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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가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새로운 변곡점〈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아영기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동시대의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3월 27일 개봉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악감독이었던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퍼포먼스용 영상으로 기획되었다가 극영화로 발전한 작품이다. 다소 특별한 계기로 제작된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변곡점이 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의 환경체계가 급격하게 변하게 된 인류세의 시대에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끈질기게 질문하고 실험하는 생태주의 영화다.


그가 이 작품을 장편 영화로 발전시킨 이유 또한 이시바시의 음악에 어울리는 장소를 찾다가 발견한 곳의 자연 풍광과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겨울에 그곳을 찾았을 때, 자연 풍경이 이시바시의 음악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봄이나 여름과는 달리 자연 속 활동은 모두 다 주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틀거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의 영화를 먼저 살펴본 소감을 공유한다.
 


 

타쿠미와 하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타쿠미와 하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자연과 가까이 살고 있는 부녀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와 하나(니시카와 료)의 작은 마을에 글램핑장 건설을 위해 도쿄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글램핑장 조성 설명회를 열고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다. 한편 외지인으로 인해 마을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하나가 사라져버린다.


“체호프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체호프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물 가후쿠가 내뱉은 한마디다. 가후쿠의 대사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인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말과 같다. 그는 자기 영화에 종종 체호프를 레퍼런스로 인용해 왔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연극으로 연출하며, <아사코>에서 쿠시하시는 마야의 체호프 희곡 연기를 보고 일침을 가한다. 류스케의 체호프에 대한 존경은 영화의 한두 장면에 등장하는 단순한 언급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모든 극영화는 현대극의 창시자라 불리는 안톤 체호프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해피 아워〉 포스터
〈해피 아워〉 포스터


체호프의 희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입각한 고전적인 희곡들과 차별화된 구성을 보인다. 그의 희곡에서는 극적인 사건이 드러나지 않고, 갈등 구조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인생의 한 단면을 그려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싸우지도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으며 누구에게 정복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몰락하고 서서히 망해가며 사건도 희망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 가고 만다.’ (「러시아 문학의 넓이와 깊이」, 조주관, 세창출판사, 2023, 727쪽 참조). 그의 희곡을 닮은 류스케의 영화도 절정 이후의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모든 사건이 복무하는 전통적인 서사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 극적인 사건이 빠진 자리에는 일상적인 대화와 인물들의 심리를 유추할 수 있는 상황들로 채워진다. <해피 아워>는 무려 5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네 명의 여성들이 일탈적 선택을 하는 이유에 관한 심리적 상황을 층층이 쌓아가며 보여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이번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전작에서 보였던 서사 구조를 취하면서 희극의 특성을 더 부각한다. 체호프는 그의 4대 장막극의 장르를 코미디라고 말했다. 그의 희곡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지만 주로 비극으로 평가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의 희곡을 희비극으로 바라본 것 같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범속한 인물의 말과 행동을 희화화해 웃음을 유발하는 체호프의 희비극처럼 우둔한 특정 인물을 내세워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이 영화의 희극적 특성은 외지인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의 차 안 대화 씬에서 두드러진다. 연예 기획사의 직원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도시의 평범한 직장인들이 나눌 법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들은 회사 대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직업인의 마스크에서 벗어난 사적인 모습을 공유한다. 특히 타카하시의 수더분한 성격에서 나온 말과 행동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며 웃음을 유발한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일상적인 대화는 마을 주민과의 대립 구도에서 손쉽게 악인으로 비칠 수 있는 그들 또한 평범한 도시인이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체호프의 희극적 특성을 가져온 이 장면은 영화의 비극적 결말을 더욱 강조한다.


균형과 상생의 개념이 팽팽히 맞붙는 공론장

 

타카하시(오른쪽)과 마유즈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타카하시(오른쪽)과 마유즈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도쿄 연예 기획사 직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글램핑장 조성 주민 설명회를 연다. 설명회에서 하라사와 마을의 주민들은 글램핑장 조성 계획의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글램핑장을 조성하려는 이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대립되는 쟁점은 정화조의 위치와 사용자 수 대비 용량에 대한 부분이다. 마을 강의 상류 쪽에 정화조를 설치할 경우 오수가 경사를 따라 지하수로 흘러들어 아래 지역 주민들의 식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타카하시는 주민들의 여론이 부정적인 것을 감지하고, 마을이 경제적으로 윤택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상생발전파트너’라는 그럴듯한 말로 주민들을 꾀어내려 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글램핑장 설명회 장면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하는 공론장의 알레고리로 존재한다. 타카하시가 말한 ‘상생발전’은 인간이 자연을 단순한 생산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상생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인간의 탐욕을 감추는 말로 뒤바뀐다. 타카하시의 ‘상생’은 타쿠미의 ‘균형’에 의해 반박된다. 타쿠미는 타카하시에게 자신이 농지개척 3세대로 외부인이며 하라사와 마을도 원래 외부인에 의해 발전되고 파괴된 땅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는 이 마을이 자연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에게 자연은 다양한 생명체들과 자연물이 상호작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이며, 하라사와 마을은 그것을 중요시하는 곳이다. 그가 타카하시에게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무너진다고 경고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더 큰 문제는 정작 글램핑장 건설의 최종 결정이 도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글램핑장 조성의 최종 결정권자와 기획자는 마을에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연예 기획사의 대표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보조금을 타 내기 위해 글램핑장을 건설하려 한다. 직원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대표의 결정을 순순히 따른다. 설명회 자리에서 마을의 회장은 상류에 사는 이들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 그는 오수가 발생했을 때를 언급하며 “상류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류에 반드시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상류에 사는 이들이 져야 할 책임은 정치, 경제적 책임을 가진 이들이 무겁게 통감해야 할 책임을 의미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안전 문제를 간과한 기획사 대표의 무책임한 모습으로 재난이 일어났을 때에 책임을 저버린 수많은 지도자를 떠올리게 한다. 또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의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권위에 대항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순종하는 일본에 깊숙이 뿌리내린 관료제 문화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 이하 내용은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연의 마지막 경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하나가 사라지면서 영화에 불길한 기운이 스며든다. 타쿠미는 외지인 타카하시, 마유즈미와 함께 하나를 찾기 위해 숲으로 간다. 마을 사람들도 숲 곳곳을 뛰어다니며 하나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타쿠미와 타카하시는 사슴이 물을 마시는 연못에까지 이르고, 총알에 빗맞은 사슴 앞에 서있는 하나를 발견한다. 이때 돌연 타쿠미가 하나에게 다가가려는 타카하시를 제지하며 목을 조여 쓰러뜨린다. 타쿠미는 쓰러진 하나를 안아들고 안개에 휩싸인 숲속으로 들어간다.


표면상으로는 갑작스러운 결말은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 있던 자연의 존재를 드러낸다. 타쿠미가 그를 죽이려 한 이유는 자명하다. 타쿠미는 도시에서 온 외지인에게 장작을 패고, 개울에서 식수를 마련하는 법을 알려주며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자연을 휴양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도시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차 안에서 타쿠미와 그들은 야생 사슴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타쿠미는 그들에게 빗맞은 사슴이나 그 사슴의 어미와 아비가 아니면 야생 사슴이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말해준다. 그들은 타쿠미에게 그렇다면 사람의 안전이 보장되기에 글램핑장을 지어도 되지 않냐고 질문한다. 타쿠미는 그들의 물음에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라고 되묻지만, 타카하시는 그의 말에 “어디 딴 데로 가겠죠”라며 무심하게 답하며 얼버무린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두 외지인은 자연과 균형을 이루던 하라사와 마을에 혼돈을 몰고 온다. 혼돈은 숲 너머로 들려오는 두 번의 총소리를 통해서 드러난다. 두 번의 총소리는 외지인과 타쿠미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사슴에게 당겨진 총은 사실 타쿠미에게 향한 것이었다. 첫 번째 총소리는 타쿠미와 우동 가게 주인이 개울에서 물을 퍼 나를 때 들려온다. 총소리가 들려온 후 타쿠미는 건망증으로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는 우동 가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나를 데리러 간다. 두 번째 총소리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곧바로 도시에 돌아가지 않고 마을에 남기로 결정한 뒤 들려온다. 그리고 이내 타쿠미는 머리를 움켜쥐고 휘청인다. 총소리에 따른 타쿠미의 연쇄반응은 영화 속에서 그가 사슴의 메타포로 존재함을 알려준다. 사실 첫 번째 총소리가 등장하기 이전에 마을로 향하는 차 한 대를 보여주는 짧은 숏이 등장한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이 숏은 마을에 죽음을 몰고 올 외지인들의 등장을 담고 있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마을의 어긋난 균형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상호의존적인 법칙에 따라 외지인 두 명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다른 두 명은 사라져야만 한다. 타쿠미는 하나를 살리기 위해 타카하시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다만 두 외지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마유즈미는 숲속에서 작은 상처를 입는 것에 그치는 데 비해 타카하시는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다. 이같은 결말은 자연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다른 시선에서 기인한다. 최소한 마유즈미는 경외감이 깃든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멀리서 관조한다. 타카하시는 판타지에 사로 잡혀 자연을 도시의 각박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만 여길 뿐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때 짊어져야 할 의무와 책임은 외면해버린다. 결국 타카하시에게 가해진 타쿠미의 폭력은 우매한 인간에게 내리는 자연의 경고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나아가기 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타카하시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숲을 헤매는 누군가의 가쁜 숨소리와 함께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트래킹 숏이 다시 등장한다. 영화는 그 숨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쓰러진 하나와 함께 숲으로 들어간 타쿠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전 장면을 통해 그가 타쿠미 임을 유추하게 한다. 수풀이 무성하게 드리운 하늘만 비추는 카메라에 의해 타쿠미의 모습은 가려지고, 자연의 이미지에 병치된 헐떡이는 숨소리는 자연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들려준다. 그리고 이내 중단된 숨소리는 자연의 죽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