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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천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균형을 이룰 뿐이다.

씨네플레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두 번, 나는 집 앞 전주천을 따라 반려견과 산책에 나선다. 복잡한 한옥마을에서 오 킬로 떨어진 남쪽 상류의 전주천은 고요하게 생동한다. 봄에는 천연기념물이라는 원앙이 짝을 이뤄 날아들고, 여름에는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참다슬기를 찾는 이들과 물놀이를 즐기는 행락객이 엉켜 제법 활기차다. 늦가을이 되면 천 둔지에 물억새가 장관을 이루는데, 천 양옆으로 병풍을 두른 치명자산과 고덕산에 핀 겨울 눈꽃과 함께 내가 꼽는 전주의 풍광이다. 한옥마을로 직진하려는 지인들의 손을 붙들어 전주천 자전거 투어를 자청하는 이유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하천변 정비 사업을 하는지 포클레인이니 하는 것들로 어지럽다. 언뜻 봐도 잡목과 잡초를 정리하는 수준의, 으레 해오던 정비 사업과 그 규모가 달랐다. 버드나무 같은 큰 나무부터 물억새숲까지 모두 베어지고 파헤쳐졌다. 3킬로 남짓의 산책길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치던 고라니를 그 뒤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일주일 사이 벌거벗겨진 사바나꼴이 된 천변을 망연자실 응시하니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라 읊조리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타쿠미의 건조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은 곧 고라니의 형상으로 바뀌더니 큰 눈을 하고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쿠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쿠미

 

바뀐 전주천을 보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근작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했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산다. 8살 딸 하나(니시카와 료)와 함께다. 그의 아내는 무슨 사정인지 사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자연에 둘러싸인 둘의 삶은 소박하다. 타쿠미는 장작을 패고, 샘물을 떠서 마을 우동집에 납품하며 생계를 꾸린다. 하나는 등하굣길인 숲속을 가로지르며 새의 깃털 따위를 주우러 쏘다닌다. 인근 숲에서 사슴 사냥꾼들의 총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긴 해도 대체로 평화로운 나날이다.

이 평화는 그러나 마을에 글램핑장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며 조금씩 어그러진다. 도쿄에서 온 다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는 공청회를 소집해 글램핑장이 마을 경제에 도움이 될 거란 청사진을 제시하지만, 실은 코로나 정부 지원금을 타기 위한 얄팍한 술수를 부리는 중이다. 주민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글램핑장 오수처리 문제, 산불 감시 시스템의 부재, 평균 가동률 등을 지적하며 거세게 반대한다.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회사는 묘수를 낸다. 마을의 '심부름꾼' 타쿠미에게 글램핑장 관리인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카하시(코사카 류지, 오른쪽)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카하시(코사카 류지, 오른쪽)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

 

언뜻 보면 개발 vs 자연, 착취하는 자 vs 착취당하는 자, 도시 vs 시골의 도식적인 사회 논평이 핵심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도덕적 판단을 미룬다. 영화에서 '빌런'의 위치에 있는 두 남녀 다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향하는 자동차 안 긴 대화 장면을 보자. 사회생활과 다사다난한 연예기획사라는 회사의 생리에 지친 마유즈미와 코로나로 우울증을 겪다 커플 매칭 앱에서 구혼 상대를 찾으려 하는 다카하시의 소시민성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원래라면 '선'의 자리에 위치해야 할 타쿠미는 무표정에 말수가 적고 때론 무례해 반감이 든다. 자족적이어서 완벽한 균형을 자아내는 신중하게 내리찍는 도끼질, 한 국자 한 국자 받아내는 물 긷기 같은 행동은 사슴 사냥꾼의 총성과 건망증이 상기하는 어딘가 위태로운 타쿠미의 모습과 충돌하며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악이다 단언하지 않는 감독의 카메라를 보고 있자니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가 생각난다. 자연은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진화할 뿐이다. 파괴되는 자연을 약자의 위치에 둘 법도 한데, 영화는 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폭력성과 파괴적 개발주의를 그저 충돌 시킬 뿐 어느 한 쪽을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이분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겪는 미묘한 행동과 감정의 변화를 좇아갈 뿐이다.

자연과 인간. 어느 쪽도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라면 우리는 글램핑장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타쿠미의 대사를 빌려본다. “문제는 밸런스다.”


문제는 밸런스다
문제는 밸런스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연을 착취하며 살 수밖에 없다. 잔가지는 쳐내야 하고, 하천은 정비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집에서 5킬로 떨어진 한옥마을 근처의 전주천의 몰골은 더 처참하다. 베어진 버드나무 수백 그루의 휑뎅그렁한 밑동을 보고 있자니 섬뜩할 정도였다. 나무와 억새숲에 숨어 이리저리 지역을 옮겨 다녔을 고라니, 한 여름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빽빽한 잡목을 집 삼아 날아들었던 새들과 반딧불이, 하천으로 내리뻗은 버드나무의 잔뿌리 속으로 찾아들던 물고기들, 물고기 아래 자리 잡았던 다양한 곤충과 수서생물. 이 모든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전주시는 '홍수 예방'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직감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하천의 생태계를 절멸시켰다. 영화 속 글램핑장 설립에 대한 주민 공청회에 참석한 한 노인의 말을 다시 곱씹는다.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줍니다. 상류에 사는 사람에겐 의무가 있습니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해 더러운 물을 전부 하류에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한번 파괴된 균형은 돌리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무책임의 대가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 삶의 자리 또한 협소하게 할 것이다. ‘상류’의 도덕적 의무가 그만큼 중요하건만, 비과학적 근거 제시와 윽박지르기만 반복되는 이곳에 서 있자니, 타쿠미도 느꼈을 두통에 어지럽기만 하다.

놀랍게도 1990년 후반까지만 해도 전주천은 콘크리트 제방과 주차장, 각종 생활하수 및 폐수 등으로 생물이 거의 살 수 없는 4~5급수의 하천이었다. 그러나 1998년 자연하천 조성 사업을 통해 도심 속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전주천은 현재 1급수의 생태하천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2024년, 천변을 굽어보던 나무 수백 그루가 베어졌다. 이 모든 부침을 겪은 전주천은 말이 없다. 하지만 얌전한 야생 사슴도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법이다. 그전에 최소한의 '밸런스'를 찾을 시간이 아직 우리에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