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은 영화와 시리즈를 어떤 기준으로 관람하고 판단하는가? 배우? 스토리? 영상미? 대사? 여기, 영화와 시리즈를 보는 기준을 ‘성평등’에 둔 이들이 있다. 한국영화감독조합(DGK)에서 주최·주관하는 ‘벡델데이’는 영화를 보는 기준이 ‘성평등’인 행사로, 2020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5회째를 맞는다.
https://sites.google.com/dgk.or.kr/bechdel2024
‘벡델데이’는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에서 모티브를 얻어, 매년 성평등한 창작물을 돌아보고 창작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되었다. ‘벡델 테스트’란, 앨리슨 벡델의 1985년 만화 「경계해야 할 레즈비언」(Dykes to Watch Out For)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만화 속 한 인물이 자신은 “첫째,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할 것. 둘째, 그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셋째, 그 대화 내용이 남성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고 밝힌 것에서 유래했다.
DGK의 ‘벡델데이’는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3개의 벡델테스트 기준에 4개를 더한 ‘벡델테스트 7’을 만들고 이에 기반해 그해의 성평등한 작품을 선정해오고 있다. 벡델데이의 ‘벡델테스트 7’ 기준은 아래와 같다. 벡델데이는 아래 기준을 토대로 국내 공개된 가장 성평등한 영화와 시리즈 각 10편씩을 ‘벡델초이스10’으로, 성평등에 기여한 감독, 작가, 배우, 제작자를 ‘벡델리안’으로 선정한다.
벡델데이 벡델테스트 7
①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 나올 것
②1번의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③이들의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이 아닐 것
④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⑤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⑥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⑦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2024년에도 여전히 벡델데이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앨리슨 벡델은 마치 ‘농담’처럼 만화에서 위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물론, 1985년에 비해 2024년 현재, 위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작품의 수는 절대적으로 증가했다. 그래서 여전히 ‘벡델데이’와 ‘벡델테스트 7’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물론이다. 여전히, 그 양이 이전에 비해 늘었을지언정 ‘벡델테스트 7’를 통과하는 작품은 턱없이 부족하거나, 통과는 했지만 질적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단순히 양적으로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거나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평등한 작품이라고는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자신 있게 반례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여성 주인공·여성 감독·여성 서사 작품이 현재까지도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이례적’이기에, 소수의 사례가 우리의 기억 속에 짙게 각인되어 있는 탓이다. 사실은, 누구나 당장 극장에 걸린 한국영화 중 여성 감독의 영화라거나, 여성 출연진의 비중이 큰 영화를 몇 개 대라면 다소 멈칫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건 영화나 시리즈를 관람하는 개인의 젠더 감수성이 부족해서라기보단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다. 여전히 가장 기초적인 기준조차 가뿐히 넘어서는 창작물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에, ‘벡델데이’ 행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창작물들을 검토하고, 정량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정성적인 잣대로도 작품을 판단하려는 논의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영상매체의 변화, 그리고 올해의 벡델초이스와 벡델리안

최근 5년간 공개된 작품 중, ‘벡델테스트 7’을 만족하는 작품을 떠올려보자. 반드시 여성주의적 영화만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한국 미디어에서 드물게 재현되어 온 중년 퀴어 여성의 새로운 서사를 쓴 <윤희에게>,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의 근무환경을 고발하는 <다음 소희>, 김보라라는 뛰어난 여성 감독의 탄생을 알린 <벌새> 등. 첫해부터 올해까지, 역대 ‘벡델초이스’로 선정된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상업영화보다는 독립영화가 몇 곱절 이상이나 많았다.
다만, 해가 갈수록 두드러진 변화는 상업영화의 영역에서도 ‘벡델테스트 7’을 통과하는 작품들이 증가했고, 그 장르 역시 보다 다양화됐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벡델데이2020의 벡델초이스10 중 하나로 선정된 상업영화 <82년생 김지영>처럼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여성에 집중한 작품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의 장르가 다양한 것만큼이나 여성이 맡는 캐릭터와 여성이 그리는 서사가 다양해져야 하기에, 상업영화 속 여성 서사의 장르적인 확장은 분명 긍정적인 신호다. 벡델데이2023에서 여성 킬러를 내세운 영화 <길복순>, 정치 풍자 블랙코미디 <정직한 후보 2>, SF 장르의 <정이>, 벡델데이2024에서는 범죄 액션 영화 <밀수>, 코미디 범죄 영화 <시민덕희>, 호러 장르의 <잠> 등을 벡델초이스로 선정한 것 등이 그 예다.

벡델데이2024의 ‘벡델초이스10’은 2023년 7월부터 2024년 5월까지 선보인 한국영화 108편·시리즈 91편을 대상으로 예심과 본심을 통해 선정됐으며, 영화와 시리즈 부문에서 각각 성평등에 기여한 감독·작가·제작자·배우가 벡델리안으로 선정됐다. 영화 부문의 ‘벡델초이스10’에는 <교토에서 온 편지> <너와 나> <물비늘> <밀수> <비밀의 언덕> <소풍> <시민덕희> <잠> <정순> <지옥만세>가 선정되었으며, 벡델리안 감독 부문의 수상자로는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작가 부문은 <교토에서 온 편지>의 김민주 감독, 배우 부문은 <시민덕희> 라미란 배우, 제작자 부문은 <밀수>의 강혜정 제작자가 꼽혔다.

시리즈 부문 '벡델초이스10'에는 <남남> <무인도의 디바> <밤에 피는 꽃> <사랑한다고 말해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졸업> <킬러들의 쇼핑몰> <피라미드 게임> <힘쎈여자 강남순> <LTNS>가 선정되었으며, 벡델리안으로는 <LTNS>의 전고운·임대형 감독, <졸업>의 박경화 작가, <밤에 피는 꽃>의 이하늬 배우, <힘쎈여자 강남순>의 백미경 제작자가 꼽혔다.

벡델데이2024는 9월 7일(토) 홍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인디스페이스에서 감독과 저널리스트 등과 함께하는 다양한 토크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먼저 '토크 1. 벡델리안과의 만남'에서는 올해의 영화 부문 감독상 <비밀의 언덕>의 이지은 감독, 작가상 <교토에서 온 편지>의 김민주 감독, 시리즈 부문 감독상 <LTNS>의 전고운·임대형 감독, 작가상 <졸업>의 박경화 작가, 제작자상 <힘쎈여자 강남순>의 백미경 제작자와 함께 성평등 콘텐츠의 변화를 함께 논의한다. 이후 '토크 2. 임순례 28년, 여성감독 뉴웨이브' 섹션에서는 주어진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임순례 감독의 창작 세계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본다. 패널로는 임순례 감독과 남동협 감독이 참석하며, 진행은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과 이화정 벡델데이2024 프로그래머가 맡는다.
혹여나 선정되지 못해 아쉬운, 자신만의 벡델초이스나 벡델리안이 있다면 언제든 댓글로, 혹은 행사 현장에서 의견을 주길 바란다. 적극적인 소통과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균형 잡힌 창작물을 탄생시키는 첫걸음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