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플랜 75>는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스스로 안락사를 택할 기회와 혜택을 제공하는 사회를 그린 작품이다. 고령의 주인공 미치(바이쇼 치에코)를 중심으로 '플랜 75'에서 일하는 히로무와 요코, 이주노동자 마리아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교차시키면서, 노인을 배척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방한해 한국 관객들을 만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을 인터뷰했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성 정보가 있습니다 ***
한국엔 여러 차례 오셨죠.
이번이 여섯 번째입니다. 항상 영화제 일로 와서 이틀이나 삼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관광은 거의 못했는데, 내일 4시간 정도 프리 타임이 있습니다. (웃음) 처음 온 건 2014년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단편 <나이아가라>가 초청돼 그랑프리를 수상해서 매우 기뻤습니다. 2016년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단편 <메이의 겨울>이 상영됐고요. 부산국제영화제엔 연속 3번 왔습니다. 2017년엔 <10년> 프로젝트에 참여한 감독님들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 영화를 알리기 위한 컨퍼런스를 진행했고, 그 다음 해에 영화제에서 <10년>이 상영돼서 왔고요. 2022년엔 <플랜 75>가 상영돼서 방문했습니다. 201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윤가은 감독님의 <콩나물>(2013)을 인상 깊게 봤는데, 재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윤가은 감독님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만나서 너무 좋았습니다. 아시아국제단편영화제에서 만났던 (훗날 <만분의 일초>를 연출하는) 김성환 감독님을 말레이시아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옴니버스 영화 <10년>에 이미 단편 버전의 <플랜 75>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플랜 75>가 장편이 되기까지 4년 정도가 지난 셈인데요.
<플랜 75>는 원래부터 장편으로 기획했습니다. <10년> 프로젝트에 대해서 듣고 단편으로 만든 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편 <플랜 75>로 처음 프로 스태프분들과 작업했고, 그 작품의 PD님과 장편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원래 장편은 5명 정도 인물의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고, 단편 <플랜 75>는 그중에서 1명을 꼽은 것입니다. 18분이라는 시간 제약이 있었고 짧고 임팩트 있게 콘셉트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인상을 남겨야겠다는 의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묘사나 표현하는 부분에서 부족함을 많이 느꼈고, 결국엔 너무 단순하게 전달이 됐기 때문에 이 영화는 꼭 장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통상적으로 신인감독이 원작이 있는 게 아닌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 데에 제작비를 대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예산 확보에도 상당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와 겹쳐서 작업이 더뎌진 부분도 있습니다.
장편 <플랜 75>엔 크게 4명의 인물(미치, 히로무, 요코, 마리아)이 있습니다. 초기 계획에도 그 네 사람이 모두 있었나요?
미치라는 주인공이 있고, 콜센터 직원인 요코가 있고, 이주노동자인 마리아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로무도 있긴 했지만 원래는 의사라는 설정이었습니다. 이타미도 원래 설정에 있는 인물이고 결국 히로무가 이타미와 히로무가 서로 섞여서 만들어진 인물이 됐습니다.

단편 <플랜 75>와 장편 <플랜 75>는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나요?
원래는 단편 장편 모두 어두운 결말을 예상했고요. 이렇게 심각한 세상으로 내버려둬도 좋을까? 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한 저의 분노가 반영된 영화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각본을 쓸 때 코로나가 터졌고 세상이 굉장히 처참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렇게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조금 더 어두운 작품을 만들고 불안을 조장하는 듯한 건 안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단편에는 내비치지 않았던 희망의 징조 같은 걸 장편에는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을 반영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단편을 보시면 아실 텐데 끝부분에서 강당 같은 데에 침대 커튼 침대 커튼으로 된 곳이 있습니다. 그걸 찍은 건 2017년이었는데요. 코로나가 터지니까 단체 격리를 시키는 상황이 그 장면과 많이 비슷했어요. 현실이 픽션을 넘어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기분이 좋질 않아서 그런 부분을 피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국가들에서는 구명을 위해서 고령자가 인공호흡기를 젊은 세대들한테 인공호흡기를 양보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고 들었고요.

‘스토리’ 크레딧에 오른 제이슨 그레이 님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스크립트 어드바이저 역할로 참여해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감정 변화를 조금 더 거시적으로 보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고편만 본 채로 영화를 봤을 때 인트로가 주는 쇼크가 상당합니다.
이 영화를 만든 계기가 된 실제 사건이 있습니다. 2016년 가나가와현 장애인 시설에서 전(前) 직원이 19명을 죽였습니다.. 범인이 동기에 대해서 장애인을 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회를 위해 이 일을 벌인 거다 라고 말한 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태도가 ‘플랜 75’라는 제도와 결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폭력적인 부분을 앞에 배치하고 뒤에 ‘플랜 75’는 평화롭고 친근한 듯한 접근 방식을 취했는데 사실은 그 기저에는 그런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생각이 있다는 걸 구태여 부각하고자 했습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이 묘하게 서로 반응하도록 배치한 것 같습니다.
처음은 이른 아침, 마지막은 저녁 즈음이었는데요. 미치가 부르는 노래 중 “오늘의 해는 지지만 내일 또 만나자”라는 식의 가사가 있습니다. 미치가 앞으로도 지금 태양은 지고 있지만 내일 또 살아갈 것이다라는 생각을 담은 가사를 부르죠. 첫 장면을 보면 포커스가 안 맞고 뿌옇습니다. 촬영감독님의 의도이기도 한데요, 세상이 흐릿하고 혼돈스럽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고요. 마지막 신에서도 잘 보면 미치가 해를 바라보지만 거기서도 포커스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주인공 미치 역에 바이쇼 치에코 배우님을 캐스팅했습니다.
주인공 미치가 점점 죽음을 강요받지만, 비참하거나 동정을 사는 듯한 인물로 그려지진 않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강인함이나 총명한 느낌을 드러내고 싶어서 바이쇼 치에코 배우님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고요. 이런 연령대가 현실적으로 보일 법한 배우분을 생각했고 나이가 드셔도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 꾸미고자 하는 배우분도 많으신데요. 메이크업을 하지 않더라도 일을 위해서라면 이 역할을 하겠어, 그런 프로 정신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배우님을 캐스팅했습니다.
실제 미치와 비슷한 연배의 바이쇼 배우님이 주는 인물 혹은 영화에 대한 의견들 중 작품에 중요하게 작용한 대목이 있나요?
각본을 제가 쓰긴 했지만 미치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한 건 바이쇼 배우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를 찍기 전에 이 부분은 조금은 삭제를 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 장면은 없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그것 외에도 이건 안 해도 괜찮아요 했을 때 이것 없으면 안돼 라는 말씀을 해주셔서, 완성된 영화를 보니까 그 신이 없었으면 이 영화는 성립되지 않았겠구나 하는 부분도 있었고요. (예를 들어 어떤 장면이 있을까요?) 호텔에서 해고된 다음에 교통정리를 하는 대목은 완전히 삭제하려고 했는데 “나 경비원복 입고 싶어”라고 말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주도를 하셔서 결과적으로 슬픔이 많이 느껴지는 신이 됐습니다. 바이쇼 배우님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한 테이크만으로 오케이가 나온 신이 대부분이었어서 그분 덕분에 구원을 받은 영화라고도 생각합니다.
<플랜 75>가 글로벌 프로젝트여서 가능했던 건 무엇일까요?
일단 이 영화는 일본, 프랑스, 필리핀이 관여한 영화입니다. 필리핀에서는 프로듀서 분이 리서치에 적극적으로 참가를 해주시고 캐스팅에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후반 작업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됐고요. 인물들이 교차되는 과정은 각본 단계에서 이미 구성이 나온 상태였는데, 프랑스에서 프랑스 편집자(안느 클로츠)와 함께 작업하면서 완전히 바뀐 부분도 있습니다. 히로무가 심경의 변화가 드러나는 타이밍이 후반부에 나오는데, 원래는 중반부로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밖에 편집, 사운드, 컬러 그레이딩 등을 프랑스에 맡겼는데, 일본은 포스트 프로덕션에 돈이나 시간을 잘 안 들이는 편입니다.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런 제작 형태를 갖추게 됐습니다.

이주노동자인 마리아가 '소수자성'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흥미롭습니다.
마리아는 필리핀에서 온 인물이라는 설정입니다. 필리핀 사회가 가족이나 커뮤니티에 정이 굉장히 끈끈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외국에 나가더라도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상부상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필리핀에선 정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한다는 근본을 갖고 있는데, 일본과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요즘 일본 사람들은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기저에 갖고 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 풍토가 형성돼서 고립이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걸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일본인 등장인물을 보면 모두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회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자기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순종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반면에 마리아는 유일하게 양심과 자기 가치관을 갖고 행동을 일으키는 인물이어서 그런 대조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도중에 바뀌긴 했지만 원래는 미치와 마리아가 만나게 되고 마리아가 미치를 구출하는 설정도 있었습니다.
요코가 대뜸 카메라를 보는 장면이 주는 임팩트도 큽니다.
처음에 요코는 그저 업무로서 플랜 75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미치와 만나고 서로 소통하면서 점점 수화기 너머의 실제로 존재하는 노인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죠. 정이 싹텄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미치와의 대화를 통해서 플랜 75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시스템인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잔혹한 일에 가담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되고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그렇게 응시함으로써 관객과 눈이 마주칩니다. 거기 눈을 마주친 당신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방관자로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각성하는 눈빛을 보여주지만 요코는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끝난 뒤에 변화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죠. 미치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고, 집에 찾아갈 수 있고, 플랜 75에 맹렬히 반대하는 인물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가능성을 남겨두었습니다.
단편 <나이아가라> 역시 중심인물 중에 노인 캐릭터가 나오는데요. 유독 노인의 캐릭터에 대해서 천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긴 한데요. 이전에 고령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각본을 쓰기도 해서 생각해보면, 끌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조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신 편이고 가까이에 고령자가 많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많이들 질문 주셔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60세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암 때문에 몸이 굉장히 마르셨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거나, 뇌에 무리가 가서 치매 증상도 보이셨고요. 투병하는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어서 사람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존엄성이 있는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차기작 <르누아르>는 어떤 작품인가요?
<르누아르>는 암 투병하는 아버지를 두고 있는 11세 소녀와 그 가족의 여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 아버지가 암 투병하셨고 매일같이 병원에 갔던 경험이 있어서 그게 바탕이 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 이야기라고 하니까 제목의 르누아르가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웃음)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