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면을 향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선과 그것을 비켜가는 백인의 시선이 함께 담긴 <조용한 이주>의 스틸컷을 보며 누군가는 디아스포라의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재현하는 작업(<미나리>(2021))을 기대할지 모르겠다. 혹은 앳돼 보이는 청년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리턴 투 서울>(2023)이나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와 같은 플롯을 예상할지도. 그러나 <조용한 이주>에는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장의 절박함도, 뿌리 뽑힌 '족보'를 찾기 위해 서울과 강원도를 탐험하는 젊은이 특유의 진취성도 없다. 칼(코르넬리우스 원 리델클라우센)은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됐다. 크게 부유하진 않지만 애정을 주는 부모와 농장을 일구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중이다. 영화는 칼의 과거를 재구성하지 않으며, 그가 입양아라는 사실 외에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말 수가 적은 칼은 자신에 대해서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 소들이 풀을 뜯고, 밀밭이 넘실대는 북유럽의 목가적 농촌 풍경을 훑던 카메라는 이내 초현실적 이미지 하나를 포착한다. 자그마한 운석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그러고는 곧 입양아 칼은 좁고 깊은 구덩이를 내려가 이 운석을 줍는다. 칼은 우주에서 추락한 운석에서 낯선 나라로 보내진 입양아를 본다. 어디로 보내지는지 알지 못한 채 덴마크로 입양된 자신처럼, 어느 날 낯선 땅에 떨어진 운석을 그는 침대 밑에 고이 간직한다.

칼은 강제된 자신의 운명에 차마 저항하지 못한다. 아버지 한스(비아르네 헨릭스)는 칼이 언젠가 가족의 농장을 물려받아 가업을 잇기 바란다. 2세를 갖는데 어려움을 겪던 한스와 카렌(보딜 예르겐센) 부부가 한국 아이를 입양한 데에는 나름의 '실용적' 의도도 있었으리라. 가업을 물려주고 자신들의 노후를 책임질 후계자 물색이라는 목적 말이다. 칼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역할과 책임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충실하게 농업을 전공했고, 군말 없이 송아지를 받아냈다. '풀숏'에 포착된 농기구, 집, 농장과 같은 양부모의 유산은 '롱숏'에 담겨 작고 흐릿하게 존재하는 칼을 압도한다. 존재가 역할의 그늘에서 모호해질 무렵, 칼은 조금씩 다른 욕망을 품기 시작한다. 자신의 ‘집’과 더불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국이라는 두 세계 모두에 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칼은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준 여행상품권으로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고 의사를 전한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빠르게 다가온다.

공기처럼 퍼진 인종차별과 노골적인 모욕 또한 칼의 고향 회귀 욕구를 키운다. 코펜하겐 같은 대도시였다면 인파 속에 옅어졌을 그의 존재감은 덴마크의 전형적인 밀밭, 파란 하늘, 농장에 스며들자 별수 없이 도드라진다. 친척의 생일파티에서 성별에 따라 테이블을 나눠 앉은 친지들은 호쾌함의 외피를 두르고 인종차별적 언사를 이어간다. 여자들은 칼의 짝으로 또 다른 동양계 입양인 마리(클라라 티 탄 하일만 옌센)에 대해 평가하고, 남자들은 EU 지원금에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동유럽계 노동자 고용에 대한 악의적인 편견을 실어 나른다. 성별화된 담화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구조를 반영한다. 극우화된 이곳에서 인종차별이 극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칼은 발견하지 못한다. 권위적인 백인들의 검열 앞, 끊임없이 제 존재를 은닉하며 납작하고 투명해지는 칼이 비로소 자유로울 때는 자신을 학대할 때뿐이다. 영화 속 칼은 한 번도 자신의 침대에서 안락한 잠을 청하지 못한다. 그는 건초더미 속으로, 송아지의 옆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미끄러져 처박힌 논두렁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운다.


현실에 좌절한 칼을 위로해 주는 건 그가 빚어낸 환영들이다. 때론 현실 인물을 초대하고, 때론 미지의 인물을 창조하는 그의 상상은 자기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 칼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상상 속 또래 동양인 소녀는 칼이 상처를 받거나 혼란에 빠질 때 유령처럼 그의 곁에 머물다 위로를 주고 떠난다. 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식당' 테이블에 모여 앉은 세 식구 옆 둥실 떠오르는 환영은 칼의 상상 친모다. 덴마크인이 규정하려는 추상적인 동양인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한국계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는 상상 속으로 퇴각해 은밀히 저항한다.
세계의 작은 붕괴가 묘사되는 순간, 칼은 자신의 고향으로 '조용한 이주'를 결심한다. 영화 후반 부, 한국 로케이션으로 재현된 칼의 상상 속 한국은 음식을 권하는 시장 상인의 친절함으로, 수다를 떠는 할머니들의 평화로운 풍경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그는 떠나는 버스에 탑승하지 못하고 친모로 추정되는 여인을 목격하고도 말을 붙이지 못한다. 그 어느 곳에도 섞이지 못하고 좌절하는 칼의 모습은 '조용한 이주'가 품은 딜레마다. 칼은 그토록 염원하던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이제 물리적 이동은 더 이상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어진 운명에 조금씩 균열을 내며 자신을 회복하기로 결정한 칼이 드디어 말을 시작한다.

<조용한 이주>의 감독 말레나 최는 태어나자마자 덴마크로 입양돼 성장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한국 출신 두 덴마크 입양인이 서울을 방문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회귀>(2018)에 이어 한국인 입양아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영화다. 칼이 시련에 봉착할 때마다 내면에 쌓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달리기를 하는 광경에 육체적 활동으로 어린 시절 내적 갈등을 극복하려 했다는 말레나 최 감독의 인터뷰가 겹친다. '칼' 역을 맡은 코르넬리우스 원 리델클라우센 또한 실제 입양인이다. 감독이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거리에서 길거리 캐스팅으로 발견한 비전문 연기자다. 전문 연기자라면 과잉했을 갈등의 정서를 그만의 템포와 언어로 담백하게 표현해냈다. 영화에 녹아든 입양 당사자의 생생한 체험은 인간 누구나 필연적으로 경계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다가올 경계인들을 생각게 한다.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