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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크러쉬 뿜뿜 신입 부기장, 전생에 논란의 인물이었던 건에 대하여 〈파일럿〉

추아영기자
〈파일럿〉
〈파일럿〉 포스터

찰진 코믹 연기의 아이콘 조정석이 여장 남자로 파격 변신해 돌아왔다. 오는 7월 31일에 개봉하는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조정석)가 파격 변신을 통해 재취업에 성공하며 벌어지는 난관들을 담은 코미디 영화다. 스웨덴 영화 <콕핏>(Cockpit, 2012)을 원작으로 한 이번 영화는 성별을 감춘 파일럿이라는 기본 설정을 큰 틀로 두고 젠더 문제를 다룬다. 동시에 주인공을 인플루언서로 설정하면서 한국의 SNS 문화를 묘사한다. 올여름 극장가를 찾는 <파일럿>은 조정석이 <엑시트>(2019) 이후 5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외에도 이주명, 한선화, 신승호 배우가 함께 출연해 재미를 더했다. 이번 영화의 연출은 <가장 보통의 연애>(2019)의 김한결 감독이 맡았다.


 

한정우(왼쪽), 한정미를 맡은 조정석 - 〈파일럿〉  스틸컷
한정우(왼쪽), 한정미를 맡은 조정석 - 〈파일럿〉 스틸컷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출신에 한국 3대 항공사에서 모두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국내 최고의 파일럿 한정우(조정석). 그는 SNS에서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인기에 힘입어 유명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인플루언서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그렇게 고공비행 중이던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추락해버린다. 항공사 직원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내뱉은 문제의 발언이 유출되면서 방송을 탄 것. 순식간에 국민 비호감이 된 그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에게 이혼도 당하고 양육권마저 빼앗긴다. 매달 드는 양육비와 대출금을 갚기 위해 자존심을 구기고 부기장 직에도 지원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탈락 소식뿐이다.

낭떠러지에 내몰린 그는 술로 밤을 지새우다 그만 그의 인생을 뒤바꾸는 짓을 저지른다. 동생 한정미(한선화)의 신분으로 부기장 직에 지원한 것. 마침 여성 인력을 대폭 늘리고 있던 탓에 그는 재취업에 성공하고야 만다. 뷰티 크리에이터 동생의 능숙한 변장 기술로 정우는 우람한 체격을 가진 여성으로 거듭나고, 그의 아슬아슬한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가는 것이 목표였다”

〈파일럿〉 (왼쪽부터) 신승호, 한선화, 김한결 감독, 이주명, 조정석
〈파일럿〉 (왼쪽부터) 신승호, 한선화, 김한결 감독, 이주명, 조정석

<파일럿>에서 하이힐을 신은 채로 종종걸음을 하고, 다소곳한 포즈를 취하는 조정석의 연기는 반사적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정우는 금손 동생 정미의 완벽한 변장술로 여성으로 거듭났지만, 방심한 사이에 들킬 위험에 처하곤 한다. 그는 치마를 입고도 ‘쩍벌 다리’를 시전하는가 하면, 밤이 되어 자라난 수염이 두꺼운 화장을 뚫고 나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연기로 인해 맥없이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개그는 기세다”란 말을 모토로 삼은 듯한 <파일럿>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웃음을 적중시킨다.

조정석 〈파일럿〉
조정석 〈파일럿〉

제작진은 코믹한 설정이지만 최대한 실제처럼 구현하기 위해 디테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김정원 의상감독은 트렌디한 의상부터 대중적인 평상복에 걸친 다양한 자료조사를 통해 백여 벌에 달하는 의상을 준비했다. 그중 조정석의 체형에 가장 알맞은 의상을 정했다. 정미의 사랑스러움을 살려준 분장 역시 현실성에 초점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을 위해 수십 개의 파운데이션 테스트를 거쳤을 뿐만 아니라 조정석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메이크업 방법을 연구한 것. 이에 조정석 배우의 연기가 화룡점정을 찍으며 한정미 캐릭터가 탄생한다. 조정석은 목소리와 제스처에 신경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한정미 캐릭터의 목소리는 제 목소리 중에서도 하이 음역대를 최대한 사용하려고 했다. 몸짓이나 제스처는 여성의 의상을 입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구두를 신고 거울을 보면서 연습을 많이 했다”.

조정석 〈파일럿〉
조정석 〈파일럿〉

덧붙여 그는 뮤지컬 「헤드윅」을 통해 여장을 많이 해서 생경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다만 두 작품에서 한 분장과 연기의 차이는 있었다고 밝혔다. “「헤드윅」은 더 파격적이고 무대도 크고, 객석도 넓다 보니 분장을 더 진하게 표현을 했다. 영화 <파일럿>에서는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서 한정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이 한정우가 아닌 한정미로 보게 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는 것이 목표였다. 연기도 헤드윅이라는 역은 드랙퀸이라는 특이성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제 본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지만, 한정미 역은 제 목소리 그대로 가기보다는 하이 음역대의 목소리를 많이 사용하려고 했다”.


부캐로 가득한 한국 SNS 생태계를 그려내다

〈파일럿〉 스틸컷
〈파일럿〉 스틸컷

〈파일럿〉 스틸컷
〈파일럿〉 스틸컷

 

<파일럿>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경솔한 성적 발언을 일삼은 한정우가 여성이 되어 남성중심적인 직장 문화를 경험해 보는 미러링 서사다. 조정석 배우의 외적인 변화는 두말할 필요 없이 코믹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그는 성희롱을 한 가해자에서 동료 남성 기장에게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하는 피해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그리고 서서히 여성들의 고충을 깨닫기 시작하고 끝내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인물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한정우는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받지만, 영화의 초반에 성추문을 일으킨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란 관객에 따라 어려운 감이 있다.

 

〈파일럿〉 스틸컷
〈파일럿〉 스틸컷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기 전까지만 해도 한정우는 많은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였다. 그는 유명 방송인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자신의 페르소나 일부를 보여준다. 또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연출한다. 그가 ‘유퀴즈’에서 엄마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는 그의 위선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힘들게 가족을 건사해 온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던 한정우는 휴양지에서 자신의 방송 영상을 보며 흡족해하지만 갑작스레 걸려 온 엄마의 전화는 받지 않는다. 이 장면은 그의 매체에서 보이는 모습이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정미(한선화). 〈파일럿〉 스틸컷
한정미(한선화). 〈파일럿〉 스틸컷

 

​한정우의 가족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SNS 채널을 운영한다. 동생 한정미는 유행을 따라 ASMR로 뷰티 크리에이터 활동을, 정우의 엄마 안자(오민애)는 트로트 가수 이찬원의 팬덤 ‘찬스’로 유튜브 팬계정 ‘찬또 할매’를 운영한다. 안자 캐릭터는 중년 세대에서 유튜브를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는 최근의 시류를 반영한다. 영화는 극 중에서 사회구성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 모두 SNS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의 현실을 풍자한다. 또 각종 SNS와 유튜브 화면 비율을 활용하여 다양한 매체성을 드러낸다. 이에 더해 인터넷과 SNS에서 활발하게 공유된 밈 ‘예나 선정이 딸이에요’를 패러디하고, 개그우먼 이수지가 중년 아주머니의 전화받는 모습을 모방한 개그까지 선보인다. 현재 한국 사회의 SNS 문화를 파편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현실을 충실히 묘사하면서도 이를 명민하게 웃음 포인트로 활용한다. 하지만 이 각각의 파편들을 모두 관통하는 핵심 사유는 부재한다.

〈파일럿〉 스틸컷
〈파일럿〉 스틸컷

SNS를 비롯한 영화 외의 매체를 계속해서 환기시키는 영화의 세계에서 한정미 캐릭터는 젠더를 넘나드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부캐’로 바라볼 수도 있다. 명예가 추락해버린 ‘본캐’ 한정우를 버리고, 가면을 쓴 채 부캐 한정미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다시 그는 대중에게 진실을 숨긴 채 허상적인 이미지에 갇혀 살아간다. <파일럿>은 다양한 자아를 연출하는 현대의 프로필 사회를 세심하게 묘사하면서 진정성이 결여된 개개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