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 제77회 로카르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배우 김민희의 최우수연기상 수상 소식을 전해준 이번 로카르노영화제에는 리투아니아 출신 사울레 블리우베이트 감독의 데뷔작 <톡식>이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오스트리아의 신예 커드윈 아유브 감독의 <문>이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통상적으로 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를 포괄해 ‘세계 3대 영화제’라 칭한다면 이와 함께 산 세바스티안영화제, 토론토영화제 그리고 로카르노영화제 등을 ‘세계 6대 영화제’라 일컫는다. 1946년부터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매월 8월에 열리는 로카르노영화제는 예술성이 강조되는 아트하우스 계열의 작품, 그중에서도 작가주의적 성격이 돋보이는 작품이 강세를 보인다. 더해 장편 영화 경험이 없는 감독들의 경쟁 섹션(Pardi di domani), 최대 두 작품을 연출한 신인 감독들의 경쟁 섹션(Concorso Cineasti del presente) 등 신진 감독만을 위한 장이 마련되어 있어 의외의 작품이 주목받기도 한다.
그간 다수의 한국 작품이 로카르노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를 방문했다. 이미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K-무비가 인정받은 바 있지만 로카르노영화제는 국내에서도 아직 주목받지 못한 원석을 발견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78년의 로카르노영화제 역사 속 한국 영화의 흔적을 훑어보았다.
로카르노 역시 홍상수

홍상수를 사랑하는 곳은 베를린뿐만이 아니다. 홍상수 감독은 올해 초청된 신작 <수유천>을 포함 지금까지 총 4번 로카르노영화제에 진출했다. 그중 2013년 <우리 선희>는 감독상을,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황금표범상을 수상했다.

로카르노영화제의 최고상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홍상수 감독의 17번째 작품으로 국내에는 수상 소식과 함께 감독과 배우 간 부적절한 관계의 시발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속 두 인물의 상황이 실제와 매우 유사해 '불륜을 암시하는 것 아니냐'며 더욱 논란이 커졌다. 영화는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와 화가 윤희정(김민희)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함께 수원의 궁궐과 작업실, 술집 등지를 돌아다닌다.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쌓는 두 사람. 그러나 이내 춘수는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희정은 깊은 생각에 빠진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모호한 구성으로 다소 ‘혼란스럽다’는 평이 많았던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명쾌한 짜임새를 가진다 ‘지금’과 ‘그때’의 2부 구성을 띄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홍상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 ‘차이와 반복’의 설명서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극 중 상황을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선명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더 친절하게 관객들을 ‘홍상수 유니버스’로 안내한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고루 갖춘, 피아짜 그란데

로카르노영화제에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고루 갖춘 영화를 소개하는 ‘피아짜 그란데(Piazza Grande)’ 섹션이 있다. ‘광장’이라는 뜻의 피아짜 그란데 섹션은 올해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장 뤽 고다르의 <여자는 여자다> 등 이미 공개되어 사랑받은 작품뿐 아니라 라에티샤 도슈 감독의 <도그 온 트라이얼>,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더 시드 오브 더 세이크리드 피그> 등 신작까지 고루 소개했다. 로카르노 영화제의 피아짜 그란데 섹션에는 총 2편의 한국 영화가 초청되었다. 지난해 류승완 감독의 <밀수>, 2021년 김지훈 감독의 <싱크홀>이다.
1970년대 해녀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이 밀수업에 손을 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밀수>는 500만 관객을 넘으며 당시 아슬아슬한 국내 극장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작품이 되었다. 더불어 제59회 대종상 감독상, 제4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2023년 시상식을 휩쓸었다.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영화 <밀수>의 인상적인 지점은 한국 영화 최초의 중년 여성 투톱 체제라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존재해왔던 여성 배우 주연, 그것도 다수의 여성 주연 영화는 흥행에 불리하다는 편견을 <밀수>가 완벽히 깨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영화는 제5회 백델데이(성평등 영화에 대한 시상식)에서 ‘백델 초이스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호정, 김민희… 로카르노의 선택

올해 로카르노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수유천>의 배우 김민희에게 최우수연기상을 수여했다. 홍상수 감독 작품의 배우가 연기상을 수상한 것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정재영과 <강변호텔>의 기주봉 이후 이번이 세 번째이다. 하얀 원피스를 차려입은 김민희는 연단에 올라 ‘5일의 촬영 기간이 짧았다’며 운을 뗐다. 이어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주신 홍상수 감독님, 저는 당신의 영화를 너무 사랑한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수유천>은 대학교 강사인 여자가 몇 년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외삼촌에게 연극 연출을 부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오는 9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한편, 한국 배우 최초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이는 2001년 영화 <나비>의 김호정이다. 당해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한 영화 <나비>에서 그는 아이를 잃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은 독일 교포 안나를 맡았다.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후 쏟아지는 관심에도 다시 무대로 돌아갔다. 이후 연극 「첼로와 케찹」, 「보이체크」 등으로 관객을 만나며 뚝심 있게 나아갔다. 최근 김호정은 디즈니 플러스 <로얄로더>와 넷플릭스 <퀸메이커> 등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며 꾸준히 연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로카르노가 점찍은 한국 영화계 신예는?

<수유천> 외 올해 로카르노영화제가 주목한 또 다른 작품은 박세영 감독의 <괴인의 정체>이다. <괴인의 정체>로 국제 단편 경쟁부문 후보에 올라 특별 언급상의 영광을 누린 박세영 감독은 <다섯 번째 흉추>, <지느러미> 등 독창적인 스타일의 작품으로 이미 여러 차례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돼 주목받은 신예 감독이다. 인상적인 점은 루이비통, 생로랑, 버버리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와 협업한 이력이 있다는 것. 그는 이에 대해 “돈을 벌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지만 가장 세련되고 트렌디한 비디오를 요하는 패션 업계에서 활발히 작업한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 비주얼리스트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정유미 감독의 <파도>가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단편 경쟁 부문에 후보에 올랐다. 영화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바다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을 담는다. 사람의 인생을 파도에 빗댄 영화 <파도>는 섬세한 펜슬 드로잉으로 더욱 주목받았다. 앞서 정유미 감독은 <연애 놀이>로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그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