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에 크랭크인 해 이듬해 촬영을 마친 소문의 영화가 2024년 6월,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프로덕션 당시에는 상상을 통해 그려냈을 미래의 모습이 4년이 지난 지금, 얼추 현실화가 되었으니 개봉이 늦춰진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생성형 AI가 보편화되며 고인과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AI 부활 서비스’나 고인이 장례식에서 자신의 인생사를 얘기하는 ‘AI 장례식 서비스’도 출시된 지 오래다.

수년 전에 구상에 들어간 영화 <원더랜드>는 이런 서비스가 상용화될 것이라고 예측이라도 한 듯하다. 영화는 ‘원더랜드’라는 가상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담아낸다.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서비스로, 의뢰인은 고인과 자유롭게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

<원더랜드>는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소프트 SF 장르 소설과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원더랜드>와 김초엽을 비롯한 국내 신진 SF 작가들의 소설은 모두 과학적 상상력으로 미래를 그리고는 있지만,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연과 심리, 그리고 기술이 초래한 사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화 <원더랜드>에서 돋보이는 것은 혁신적인 미래를 그려낸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섬세하게 표현된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다. “지금 원더랜드에 있을 그리운 동료들을 기억합니다.” 영화 <원더랜드>의 엔딩 크레딧 말미에 등장하는 이 짧은 문구는 김태용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는 듯하다. 지난 31일 <원더랜드>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영화를 미리 관람한 소감과 기자간담회에서 김태용 감독을 비롯한 배우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에게 들은 영화 작업 경험을 전한다.
이상적이어서 이상한 ‘원더랜드’, 원더랜드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원더랜드>의 ‘원더랜드’ 서비스는 이미 세상을 떠난 고인이 이상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이리’(탕웨이)는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생전에 서비스를 의뢰하고, 자신을 발굴 현장을 누비는 고고학자로 복원해달라고 말한다. ‘정인’(수지)은 사고로 누워있는 남자친구 ‘태주’(박보검)가 우주여행을 하고 있다고 설정하며, 매일같이 우주에 있는 가상의 남자친구와 영상 통화를 한다. 한편, ‘해리’(정유미)는 ‘원더랜드’ 서비스를 운영하는 직원이자, 자신의 부모님을 ‘원더랜드’로 복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더랜드>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김태용 감독은 2016년의 어느 날, 평소처럼 영상통화를 하다가 영화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김 감독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적은 문구처럼, 김태용 감독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삶을 이어간다면?’하는 희망찬 질문으로부터 ‘원더랜드’ 서비스를 구상했다.

그러나, 영화 속 ‘원더랜드’ 서비스는 마냥 이상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태주-정인의 에피소드는 ‘원더랜드’ 서비스의 명과 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원더랜드’ 서비스 속 우주를 떠도는 태주는 마냥 밝고, 정인이만 생각하는 자상한 남자친구였던 반면,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현실의 태주는 그와는 정 반대다. 결국, AI로 복원한 인물이 현실의 인물을 절대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균열은 치명적이다.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 역시 실제로 ‘원더랜드’ 서비스를 이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갈렸다. 정유미는 “처음 <원더랜드>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는 ‘원더랜드’ 서비스로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촬영을 다 하고 나서는 고민이 생겼다”라고 답했고, 탕웨이는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하면 누군가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지만, 사실 진정으로 내가 그 사람과 교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원더랜드’에 가는 것은 괜찮을 것 같지만, 남아서 ‘원더랜드’ 서비스를 사용하지는 못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우식 역시 “‘원더랜드’ 서비스가 개선이 되면 사용하겠다”라고 답했다.

김태용 감독은 “촬영을 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같이 얘기를 해봤다. 그런데, ‘어린아이에게 핸드폰을 주는 게 옳을지, 아닐지’와 비슷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핸드폰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인공지능이 진짜와 가짜를 넘나드는 세계가 시작되었으니 옳고 그름의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김 감독은 영화 <원더랜드>를 통해 단순히 ‘원더랜드’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야 할지, 말지의 문제보다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태용 감독은 “AI 기술이 더욱 발전이 될 텐데, <원더랜드>를 통해서 내가 기술에 휘둘릴지, 아니면 기술에 잘 적응해서 건강하게 살아갈지를 고민해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AI 버전 <가족의 탄생>? 인공지능이라는 소재를 빌려 전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
아무리 베테랑 배우들이라지만, 직접 AI 연기를 한 경험 혹은 AI와 소통하는 연기를 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일 터다. 김태용 감독은 “AI는 어떻게 감정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 로봇처럼 움직일지, 보통의 사람처럼 움직일지. 10여 년 전에 어머니에게 로봇 청소기를 사 드린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로봇 청소기에게 ‘거기 들어가면 안 돼’ ‘힘들겠다’라며 말을 거는 게 인상적이었다. 어머니가 기계와 정서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인공지능이 사람에게 사람처럼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라고 연기 지도의 포인트를 밝혔다.

김태용 감독은 <가족의 탄생>(2006)을 통해 전통적인 가족 개념에 반하는 형태의 가족이 서로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원더랜드>에서는 AI와 실존 인물이 가족의 형태를 이룰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어렸을 때부터 AI 부모님과 함께 살아온 해리(정유미)의 에피소드는 AI와 인간이 자연스럽고 건강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리와 현수(최우식)가 모니터 속 AI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마치 <가족의 탄생>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배우 정유미는 “해리는 AI 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정말 평소에 부모님을 대하듯 편안하게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