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10월 26일과 12월 12일.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짓밟힌 야만의 시대. <행복의 나라>는 그 시대적 사건을 바탕으로, 상상을 더한 ‘가정법’의 영화다. 졸속으로 재판이 자행되고, 무자비한 정권 찬탄이 일어나고, 무고한 시민을 향해 폭력이 난무하던 야만의 시대, 모두가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에 그래도 누군가는 ‘돌팔매질’을 하지 않았을까.
추창민 감독은 그 중요한 외침을 위한 ‘돌’을 배우 조정석에게 쥐여준다. 조정석은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정인후’가 되어 야만과 폭력의 정치에 맞선다. 혹한의 겨울 골프장, 독재자 전상두(유재명)을 독대하며 “지 욕심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그게 사람 새끼야?” “사람은 죽이지 마!”라고 절규하는 정인후의 외침에는, 탄압에 저항했던 민주 투사들의 언어이자, 당시의 시대정신이자, 지금도 우리가 지켜야 할 외침이다.
올해만 해도 뮤지컬 「헤드윅」으로 무대를 장악하고 영화 <파일럿>(2024)으로 300만 흥행을 견인하고 있는 조정석 배우는, 이 모든 열망과 바람과 오지 않은 희망을 끌어안은 채 시대로 걸어 들어가 맞짱을 뜨는 정인후를 연기한다. 배우 조정석이 가진 페이소스, 울분의 외침은 서슬 퍼런 독재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당당함’의 얼굴이다. 조정석이 보여주는 정인후는 관객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특유의 웃음기를 빼고도 온전히 장면을 장악할 수 있음을, 그 역량을 온전히 입증해 낸다. 배우 조정석의 한 단계 도약이자, 한국영화가 지금, 관객을 진정성 있게 설득시킬 수 있는 이토록 좋은 배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즐거움. <행복의 나라>로 그 임무를 완수한 배우 조정석을 만났다.

<행복의 나라>에 앞서 7월 31일 개봉한 <파일럿>이 3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여전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연달아 공개되는 작품인데요.
너무 놀라운 일이죠. 너무 감사한 일이고 근데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부담이 되기도 해요. 다행히 <파일럿>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아서 한시름 놓았어요. (웃음)
먼저 어떤 점에서 <행복의 나라>에 끌렸나요.
일단은 정인후라는 캐릭터는 제가 그전에 했던 역할들하고는 꽤 좀 거리가 있는 역할이었어요. 웃음기가 좀 빠진 역할이어서 저한테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역할이었고요. 제가 판타지 장르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이 10.26과 12.12 사건 사이의 재판 과정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중간 과정은 정인후라는 가공의 인물이 만들어 내는 판타지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어요. 그런 요소들이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했어요.

박태주(이선균), 전상두(유재명) 등 사건을 끌어가는 메인 캐릭터들이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면, 정인후는 그 시대의 ‘있을 법한 변호사’라는 가정으로 출발한 인물인데요. 가장 극화된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저는 정인후가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길잡이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이 정인후의 감정선을 잘 따라가 주고 그 역할에 몰입하시면 더 극적으로 보실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가 등장하는 법정신이나 취조실이나 골프장 장면, 엔딩까지 그 모든 흐름에 감정을 잘 분배하는 게 중점이 되는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북받치는 감정이 너무 여러 곳에서 튀어나와서 그것들을 얼마만큼 흐름에 맞게 분배를 하느냐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연기를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이 배우 조정석의 새로운 도전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웃음을 베이스로 한 휴먼코미디의 기조에서 벗어난 본격 드라마에서의 역할은 첫 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일단 저에게 되게 굉장히 자주 들어올 수 있는 역할의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드문 기회죠. ‘기회’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흔치 않은 제안이라, 그래서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부담은 당연히 큰데, 사실 매 작품마다 항상 부담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이겨내고 열심히 잘 해내야 된다는 것은 배우들의 어떤 숙명인 것 같고요. 제가 희한하게도 뭔가 부담이 생기는 걸 만났을 때 좀 피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그리고 정인후가 워낙 감정의 파고가 큰 역할이라서 정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제가 매력적으로 느낀 그 부분이 부담감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실패와 성공을 떠나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관객의 평가에 앞서 본인 스스로는 완성된 정인후를 스크린에서 보고 어떤 평가를 하셨나요. ‘웃음’이라는 무기를 던지고 도전한 결과물인데요.
정극과 희극이 정확히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동안 저는 무대를 통해 오랫동안 정극, 희극, 비극 등 다양한 경험을 해왔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제 많은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 쉽지 않았던 거죠. ‘조정석이란 배우는 이걸 잘하지’ 하는 부분이 어떤 건지 아니까, 또 그런 역할이 제 필모그래피 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니까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연기자로 모든 걸 다 해보고 싶고 연기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 것 같아요.
조정석이 잘 하는 것에 대한 기대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계에 조정석이라는 배우를 각인시킨 <건축학개론>(2012)의 ‘납득이’ 캐릭터의 영향도 컸을 텐데요. 대중이 당신에게 항상 기대하는 톤의 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나요.
공연 때 공연장에 관객이 꽉 찼을 때 정말 짜릿하거든요. 배우는 물론 관객이 많거나 적거나 열심히 연기하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관객을 모으는 거 아닐까요? 한마디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연기, 모습을 많은 분들이 보면 배우로서 너무 행복해요. 그런 의미에서 납득이라는 캐릭터는 조정석이라는 배우를 각인시키고 알려 준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 캐릭터는 저한테 일종의 상장 같은 느낌이에요. 벗어나고 되거나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그런 마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정인후라는 캐릭터는 가정의 상황으로 관객을 설득 시켜야 하는 어려운 미션도 주어지는데요. 골프장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시대극이라는 측면에서 판타지성이 강조된 이질적인 장면이자, 한편으로 영화가 시대에 던지는 가장 강한 메시지기도 하죠. 그 장면의 촬영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골프장 장면을 한 3박 4일 정도 찍었던 것 같아요. 추운 겨울에 촬영을 해서 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저로서는 굉장히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나고요. 물에 빠지는 장면까지 있다 보니 너무너무 추웠던 생각이 제일 먼저 나네요. 전상두의 오른팔인 진태곤 과장을 연기하는 김재철 배우에게 얻어맞는 액션 장면을 찍는데, 그 장면 촬영에 시간이 꽤 많이 걸려서 뒷부분에 제 감정이 폭발하는 그 장면은 다소 촉박하게 촬영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게 저한테는 득이 됐던 것 같아요. 더 집중하고 몰입하게 해주는 효과가 생겼던 것 같아요.
독재자 전상두를 향해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일갈하며 정인후의 감정도 폭발하는데요. 그 대사에 담긴 울분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나요.
일개 변호사가 어떻게 보면 군 통수권자가 될 것 같은 엄청난 권력, 그 당시 시대를 상징하는 그 권력에 맞서서 목소리 높여 소리 지르는 모습, 일갈하는 모습이 정말 매력 있게 다가왔어요. 연기를 하면서 대사의 톤을 어떻게 하는 것보다도 가장 중점을 뒀던 건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영화에 법정씬이 꽤 많이 나오잖아요. 법정 씬 때도 1970년대 변호사의 말투, 변호사가 쓸 법한 말보다 감정에 충실했거든요. 그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 정인후를 따라와 주시는 관객분들도 그 감정을 충분히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계속 촬영을 했어요. 골프장 장면도 마찬가지였고요. 감독님도 끝까지 중요하게 말씀하신 부분은 배우들의 감정이라고 했거든요. 그 어느 영화보다도 배우들의 진솔한 감정이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박태주를 연기한 이선균 배우와 전상두 역의 유재명 배우와 합을 맞췄는 데요. 한 쪽이 영향을 받는다면 한 쪽은 대적하는 에너지를 씁니다. 두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두 분 다 분장하고 나서 감정이 더 커졌는데, (유)재명 형 같은 경우는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슬기로운 의사생활> <질투의 화신>에서 같이 연기를 해봐서 아는데, 정말 예전의 재명 형한테서는 볼 수 없는 눈빛을 발견하고 좀 많이 무서웠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 눈 맞출 때부터 어떻게 저런 눈빛이 나오지 싶더라고요. (이)선균이 형도 이전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런 얼굴을 발견한 것 같아서, 함께 영화 하기 정말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죠. 특히 제가 상대적으로 대사가 많고 선균이 형은 대사가 적은데, 그걸 주고받을 때 대사가 없는 가운데도 리액션 하는 호흡이 정말 어려운 연기라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선균이 형이 너무 잘 해주셨어요.
연기할 때 두 캐릭터를 대할 때의 온도 차이가 큰데, 현장에서 그런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거리를 유지하진 않았나요.
그런 건 특별히 없었어요. 촬영이 들어가면 완전 몰두하고요. 촬영이 다 끝나면 너무나 끈끈한 이런 현장이었어요. 그리고 비단 저희 셋만 아니고 변호인단, 검찰단 배우들이 다 그래서, 현장이 되게 신기했어요. 이렇게 끈끈한 현장이 또 있었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어요.

매 작품 공개 전의 긴장도가 클 텐데,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이번 작품은 어떤 기분인가요.
다른 작품들 때는 언론 배급 시사회 때 전날 많이 떨렸어요. 매 작품 그랬어요.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개봉 전날에 가장 떨리더라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우리 영화를 정말정말 잘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 때문인 것 같아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