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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아시아필름어워즈 결산 및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 단독 인터뷰

주성철편집장

일본영화 축제였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 그렇게 세 명의 일본 감독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지난 3월 10일 홍콩 시취센터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필름어워즈(Asian Film Awards)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음악상까지 2개 부문을 수상했다. 개인 사정상 영화제를 찾지 못한 하마구치 류스케는 앞서 화상 인터뷰로 수상 소감을 대신했고, 타카다 사토시 프로듀서가 대리 수상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지난해 아시아필름어워즈에서도 작품상, 편집상, 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이시바시 에이코 또한 2년 연속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올해의 감독상 역시 <괴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였는데, 그는 지난해에도 <브로커>로 감독상을 수상했었다. 더구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스승이자, 올해 어워즈의 심사위원장인 구로사와 기요시가 작품상과 감독상 모두 시상자로 나서 일본영화계로서는 더없이 감동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작품상을 수상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상을 수상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  로 감독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로 감독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시아필름어워즈는 지난 2007년 시작된 영화 시상식으로, 이를 주최하는 비영리단체 아시아필름어워즈아카데미(Asian Films Awards Academy)는 아시아 영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부산, 홍콩 및 도쿄국제영화제가 함께 설립했다. 아시아 영화와 영화인을 홍보하고 알리기 위해 매년 아시아필름어워즈를 개최하고, 중장기적인 계획을 통해 아시아영화 산업을 조명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올해처럼 개최 지역인 홍콩과 중국의 영화인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영화인들도 글로벌 시상자로 무대에 서는데, 이번 어워즈에서는 현재 국내 개봉 중인 영화 <돌핀>의 배우 권유리가 <비상선언>의 한재림 감독과 함께 영화의 음향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운드 디자이너에게 주는 음향상 부문의 시상자로 나서 눈길을 끌었다.

 

아시아필름어워즈 행사장 사진
아시아필름어워즈 행사장 사진

올해 아시아필름어워즈를 주목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바꾼 거대한 사건인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1천3백만 관객 흥행 돌풍을 일으킨 <서울의 봄>이 작품상부터 감독상(김성수), 남우주연상(황정민), 남우조연상(박훈), 촬영상(이모개), 편집상(김상범)까지 총 6개 부문 후보로 올랐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남우조연상과 편집상,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올해 아시아필름어워즈를 찾은 김성수 감독을 만나 인터뷰했다. 2024년 들어 첫 인터뷰라는 그는 <서울의 봄>과 거리두기를 하며 새로운 작품을 모색 중이다.

 


“<서울의 봄>의 해답을 찾아준 건, 바로 관객이다.”

- 김성수 감독 인터뷰

홍콩은 얼마 만에 찾으신 건가요.

<감기>(2013) 오프닝, 홍콩 장면을 찍기 위해 12년 전에 온 뒤 처음이에요.(웃음)

 

그럼 혹시 홍콩에는 언제 처음 오셨나요.

 

예전에 제 데뷔작인 <런어웨이>(1995) 끝나고 뒤늦게 신혼여행을 발리로 가게 됐어요. <런어웨이>가 잘 안돼서 굉장히 좋지 않은 상태로 신혼여행을 가게 됐는데,(웃음) 경유지로 홍콩에서 며칠 있게 됐죠. 심지어 돌아올 때도 며칠 있었어요. 사실 아내는 그저 평범한 홍콩 관광을 하고 싶어 했는데, 나는 계속 몽콕과 침사추이의 뒷골목만 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어요. 홍콩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다 <중경삼림>(1995)에 나오는 중경 빌딩에서 인도인에게 가죽 재킷을 사서는 깃을 딱 세우고 사진도 찍었죠. 아내는 ‘이런 사진을 왜 찍냐’며 엄청 저를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어쨌건 고맙게도 계속 제 사진을 찍어 줬어요.(웃음) 낡고 좁고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전신주가 들어선 골목에서 담뱃불 붙이거나 물고 있는, 솔직히 이제는 절대 공개할 수 없는 사진이 대부분이죠. 솔직히 발리보다 홍콩의 허름한 뒷골목이 훨씬 좋더라고요.

 

〈서울의 봄〉  촬영현장의 김성수 감독
〈서울의 봄〉  촬영현장의 김성수 감독

이후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9)를 지나 <무사>(2001)를 준비하면서는 꽤 오실 일이 있지 않으셨을까요.

 

나중에 <무사> 준비할 때는, 1999년도 정도에 중국에 가서 정말 오래 있었죠. 예정된 기간보다 더 있게 됐는데, 제대로 준비해서 프로덕션을 성사시키기 전까지 절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조민환 대표와 수많은 현지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 <무사> 팀이 꾸려졌어요. 당시 서울 우리 집이 이사해야 했는데, 돌아오지 못하던 저 때문에 아내가 정말 고생했죠.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까, 앞으로 펼쳐질 본격적인 촬영 대장정을 앞두고 한동안 좀 쉬고 싶더라고요. 어디 편한 데 가서 며칠 쉬고 싶다고 하니까, 아내가 어딜 가고 싶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홍콩이라고 했죠.(웃음) 준비하는 영화가 <무사>라는 무협영화이기도 했고, 홍콩영화가 뭔가 내게는 영화적 원천이 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사실 그즈음에 (최종적으로 장쯔이가 연기한) 부용공주 역으로 오천련을 캐스팅하고 싶어서 몇 번 홍콩에 가기도 했죠. <타락천사>(1995)와 <동방불패>(1992)의 이가흔도 만났고요. 당시 오천련을 너무 좋아해서 꼭 캐스팅하고 싶었는데 스케줄 등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아 최종적으로 무산됐죠. 만나서 밤새 <천장지구>(1990) 얘기만 했던 기억이 있어요. 생각보다 훨씬 시원시원하고 화통한 성격이 매력적이었죠. <천장지구> 마지막 장면을 찍으며 밤새 맨발로 얼마나 오래 텅 빈 거리를 뛰었는지 물어봤던 기억이 있네요.(웃음)

 

워낙 홍콩영화 팬으로 유명하신데, 어떤 홍콩영화를 좋아하셨나요.

 

‘외팔이’ 왕우와 적룡, 강대위로 대표되는 장철 감독의 영화를 정말 좋아했죠. 호금전 감독의 영화는 나중에 공부하면서 좋아하게 된 경우고요. 그러다가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이소룡인데, 저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을지로 계림극장에서 <당산대형>(1973)을 본 이후로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이소룡에게 지배당했죠. 그러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수많은 아류의 ‘룡’들이 등장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 성룡이라는 대스타가 또 등장했어요. 이소룡처럼 진지한 면이 별로 없고 웃기는 스타일이었는데, 영화 내내 죽도록 ‘다이 하드’처럼 고생하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긴 했지만, 이소룡처럼 좋아지진 않았죠. 이후 <영웅본색>(1987)을 기점으로 홍콩 누아르 영화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때도 사실 막 보러 다니고 하진 않았어요. 그때는 이미 영화를 좀 진지하게 공부하고 영화 동아리 활동도 하던 때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당시 동아리에 들어갈 때 좋아하는 영화들을 써내야 했는데 <당산대형>은 물론이고 <맹룡과강>(1972), <용쟁호투>(1973) 같은 이소룡 영화들을 썼죠. 다들 왜 이런 영화들을 좋아하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저도 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 이탈리아 영화, 러시아 영화들을 보러 다니던 친구들에게 물들게 됐죠.(웃음) 그렇게 홍콩영화에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던 때를 보내고, 뒤늦게 다시 홍콩영화에 빠져들게 됐는데 주윤발은 진짜 멋지더라고요. 최고죠 최고. 당시 서양 문화가 완전히 지배하던 때였으니까,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언제나 아시아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진짜 멋이 안 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주윤발은 완전히 달랐죠. 그 자체로 근사하고 당당하고 젠틀하고 자기만의 아우라를 풍기는 배우였어요. 그처럼 뒤늦게 홍콩 누아르에 입문하게 된 건데, <영웅본색>을 보니까 내가 오래전 좋아했던 장철 영화의 최고 ‘쾌남’ 적룡 형이 머리가 많이 벗겨진 모습이어서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네요.(웃음)

 

〈외팔이〉의 왕우(왼쪽 사진)와 〈맹룡과강〉의 이소룡
〈외팔이〉의 왕우(왼쪽 사진)와 〈맹룡과강〉의 이소룡

주윤발 얘기를 하시니까, 얼마 전 <첩혈쌍웅>(1989)을 다시 보는데 초반부에 경찰 이수현이 범죄자를 쫓는 트램 추격신에서, 원 신 원 컷으로 트램의 후미로 그냥 올라타더라고요. ‘맞아, 이수현도 쇼 브라더스에서 발굴한 액션배우 출신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당시 홍콩 장르영화의 에너지와 쾌감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사실 그런 게 홍콩영화에서 느끼는 중요한 매력 중의 하나였죠. 얘기하신 것처럼 그리 중요하고 대단한 장면이 아닌데도 그런 장면들이 모이고 모여서 전체적인 완성도를 만드는 거죠. 그렇게 뚝딱 완성해내는 에너지가 정말 대단했죠. 찰리 채플린도 그렇지만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1926)을 보면서 그가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장면들을 보면 경탄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죠. 당시 홍콩영화 특유의 액션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영화적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그 느낌이 진짜 ‘영화적’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것의 총화가 성룡이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사실 장철 영화의 비장미가 결여된 성룡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영화에 온몸을 내던져 헌신하고 관객에게 진짜 엔터테이닝한 즐거움을 주는 그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엔터테인먼트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영화의 본령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가게 된 거죠.

 

〈취권〉의 성룡(왼쪽 사진)과 〈영웅본색〉의 적룡과 주윤발
〈취권〉의 성룡(왼쪽 사진)과 〈영웅본색〉의 적룡과 주윤발

<서울의 봄>이 무려 1천3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이번에 아시아필름어워즈 6개 부문 후보에도 오르고, 하여간 이제 이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소회가 어떠신가요.

올해 들어 영화로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에요. 작년 말 이선균 배우가 세상을 뜨고, 그 우울한 기분은 배우들도 마찬가지여서 <서울의 봄> 천만 돌파 기념으로 한 번 모인 게 전부였던 것 같아요. 그러고는 거의 내내 집에만 있었죠. 그러다 보니 <서울의 봄>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걸까, 하는 생각도 다시 한 번 해보게 됐는데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모르면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고요.(웃음) 거꾸로 맨 처음 <서울의 봄>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봤어요. 저를 포함한 제작진이 생각할 때는, <서울의 봄>이 대중영화나 흥행 영화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관객, 특히 젊은 관객에게 다가가기에는 약점이 너무 많은 영화라고 봤어요. 엔딩도 좀 그렇잖아요. 어떤 웃음이나 감동이나 카타르시스가 있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아주 잘 만들어도 사람들이 굉장히 짜증을 내고 분노하는 영화일 거다, 확장성이 없는 영화일 거다, 라는 얘기를 많이 했죠. 그런데 막상 영화가 개봉하고 무섭게 흥행이 되니까 영화가 가진 힘이라기보다, 제작진과 마음이 통한 관객의 응원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는 천만이 문제가 아니라 흥행 영화 자체를 잘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굳이 알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있고요.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그 이유를 알면 거기에 갇히게 될 거라고.(웃음)

모처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면서 새롭게 보신 작품들이 있으신가요?

최근 본 OTT 시리즈 중에서는 <살인자o난감>이 훌륭했어요. 서사와 캐릭터가 맞물리는 힘이 좋더라고요. 영화 중에서는 <노량: 죽음의 바다>(2023)가 좋았어요. 후반부의 선상 전투신은 정말 대단했어요. 저런 걸 내가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에 액션영화가 미치도록 찍고 싶더라고요.(웃음) 최근에는 <파묘>도 정말 좋았어요. 저는 호러나 오컬트는 잘 모르는 장르인데다 무서워서 만들 생각도 없는 장르인데, <파묘>는 스토리텔링도 그렇고 되게 새롭더라고요. 최근 제게 가장 큰 자극을 준 영화였어요. 그리고 최근에 주변에서 <범죄도시4>가 잘 나왔다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듣고 있거든요. 그러면 하반기에는 한국영화들이 좀 더 큰 힘을 받지 않을까 싶어요.

 

〈서울의 봄〉  촬영현장
〈서울의 봄〉  촬영현장

최근 <파묘> GV에 게스트로 참여하셨는데요. <서울의 봄>과 <파묘>는 장르적으로 완전히 다르지만, 주인공들이 살아남는다는 점에서는 의미심장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클라이맥스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주인공을 죽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의 봄>은 정반대였죠. 라스트에 이르러 이태신 장군(정우성)이 내린 결단이야말로, 사실 <서울의 봄>이 감독님의 이전 영화들과 가장 다른 점이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좋아했던 영화들은, 시작과 동시에 작품의 향방을 알려줬어요. 주인공의 목적과 그의 라이벌이 나와야 했죠. 그리고 영화의 가장 근사한 종결이 바로 주인공의 죽음이었어요. 90년대까지 장르영화를 지배한 정서이기도 했죠.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그런 상투성에서 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생긴 것 같아요. 그런 가운데에도 <로건>(2017)에서 울버린의 죽음처럼 근사한 결말을 보기도 했죠. 불사의 존재를 역이용하여 그렇게 만든 거죠. 아무튼 장르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에게 그건 서사에 있어서 중요한 숙제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서울의 봄>을 만들면서 그걸 처음부터 크게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그런 이야기를 택했다는 점에서 저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지금에 와서 <서울의 봄>을 돌아보면, 자신의 스타일이나 영화관, 혹은 더 나아가서는 세계관이 변화하는 경험까지도 혹시 하셨나요?

솔직히 제게 그런 터닝 포인트는 <아수라>(2016) 때였어요. 연출 스타일이 일단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건 혼자 바뀐 거라기보다는 이모개 촬영감독의 도움이 컸죠. <감기>(2013)로 이모개 촬영감독을 만난 이후, 배우들과 리허설을 해서 자연스럽게 어떤 상황을 연극처럼,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을 결정하고 연습하는 블로킹을 만드는 일을 즐기게 됐죠. 그걸 배우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끔 자연스럽게 찍어서,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이나 이런 게 좀 실제 같은 느낌을 주는데 주력했어요. 배우들이 틀에 박힌 자세를 취하거나 앉거나 그저 선 채로 얘기하지 않게끔 하는, 그런 어떤 형식적인 변화가 생겼죠. 단순히 카메라나 연출 블로킹 라인의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아수라>를 하면서 어떤 내적 변화를 느끼고 <서울의 봄>까지 하면서는, 너무 거창한 거 같아서 내 입으로 얘기하기가 좀 그렇지만(웃음) 내가 이제 배우들로부터 뭔가를 추출해내는 과정에 있어서 관점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서울의 봄>까지 이어진 거죠. <서울의 봄>은 등장인물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런 <아수라>의 경험이 없었다면 만들기 힘들었겠죠.

 

〈서울의 봄〉  촬영현장
〈서울의 봄〉  촬영현장

<아수라>와 <서울의 봄>은 소재와 장르 모두 굉장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의미심장하게 연결된 영화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홍콩영화까지 포함해서, 전쟁영화나 할리우드나 유럽의 누아르 영화 등 이른바 남자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물들의 힘겨루기와 권력관계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 힘겨루기의 욕망 속에서 어떤 충돌이 생겨나고, 필연적으로 무리를 짓고 서열을 만들려고 하는 모습이 크고 작은 조직부터 전체 사회의 작동 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김성수 너는 왜 그렇게 남자 영화 혹은 마초 영화를 좋아하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거기 있어요.(웃음) 그런 관점에서 <아수라>는 내가 흔쾌히 선택했던 영화였고, 그 <아수라>를 좋게 본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김원국 대표가 <서울의 봄>을 내게 맡긴 이유라고 생각해요. <서울의 봄>을 두고 내가 실화나 역사적 소재를 처음 다룬다는 것에 대해 의아한 시선들이 많았는데, 사실 저는 원래부터 관심 있던 분야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장르적인 구분을 초월하는 관심사라는 게 있는 거죠.

<아수라>가 실질적인 터닝 포인트였다는 말씀에 대해 더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영화인 <서울의 봄>은 출발부터 이전과는 달랐을 것 같은데요.

<아수라>는 개인적인 만족도가 굉장히 컸어요. 그래서 그런 식의 이야기나 연출 방식으로 계속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라는 게 <아수라>가 제게 가르쳐 준 거였어요. 그런데 흥행 결과가 좀 안 좋았잖아요.(웃음) 대놓고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그래도 앞으로 난 내 얘기를 하겠다고 생각했고 <서울의 봄>을 만나게 된 거죠. 그처럼 <아수라>를 통해 저 나름대로는 여러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새로이 익혔는데, <서울의 봄>은 아무래도 실화다 보니 <아수라>와 달리 관객의 호응도 중요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라는 마음가짐에도 어떤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까, 불호의 소재를 어떻게 결말지어야 할까, 라는 거였어요. 이제 와 고백하자면, 오래도록 깊이 고민했던 것에 비하면 솔직히 해답을 찾지 못했어요. 정답을 정해두지 않은 채로, 이렇게 가면 좀 더 재밌게 보지 않을까, 저렇게 가면 좀 몰입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달려가다가 어떤 측면에서는 시간에 쫓겨 개봉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우리가 바랐던 결과, 즉 흥행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지막까지 고민하며 추구했던 것이 먹혀들면서 그런 결과를 얻게 되니 정말 행복했어요. 특히 젊은 관객의 호응이나 피드백이 눈물겹도록 좋았어요. 스토리텔러로서 그런 최고의 행복감을 언제 또 누려볼까 싶은 거죠. 바꿔 말하면, 우리가 찾지 못한 해답을 관객분들이 찾아주신 거죠. 어쨌든 요즘은, 이런 최고의 행복은 연달아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스스로 마음먹고 있습니다.(웃음)

 

〈서울의 봄〉  촬영현장
〈서울의 봄〉  촬영현장

마지막으로, 곧 준비에 들어갈 차기작도 <아수라>와 <서울의 봄>의 연장선에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서울의 봄> 같은 일이 내 인생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웃음) 라는 생각으로 그저 열심히 준비하자는 생각만 하고 있죠. <아수라>와 <서울의 봄>처럼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좀 더 정교하고 힘 있고 완성도 있게 펼쳐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연출자로서 내 보여줌의 핍진성 같은 것들을 획득하는 그런 영화 작업을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10년 동안 함께 해온 팀이 있고, 그들과 큰 변화가 없는 한 90% 이상 계속 함께 하고 싶고요. 그래서 다음 작품도 아마 연출 스타일과 작법에 있어서 그 연장선의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다루는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