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페이스북과 링크드 인의 검색창을 켜본다. 한국어로도, 대충 조합한 영문 이니셜로도 찾아지지 않는 이름. 다행이다. 너는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다. 노트북 건너편 내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모르고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거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도 만약 <패스트 라이브즈>를 본다면 그리운 이름을 쳐내려 가는 나를 이해하겠지. 박진영의 '니가 사는 집'의 가사를 곱씹으며 수많은 '만약'의 순간을 상상한 건 비밀이지만.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인연'
<패스트 라이브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수필은 작가가 하숙하던 집의 딸 아사코와의 20년이 넘는 기간 중 세 번의 만남과 스침을 그린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돌고 도는 한 남녀를 비추며 그리움과 후회와 회한의 인연을 말한다. 수필은 제목에 노골적으로, 영화는 반복되는 설명으로 '인연'을 이야기의 한가운데 둔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결혼은 전생에 8000겁 (만난) 인연의 결과다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는 한국말 '인연'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결혼은 전생에 8000겁 (만난) 인연의 결과다"라는 대사로 설명한다. '겁'은 '천년에 한 번 천상의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노니는데 그 옷자락이 바위에 닿아 큰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기간'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8000 겁'의 의미가 새삼 무겁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일순 깊어지고 애틋해진다. 억겁의 유니버스를 뚫고 이뤄진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노라(그레타 리)와 해성(유태오)의 20년이 넘는 인연을 두 시간 남짓으로 압축한 영화는 마지막 재회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 온라인으로 인연의 끈을 이어갔던 대학 시절, 그리고 30대가 되어 드디어 대면하기까지. 이민도 막지 못한 질긴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둘. 둘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얼마나 깊고 진했을까.
24년 전, 유년 시절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열두 살 나영(문승아)과 해성(임승민)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나 애랑 결혼할 거야'라며 해성과 붙어 다니던 나영은 부모의 결정으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가게 된다. 영화감독과 미술가의 경력을 포기하고 이민을 가는 이유를 묻는 이웃에게 나영의 엄마(윤지혜)는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며 말을 아낄 뿐이다. 이 침묵은 젊고 자유로운 부부가 생활고가 아닌 다른 문제로 한국 사회와 결별할 참임을 암시한다. 이민은 신속하게 이뤄졌고, 캐나다로 전환된 화면은 이방인으로 조용한 학교생활을 보내는 소녀 나영의 모습을 비추며 고독한 정서를 뿜어낸다. 왜 이민을 가냐는 친구의 물음에 “한국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못 타”라고 당차게 받아치던 나영. 정말 타인의 언어로 글을 쓰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로부터 12년, 공대생과 극작가로 재회

이민을 오며 나영은 '노라'라는 이름을 얻는다. 한국에 두고 온 '나영'이라는 이름보다 '노라'로 불리는 게 익숙해질 즈음 그는 극작가를 꿈꾸며 두 번째 이주를 감행한다. 이번엔 뉴욕이다.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12년. 우연히 어린 시절 자신을 많이 좋아했던 해성을 떠올린 노라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를 찾아낸다. 놀랍게도 해성 역시 그간 자신을 찾고 있었다. 젊은이의 사랑은 과거를 윤색하고 시차를 극복한다. 둘은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로 열심히 연결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둘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해성은 중국 유학을 앞두고 있고, 노라는 뉴욕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다. 둘은 잠시 냉정해지기로 한다. 인연이 끊어진 자리, 노라와 해성은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각자의 삶을 꾸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또 한 번의 12년이 필요했다.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을 찾은 해성은 마침내 나영을 대면한다. 수많은 '만약'의 순간이 스치며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감정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위험한 순간. 노라의 남편 아서(존 마가로)의 존재를 잊지 말자. 아서는 아내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그들의 특별한 '인연'과 자신과 노라의 평범한 만남을 비교하며 착잡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운명을 가로막는 사악한 백인 미국인 남편”이라고 자학하기도 하지만, 품위 있고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또 다른 좋은 인연으로 자리한다.

어긋난 필연을 의지로 되돌려 보려는 시도는 비극이나 열정으로 가득 찬 감정의 드라마로 나아가지 않는다. 노라와 해성은 24년 만에 가까스로 다시 만나지만 노라의 미국인 남편 아서를 옆에 두고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둘은 그렇게 다음(생)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앞으로 둘이 다시 만나 드라마를 이루는 날은 없을 것이다. 24년 전, 노라의 가족이 이민을 결심했던 그 순간이 이미 '전생' 만큼이나 아득해진 지금, 오늘의 뉴욕은 또 다른 전생이 되어 둘의 기억 속에 각인될 뿐이다.
피천득의 수필 속 주인공은 아사코와 만남을 두고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회한에 잠긴다. 오늘의 만남을 노라와 해성은 어떻게 기억할까. "역시, 오길 잘했어"라며 담백하고 홀가분하게 또 다른 윤회를 거듭하지 않을까. 짧게 스친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현재의 인연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기에.
셀린 송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나온 장면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셀린 송은 영화 <넘버 3>, <세기말>을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로, 작품 속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예를 들어, 나영의 아버지 직업은 영화감독으로 나오고 해성이 나영을 찾는 과정 또한 아버지의 영화 페이스북 페이지에 나영을 찾는 글을 올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뉴욕으로 건너간 나영의 설정은 송 감독의 실제 성장 경험과 동일하다. 또한 노라가 된 나영은 글을 쓰는 일에 흥미를 가지며 커리어를 키워가는데, 이 또한 영화계에 몸담기 전 극작가로 일했던 셀린 송의 실제 인생과 닮아있다. 이민 1.5세대 감독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한국인이라서 빠져들다가, 한국인이기에 어색한 순간들이 교차한다. 올해 가장 근사한 오프닝 시퀀스로 그 어색함들은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