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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구〉〈중경삼림〉〈첨밀밀〉… 홍콩으로 떠나기 전 당신이 꼭 봐야 할 영화 (1)

주성철편집장
〈연지구〉
〈연지구〉

<연지구>(1987), 이제는 볼 수 없는 장국영과 매염방을 그리며

 

지겹도록 홍콩을 다니면서 새롭게 발견한 지역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단연 홍콩섬 셩완에서도 서쪽으로 더 뻗어나간 지역인 사이잉푼과 케네디타운이다. 10년 전만 해도 홍콩 지하철 MTR이 닿지 않아 여행객이 쉬이 찾지 않던 곳이었다. 무엇보다 사이잉푼에는 센트럴의 그 유명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와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야외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그래서 이곳을 ‘작은 소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번잡한 센트럴보다는 ‘로컬’ 냄새가 진하고 둘러보기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산의 맨 아래 도로에서부터 First(第一街), Second(第二街), Third(第三街) Street 로 차례대로 이름을 붙인 것도 재미있다. 그래서 길 찾기가 쉽고, 특히 왕가위 감독도 종종 들른다고 하는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는 다국적 브런치의 천국이다.

케네디타운과 미드 레벨과 쌍둥이격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사이잉푼(오른쪽)​
케네디타운과 미드 레벨과 쌍둥이격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사이잉푼(오른쪽)​

장국영과 매염방이 출연한 관금붕 감독 <연지구>(1987)의 주무대인 섹통추이(Shek Tong Tsui, 石塘咀)가 바로 이곳에 있다. 이제 MTR 홍콩대학역 B2출구로 나오면 <연지구>에 등장한 고가도로가 바로 보인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연지구>에서 기생이었던 여화(매염방)가 부잣집 청년 진방(장국영)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빠지지만, 집안의 반대를 이기지 못해 결국 동반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내세에서 만나기로 약조했던 진방이 오지 않자, 귀신 여화는 기다리다 못해 1980년대 홍콩에 나타난다. 그리고 신문사를 찾아가 사람을 찾는다는 조그만 광고를 낸다. 결국 진방이 그때 함께 죽지 않았고 여전히 70대 노인으로 영화 촬영 현장의 엑스트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경극 배우를 꿈꾸던 부잣집 도련님이 가세가 기울면서 이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여화는 오래전 진방이 자신과 함께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한없이 풀이 죽은 채로 섹통추이의 이곳저곳을 다닌다. 함께 경극을 보러 가던 극장은 24시간 편의점으로 바뀌고, 기방은 식당으로, 기방이 있던 자리 위로는 한없이 올려다봐야 하는 고가도로가 난 모습을 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일상처럼 오고 가던 곳들은 모두 바뀌었다. 어쩌면 다시는 진방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픔이 눈가에 맴돈다. 같은 해 만들어진 <천녀유혼>(1987)에서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귀신의 판타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여화는 지금껏 본 영화 속 귀신들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소심하다. 사람을 찾기 위해 신문사를 찾아가 광고를 내는 귀신이 어디 있을까. 더구나 이제는 세상을 떠난 장국영과 매염방을 생각하면 더 애틋하다. 

섹통추이 고가도로
섹통추이 고가도로

 

〈천장지구〉
〈천장지구〉

 

<천장지구>(1990), 유덕화와 오천련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성당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연지구>가 ‘홍콩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면, <천장지구>도 비슷하다.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은 아화(유덕화)는 범죄 세계에 빠져 오토바이를 즐기며 산다. 보석상을 터는 일을 도와주다 경찰에게 잡힐 위기에 몰린 아화는 길을 가던 여인 죠죠(오천련)를 인질로 잡아 달아나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죠죠는 해외 유학을 가게 되고, 아화는 아화대로 조직 내에서 버티기 버거운 상황이다.

장국영의 단골집이었던 이자카야 모정(왼쪽)과 성 마가렛 성당
장국영의 단골집이었던 이자카야 모정(왼쪽)과 성 마가렛 성당

코즈웨이베이 해피밸리 지역에는 아기자기한 식당과 가게들이 많아 은근히 찾는 사람들이 찾다. 특히 장국영의 팬이라면 이제는 없어진 딤섬 레스토랑 ‘예만방’과 지금도 있는 이자카야 ‘모정’은 반드시 찾는 곳이었다. 그 해피밸리에 가려면 큰 경마장을 감싸고 도는 웡나이청 로드(Wong Nai Chung Road)를 지나야 하는데, 그 길이 브로드우드 로드(Broadwood Road)와 만나는 지점에, <천장지구>에서 웨딩 의상을 마련한 유덕화와 오천련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던 성 마거릿 성당(St. Margaret’s Church)이 보인다. 웨딩숍의 유리를 박살 내고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훔쳐 입고는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리려는 유덕화와 오천련이 마주 보며 여기 서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복수를 위해 다시 떠나야 하는 불안한 표정의 유덕화와 새로이 사랑이 시작될 거란 기대에 설레는 오천련의 서로 다른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실제 장소와 영화 속 장면
실제 장소와 영화 속 장면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얘기하는 데 있어 <천장지구> OST를 가득 채웠던 ‘레전드’ 4인조 홍콩 록밴드 비욘드(Beyond) 얘기도 빠질 수 없다. 기타와 보컬의 황가구를 비롯해 일렉 기타와 보컬의 황관중, 베이스의 황가강, 드럼의 엽세영으로 이뤄진 비욘드는 광둥어로도 멋진 록 음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초반부에 오천련을 떠나보낸 유덕화가 어머니를 그리며 옥상에서 술을 마실 때 들려왔던 광둥어 버전의 ‘회색궤적’(보통화 버전은 ‘칠흑적공간’)은 황가구 특유의 절절한 음색과 함께 초반의 정서를 꽉 잡아준다. 바로 이 성당으로 오기 전에 유학을 떠나려고 공항으로 향하던 오천련을 데려가기 위해 유덕화가 오토바이를 타고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났을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어요. 아름다운 이별이라 할 수 없겠죠. 사랑이란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광둥어 버전의 ‘미증후회’(보통화 버전은 ‘단잠적온유’)가 흐르던 장면은 내가 사랑하는 홍콩영화 최고의 순간 중 하나다. 물론 유덕화가 친구의 복수를 위해 오천련만 성당에 홀로 남겨두고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애타게 유덕화를 찾아 헤매던 때 흘러나오던 원봉영의 ‘천약유정’도 빼놓을 수 없다.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지도 못했는데 삶은 순식간에 뒤엉켜버렸고, 떠나버린 당신을 찾아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네”라고 시작하는 <천약유정>은 ‘하늘에도 정이라는 것이 있다면’이라는 뜻으로, 사실 이 영화의 원제목이기도 하다. 당시 홍콩영화 OST 중에서 가장 슬픈 노래라고나 할까.  

〈천장지구〉
〈천장지구〉

 

〈아비정전〉
〈아비정전〉

<아비정전> 장만옥과 유덕화가 만나고 헤어지던 캐슬 로드

 

홍콩은 침사추이와 몽콕으로 대표되는 윗동네 구룡반도와 센트럴과 코즈웨이베이가 있는 아랫동네 홍콩섬으로 크게 나뉜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트램이 달리는 홍콩섬을 더 좋아한다. 특히 센트럴에서 셩완까지 이어지는 지역은 최근 ‘올드타운 센트럴’이라는 이름으로 환상적인 도보 여행지가 됐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은 물론 다채로운 그래피티까지 골목 하나하나 사연이 숨겨져 있는 듯하여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시간이 부족하다. 홍콩 다녀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찍어서 올리는 대부분의 사진들의 출처는 바로 홍콩섬이다. 십자가 모양으로 교차하는 할리우드 로드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중심으로 란콰이퐁과 타이퀀이 있는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의 동쪽이 오래전부터 익숙한 ‘소호’(SOHO, South Of Hollywood Road)다. 그 소호와 구분하기 위하여 다소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서쪽을 ‘노호’(NOHO, North OF Hollywood Road)라 불렀다. 그리고 현재 가장 힙한 곳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래된 철물점과 고급 레스토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포호POHO’다. 인근의 포힝퐁 스트리트(Po Hing Fong Street), 포에 스트리트(Po Yee Street) 등의 앞글자를 따 포호라 부른다. 물론 이 세 구역이 자로 잰 것처럼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센트럴과 셩완 사이에 넓게 겹쳐져 있다.

올드타운 센트럴의 이곳 저곳
올드타운 센트럴의 이곳 저곳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대저택은 무어 테라스(Seymour Terrace)에 있는 집들 중 하나였다. 당시 이곳이 철거 직전이라는 얘기를 들은 왕가위 감독은, 뭔가 식민지 시대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그곳에서 홍콩의 1960년대를 재현하고자 했다. 현재는 ‘Seymour Terrace’라 쓰여진 표지석만 남아 있고 영화 속 대저택은 마트로 바뀌었다. 이제는 영화 촬영 당시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어 아쉽지만, 2층 테라스에서 음악에 맞춰 맘보춤을 추던 장국영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만히 건물들을 둘러봤다. 그 장면에서 장국영에게 완전히 매혹된 왕가위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 거울을 바라보던 그가 맘보춤을 추면서 서서히 이동하고 카메라는 가만히 그를 쫓는다. 마치 왕가위가 촬영 감독에게 몰래 부탁한 것처럼, 즉 온전히 훔쳐보는 시선으로 촬영된 그 장면은 그저 숨죽이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죽을 때 딱 한 번 세상에 내려오는 ‘발 없는 새’에 대한 얘기가 끝난 뒤 맘보춤을 추는 그 장면은, 영화에서 예민하고 섬세한 나르시시스트 장국영을 표현하는 데 있어 더없이 어울린다.

시무어 테라스와 요크(장국영)
시무어 테라스와 요크(장국영)

캐슬 로드(Castle Road)는 요크(장국영)에게 버림받은 수리첸(장만옥)이 늘 기다리던 곳이자, 경찰(유덕화)이 늘 순찰을 돌던 곳이다. 수리첸과 경찰은 이곳 공중전화박스에서 만났다. 영화 촬영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 이제 그 전화박스는 없지만, 그 옆 터널은 실제로 와보면 엄청나게 크다. 마치 빨려 들어가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운명의 문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곳 돌벽에 기댄 수리첸은 아비와 경찰 사이에서의 ‘환승’에 대해 한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캐슬 로드를 찾는 길은 무척 복잡하지만, 기억하기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센트럴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 마지막 지점인 콘딧 로드(Conduit Road)까지 그냥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 중간에 왼편으로 이슬람 사원인 자미아 모스크(Jamia Mosque)에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어서 잠깐 머무르는 것도 좋다. 아무튼 그렇게 에스컬레이터 끝까지 올라간 다음, 콘딧 로드에 당도하면 에스컬레이터를 등지고 오른쪽으로 거대한 반얀트리 나무가 나올 때까지 걸어서 바로 그 촬영지와 만난다.  

캐슬 로드 입구
캐슬 로드 입구

장국영의 집에 짐을 가지러 갔던 장만옥이 결국 장국영을 만나지 못하고 우연히 경찰 유덕화를 만나던 그 길이 바로 캐슬 로드다. 한없이 비가 쏟아지던 날, 이 길에서 이별을 겪은 장만옥이 멍하게 서 있었고 순찰을 돌던 유덕화가 말을 건네면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됐다. 마치 흐르고 흘러 미지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것처럼 보이는 그 길은 <화양연화>에서 오랜 비밀을 봉하던 앙코르와트의 건물 벽돌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캐슬 로드의 유덕화
캐슬 로드의 유덕화

<열혈남아>에서 그 둘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바로 그 ‘전화 부스’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만 <열혈남아>를 인상 깊게 봤던 터라 괜히 그 정서가 <아비정전>에까지 이어졌다고나 할까. <아비정전>의 그들은 이제 전화 부스 앞에서 이별을 경험한다. 유덕화는 매일 밤 전화 부스 앞을 서성이지만 끝내 장만옥은 나타나지 않는다. 유덕화는 “그녀는 그저 말 상대가 필요했던 것일까” 하고 읊조리고는 그곳을 떠나 선원이 된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장국영을 만나게 된다. 장만옥에게 버림받은 유덕화, 장국영에게 버림받은 장만옥, 친엄마에게 버림받은 장국영, 그렇게 그들은 캐슬 로드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캐슬 로드의 장만옥
캐슬 로드의 장만옥

<아비정전>에 앞서 만든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1988)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당시 국내에는 광동어가 아닌 보통화로 녹음된 대만 개봉 버전이 수입됐었다. 지금 OTT버전으로 볼 수 있는 홍콩 광동어 개봉 버전과 달리, 당시 국내 개봉했던 버전에서는 유덕화가 죽지 않고 교도소에서 거의 식물이 된 채로 수감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마지막 장면은 장만옥이 교도소로 면회를 간 장면이다. 하지만 유덕화는 장만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건넨 오렌지를 채 먹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트린다. 그걸 보고 장만옥은 엉엉 운다. 그런데 <아비정전> 캐슬 로드에서의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유덕화가 오렌지를 먹고 있다. 왕가위는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의 데뷔작이자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열혈남아>와 두 번째 영화이자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아비정전>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홍콩이라는 지역의 역사성이 만들진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쨌건 이후 왕가위와 장만옥의 인연은 계속된 반면, 유덕화와는 아쉽게도 <아비정전>이 끝이었다.  

〈아비정전〉전화박스가 있떤 캐슬 로드 터널
〈아비정전〉전화박스가 있떤 캐슬 로드 터널

 

〈중경삼림〉
〈중경삼림〉

<중경삼림> 양조위와 왕페이는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난다

 

<중경삼림>의 모든 주인공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경찰 223(금성무)은 허탈한 마음에 자정이 지나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막 뛰어오른다. 매일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며 술에 의지하는 금발머리 마약밀매상(임청하),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며 매일 똑같은 곳을 순찰하는 경찰 663(양조위), 경찰 663의 단골 식당에서 일하며 그의 맨션 열쇠를 손에 쥔 페이(왕정문) 모두 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치는 인연을 반복한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왼쪽)와 영화 속 왕페이가 일하던, 이제는 편의점으로 바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왼쪽)와 영화 속 왕페이가 일하던, 이제는 편의점으로 바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장장 8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인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이 촬영되던 당시 막 운행을 시작했었다. 그 속도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마치 눈앞으로 영화 슬라이드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누구나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던 왕정문처럼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는 창문과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앞뒤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곁을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그렇게 뒤섞여 일렬로 한 방향만을 바라본다.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한참 세월이 흘러 <2046>에 출연한 양조위는 말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중경삼림〉
〈중경삼림〉

<중경삼림>에 나온 양조위의 집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다 린드허스트 테라스(Lyndhurst Terrace)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카페 시암(Cafe Siam)의 뒤편 붉은색 간판 코크레인(COCHRANES) 바의 2층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건 5년 전까지의 이야기다. 영화 속 양조위의 집은 이제 헐려서 거기에는 포코 빌딩(Foco Building)이라는 고층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영화에서처럼 왕페이가 양조위의 집을 엿보기 위해 고개를 숙여 올려봤다가는 이제 목 디스크에 걸릴지도 모른다.  

영화 속 양조위의 집은 헐리고 고층 상가가 들어섰다
영화 속 양조위의 집은 헐리고 고층 상가가 들어섰다

 

〈첨밀밀〉
〈첨밀밀〉

<첨밀밀> 여명과 장만옥이 등려군을 맞닥뜨린 캔톤 로드

 

<첨밀밀>에서 부푼 꿈을 안고 홍콩으로 온 여명과 장만옥이 처음 일하던 곳이 바로 침사추이다. 홍콩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보니 일자리도 많았을 것이다. <첨밀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은 두 사람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던 장면과, 여명이 노래 ‘첨밀밀’을 부른 가수이기도 한 등려군을 페닌슐라 호텔 후문 쪽에서 발견하고는 장만옥을 위해 사인을 받아오는 장면이다. 등려군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직전인 1995년 불과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진가신 감독은 아마도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우정출연을 부탁했으리라. 하지만 영화에서는 안타깝게도 ‘저기 등려군이 있어!’라는 설정뿐이다. 그리고 자전거가 지나가던 길은 홍콩 최대의 명품거리라 할 수 있는 캔톤 로드(Canton Road)와 페킹 로드(Peking Road)의 교차점 즈음이었으며, 위엄 넘치는 페닌슐라 호텔은 1928년 문을 연 홍콩 최고(最古)의 호텔이다.

페닌슐라 호텔
페닌슐라 호텔
영화 속 캔톤 로드
영화 속 캔톤 로드

게다가 왕가위의 팬이라면 침사추이에서 <타락천사>(1995)의 맥도널드에 꼭 들러야 한다. 페킹 로드를 걷다가 맞은편의 거대한 중경빌딩과 만나기 전 한코우 로드(Hankow Road)가 나오는데, 바로 그 교차점에 있는 지하 맥도널드가 바로 <타락천사>에서 여명과 막문위가 처음 만나던 맥도널드다.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킬러 여명은 파트너 이가흔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다. 그런 그 앞에 어딘가 결핍으로 가득 차 통제가 힘들어 보이는 막문위가 나타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로 완전히 모르는 상태였던,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더 깊이 통한다. “때로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하다”는 왕가위는 <타락천사>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처럼 묘하게 왜곡된 심리는 전작 <중경삼림>과 달리 극도의 광각렌즈를 통해 드러난다. 그 때문인지 내부가 무척 넓어 보였는데 실제는 그리 크지 않다.  

〈타락천사〉에 나온 실제 맥도날드(왼쪽)와 영화 속 여명과 막문위
〈타락천사〉에 나온 실제 맥도날드(왼쪽)와 영화 속 여명과 막문위

여기까지 왔다면 바로 옆 애슐리 로드(Ashley Road)의 명소, 거의 5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네드 켈리의 라스트 스탠드’(NED KELLY'S LAST STAND) 바를 꼭 들르길 권한다. 네드 켈리는 19세기 후반 호주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은행강도로, 가난한 자는 절대 털지 않으면서 의적으로 불리며 지역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던 ‘호주의 홍길동’쯤 되는 실존 인물이다. 부패한 권력과 맞서 싸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히스 레저가 네드 켈리를 연기한 영화 <네드 켈리>(2003)가 있고, <1917>(2019)의 달리는 병사로 유명한 조지 맥케이가 네드 켈리를 연기한 <켈리 갱>(2019)도 있다. 호주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연구하기 위해 그를 소재로 삼아 화가 시드니 놀런이 그린 '네드 켈리 연작'도 유명하다. 마치 서부극의 바를 떠올리게 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루이 암스트롱과 듀크 엘링턴의 사진이 반기는 라이브 재즈바다.

네드 켈리의 라스트 스탠드
네드 켈리의 라스트 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