘아이돌 출신 연기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본격적으로 연기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2023년 끝 무렵, 한선화는 <교토에서 온 편지>로 백치미 한지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선다. 감정의 섬세한 뉘앙스 하나하나를 관객에게 전달하며, 배우의 길을 닦아온 한선화. 오늘, 한선화의 대표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며, 그가 지닌 매력의 다층적인 면모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연애 말고 결혼> - 강세아

<신의 선물-14일>에서 악역 제니로 대중에게 연기자로서의 인상을 남긴 한선화는 tvN 드라마 <연애 말고 결혼>의 메인 악역 강세아로 악역 연기에 물을 올렸다. 성형외과 전문의로, 아버지 병원에서 근무하는 엘리트 재벌 강세아는 남자 주인공이자 전 남자친구인 공기태(연우진)의 마음을 잡기 위해 여자 주인공 주장미(한그루)와 공기태의 관계를 훼방 놓는다. 전 남자친구에게 가슴 수술을 받으러 가며, “금방 갈아입었네”라는 그의 말에 “걸치고 온 게 별로 없어서”로 당돌하게 응수하며 시청자의 혈압을 쥐었다 폈다 한다. 

 

강세아의 민폐 혹은 미친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 남자친구의 우수한 유전자를 받아 아이를 갖고 싶다며, 그의 정자를 “시험관에 담아줄래, 아니면 한 번 잘래”라는 말과 함께 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든, 전 남자친구의 머릿속을 헤집고 자신으로 채운 것에는 성공. 선을 넘는 대사임에도 한선화는 특유의 화려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 톤으로 나르시시스트 강세아를 완벽히 소화해냈다. 사회적 상식에서 벗어난 괴짜, 한지연을 찰떡같이 연기하는 한선화의 연기력은 강세아로 이미 다져져 있었을지도.

 


<장미빛 연인들> - 백장미

<장미빛 연인들>은 막장 드라마로 시청자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만큼 많은 관심도 얻은 작품으로, 시청률 최고 28.3%까지 기록했다. 한선화는 극중 백장미 역으로, 연기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주연 자리를 차지했다. 밉상 악역으로 이미지를 이어가던 한선화는 <장미빛 연인들>에서는 여주인공 역을 맡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남편과 아이를 두고 해외로 떠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태도에 오히려 비호감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동적이고 회피하는 성향의 캐릭터성에도 불구하고, 한선화는 백장미의 상황과 추후 딸을 다시 만나 자신의 과오를 뒷수습하는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고, 이는 곧 배우 한선화의 발견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래도 걸그룹 출신인데, 주말극을 주연으로 잘 끌어갈 수 있을까?”라는 우려와 달리, 한선화는 까다로운 안방극장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엄마의 혼란스러움과 뒤늦은 후회, 그리고 성장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막장 드라마라는 오명에 가려져 있던 본래의 기획 의도 ‘실패와 성장, 그리고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여러 가지 평가가 뒤엉켰지만, 한선화는 <장미빛 연인들>에 대해 “나에게는 정말 고맙고, 또 날 키워준 작품이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술꾼도시여자들> - 한지연

 

연기자 한선화에게 날개를 달아준 작품, <술꾼도시여자들>(이하 <술도녀>)은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로, ‘하루 끝 술 한잔’이 인생 신념인 세 여자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한선화는 무한긍정에 엉뚱한 요가강사 한지연 역을 맡았는데, 과장될 정도로 높은 톤과 텐션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할 말 다 하면서도 밉지 않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사회생활 만렙’, ‘진짜 기 센 사람 특징’과 같은 이름으로 클립이 돌아다닐 정도. 요가 강사로 일하기 전, 영양사로 일했던 한지연은 잡채가 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도너리~’(Don’t Worry)라며 특유의 넉살과 애교로 상황을 정리한다. 클레임이 들어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상대방이 “사인 좀 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능글맞게 넘어가는데, 그런 모습에 대중은 “저 성격 부럽다”, “너무 사랑스럽다”라며 열광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회에서 웃으면서 할 말 다 하는 모습은 어쩌면 대중이 원하는 가장 완벽한 사회인일 수도. 

 

평소에도 높은 텐션에 긍정적인 이미지로 유명한 한선화도 한지연의 텐션은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는데, 그는 “너무 텐션이 높아서 시청자들이 밉게 받아들일까 봐 걱정도 됐죠”라고 말하며, “밉상으로 보이지 않도록, 또 악의적으로 내뱉는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사랑스럽게 표현하려고 했어요”라고 한지연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였다. 우리가 그를 사랑스럽게 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1차원적인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중요한 순간에는 톤을 조절하며 속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캐릭터 매력을 한층 심화하는 데 일조했다. 

 


<창밖은 겨울> - 양영애

한지연이 너무 잘 어울렸던 탓일까, 한선화 하면 한지연의 모습을 떠올리는 대중들이 많아졌지만, 사실 한선화는 주로 차분하거나 외로운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영화 <창밖은 겨울>에서 그는 주인공 양영애 역을 맡았는데, <술도녀>의 한지연과는 완전히 다른, 사투리가 자연스러운 소박한 버스 터미널 직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향인 창원시로 내려와  버스 기사로 일하는 남자 주인공 석우(곽민규)가 우연히 고장난 MP3플레이어를 주운 것을 계기로, 유실물 보관소를 관리하는 버스터미널 직원 양영애(한선화)와 말문을 트게 된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소도시 창원시 진해구의 모습과 느릿한 두 남녀의 사랑은 겨울에 딱 어울리는 미적한 온기를 선사한다. 

 

극중에서 양영애는 바쁜 와중에 계속 자신을 찾아오는 석우를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데, 부산 출신인 만큼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과 거침없는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이외에도 그는 데뷔 이래 줄곧 유지해온 긴 머리카락을 영화를 위해 거침없이 잘랐는데, 탁구선수 출신이라는 캐릭터 설정에 부합하기 위해선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스스로 타당하다고 납득하는 일에 절대 주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담배를 위안으로 여기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담배도 배웠다고 덧붙였다. 연기 10년차지만 여전히 배울 게 너무 많다고 답하며, 그는 쉴 때도 “신인들끼리 모여 대본도 공유하고 서로가 연기하는 모습을 봐준다”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교토에서 온 편지> - 혜영

10년 동안 안방극장부터 트렌디한 드라마, 독립 영화까지 두루 섭렵한 한선화는 이번에 또 다른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로 새로운 매력을 선보인다. 영화는 부산 영도에서 자란 세 자매가 고향 집에서 오래된 일본어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50년 동안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며, 단 한 번도 영도를 떠난 적 없는 엄마 화자(차미경)가 치매로 인해 삶의 기억이 흐려지자 처음으로 “교토에 가고 싶다”고 선언한다. 이제는 일본어를 잊어버린 화자가 오카상(おかあさん‧어머니)이라 외치는 장면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만큼은 잊지 못했음이 사무치게 드러난다. 

 

영화는 작가를 꿈꾸던 혜영(한선화)이가 서울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오고, 처음으로 엄마의 삶에 궁금증을 갖게 되는 이야기로, 한선화는 가족 틈에서 겉도는 둘째 혜영을 맡았다. 그는 <창밖은 겨울>보다 한층 더 성숙하고 안정된 연기로, 외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산 영도라는 모습을 꼼꼼히 담아냈다. 지역 방송국에서 풀타임 근무를 제안받지만, 서울에 살아야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망설이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지방인이기에 갖고 있는 서울과 지방의 간극을 드러낸다. 가장 익숙한 공간, 부산에서 가장 귀에 익은 말을 내뱉으며 자연스러운 모습의 한선화를 보고 싶다면 <교토에서 온 편지>를 추천한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그의 연기가 그곳에 차곡히 쌓여있다.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