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로 74회를 맞는 베를린 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루피타 뇽 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알베르트 세라, 크리스티안 페촐트 등 심사위원들은 마티 디옵의 <다호메이>에 황금곰상을,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에 은곰상(심사위원대상) 등을 수여했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 처음 선보인 화제작들을 소개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팀 밀란츠

올해 개막작은 <오펜하이머>(2023)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킬리언 머피의 신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현재 한국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을,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조명한 <헝거>(2008)의 시나리오를 쓴 엔다 월쉬가 각색했다. 1985년 크리스마스의 아일랜드, 가톨릭 공동체가 절대적인 권력을 자랑하는 작은 마을 뉴 로스를 배경으로 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다섯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석탄 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이 동네 수녀원으로 배달 갔다가 그곳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양심을 지켜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다. 킬리언 머피는 주연뿐만 아니라 맷 데이먼 등과 함께 제작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원장 수녀 메리를 연기한 에밀리 왓슨이 올해 베를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다호메이
Dahomey
마티 디옵

이번 베를린 황금곰상은 장편 데뷔작 <애틀랜틱스>(2019)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프랑스/세네갈 감독 마티 디옵의 새 다큐멘터리 <다호메이>에 돌아갔다. 프랑스 파리의 께 브랑리 박물관(musée du quai Branly)에 전시돼 있던 다호메이 왕국의 왕실 유물 26점이 고국인 베냉 공화국에 반환되는 문제를 탐구한다. <애틀랜틱스> 이전에도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가리지 않는 여러 단편 작업을 해왔던 마티 디옵은 <다호메이>에도 사실과 허구를 융합해 프랑스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문화예술을 약탈한 역사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조상의 유물이 부재했던 베냉의 젊은 지식인들의 반응까지 아우른다. 베냉 출신의 뮤지션 왈리 바다루가 영국의 딘 블런트와 함께 음악을 만들었다.
제국
L'Empire
브루노 뒤몽

칸 영화제의 총애를 받아 왔던 프랑스 감독 브루노 뒤몽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까미유 끌로델>(2013) 이후 11년 만에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해온 뒤몽의 신작 <제국>의 장르는 무려 SF. "우주 깊은 곳의 두 개 세력이 프랑스 북부의 그림 같은 해변 오팔에 와서 충돌을 일으킨다"는 황당무계한 시놉시스는 왠지 감독의 TV 시리즈 <릴 퀸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혹자는 <제국>을 두고 <스타워즈>에 대한 패러디라는 평을 남겼다. <프렌치 디스패치>(2021)의 리나 쿠드리와 <레벤느망>(2021)의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가 주연을 맡았다. 심사위원상 수상.
아키텍튼
Architecton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호아킨 피닉스가 제작을 맡고, 폴 토마스 앤더슨이 "순수한 영화"라며 극찬한 <군다>(2020)를 연출한 러시아 다큐멘터리 감독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신작.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의 조경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추는 와중, 서기 60년에 지어진 레바논의 바알벡 신전부터 2023년 초 7.8도 지진으로 파괴된 터키의 도시들까지 아우르는 이미지들을 포착하면서 문명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인류가 보여준 웅장함과 어리석음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 되묻는 방식은, 돼지와 동물들의 일상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육식의 문제점을 꼬집는 <군다>의 방법론을 상기시킨다.
홍차
Black Tea
압델라만 시사코

말리 감독 압데라만 시사코는 서아프리카의 전통을 상징하는 도시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장악당한 후의 비극을 그린 <팀북투>(2014) 이후 10년 만에 신작 <홍차>를 발표해 처음 베를린 경쟁부문 후보에 올랐다. <홍차>는 결혼식 전날 남편을 거부한 코트티부아르의 30대 여성 아야(니나 멜로)가 중국 광저우로 이주해 차 가게에서 일하고 40대 중반의 사장 차이(장한)에게 다도를 배우면서 그와의 사랑을 키워가는 로맨스다. '향기 어린 언덕'(La Colline Parfumée)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던 <홍차>는 시사코가 같은 이름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아프리카인/중국인 부부를 보고 영감을 얻어서 만든 작품이라고.
서스펜디드 타임
Hors du temps / Suspended Time
올리비에 아사야스

칸과 베니스에서 고루 러브콜을 받아온 프랑스의 거장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와스프 네트워크>(2019) 이후 5년 만에 내놓는 새 영화 <서스펜디드 타임>으로 처음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됐다. 2020년 4월, 영화감독 에티엔(미샤 레스코)과 음악 저널리스트 폴(뱅상 마케뉴)은 새 연인과 함께 어린 시절 살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집 곳곳에 있는 것들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부모님과 이웃 등 지금은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코로나 봉쇄 기간 어린 시절 일기를 꺼내봤던 경험을 바탕으로 신작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아사야스 영화에서 과거란 곧 불안으로 귀결했다는 걸 떠올린다면 <서스펜디드 타임> 역시 비단 따뜻한 노스탤지어에 기대지는 않을 것 같다.
차임
チャイム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의 필모그래피는 <스파이의 아내>를 내놓은 2020년 이후 '이례적으로' 멈춰 있었는데, 근래 3개의 신작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올해 '베를린 스페셜' 부문에 초청된 중편 <차임>도 그중 하나. 프로듀서가 "SF도 호러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장르"라 밝힌 <차임>은 차임 소리로 잠에서 깨어난 중년 남자가 일상과 초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요리학교 교사인 주인공 마츠오카(요시오카 무츠오)는 어느 날 학생이 "머리 절반이 기계가 되었다"고 말하고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걸 보고, 며칠 후 또 다른 학생이 치킨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걸 보면서 불안에 휩싸인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뱀의 길>(1998)을 프랑스에서 셀프 리메이크 한 <뱀의 길> 촬영을 마치고, 아주 짧은 기간에 <차임>을 찍었다.
무소주
無所住
차이밍량

<하류>(1997), <흔들리는 구름>(2005), <데이즈>(2020)로 베를린 영화제 연을 맺어온 차이 밍량은 2012년부터 페르소나 이강생과 함께 <행자> 연작을 이어오고 있다. 중국과 인도 사이를 걸어서 여행한 당나라 승려 현장에게서 영감을 얻은 연작은 승려복을 입은 이강생이 세계 곳곳을 아주 느리게 걷는 과정을 포착했다. 베를린 스페셜 부분에 초청된 <무소주>는 <승려> 시리즈의 10번째 작품이다. 79분 러닝타임에 이강생이 워싱턴 DC를 걷는 모습을 담았다. 이강생과 함께 <데이즈> 주연을 맡은 아농 홍흐앙시도 배우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새벽에 모든
夜明けのすべて
미야케 쇼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으로 한국에서도 서서히 팬덤을 넓혀가고 있는 일본 감독 미야케 쇼의 신작 <새벽에 모든>은 '포럼' 부문에 초청됐다. 세오 마이코의 소설 『새벽에 모든』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PMS(월경전 증후군)로 이따금씩 짜증을 참지 못하는 여자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가 공황장애를 앓는 회사 동료 야마자세(마츠무라 호쿠토)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린다. 드라마 <컴 컴 에브리바디>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카미시라이시 모네와 마츠무라 호쿠토가 사랑도 우정도 아닌 감정적인 연대를 쌓는 두 주인공을 연기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