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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32번째 장편 영화 〈수유천〉 반복인가, 확장인가.

이진주기자
〈수유천〉
〈수유천〉

홍상수 감독의 32번째 장편 영화 <수유천>이 오는 18일 개봉한다. 주연 배우 김민희의 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 연기상 수상 소식으로 영화 <수유천>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늘 자기복제 논란이 뒤따른다. 술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현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아늑한 혹은 으슥한 곳에서 남녀가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지난 십여 년간 반복을 반복해왔다. 그의 신작 <수유천>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말과 말이 오가는 가운데 술 냄새가 풍긴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간 홍상수 감독이 다룬 사람과 사랑, 인생에 대한 인식을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며 사뭇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홍상수식 정반합(正反合), 영화 <수유천>을 미리 보았다.

 


*이하 <수유천>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유천〉
〈수유천〉

영화 <수유천>은 여대 강사이자 텍스타일 디자인 작가인 전임(김민희)이 자신의 삼촌 시언(권해효)에게 촌극 연출을 부탁하면서 시작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몇 년째 일을 못하고 있는 배우 겸 연출가 시언은 전임의 부탁에 흔쾌히 학교에 방문하고 학생들을 만난다. 연극제를 불과 10일 앞둔 상황에 학생들은 잔뜩 힘이 빠져 있는 모습이다. 갑작스러운 스캔들로 연출가 준원(하성국)과 일부 배우가 하차하고 남은 이들에게 시언은 자신의 대본을 건네며 독려한다.

 

한편, 전임과 시언은 학과 교수인 정 교수(조윤희)와 술자리를 가진다. 시언의 팬이었다는 정 교수는 수줍어하면서도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던진다. 몇 차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시언과 정 교수는 전임 없이도 함께 시간을 보낼 만큼 가까워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왼),〈당신 얼굴 앞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왼),〈당신 얼굴 앞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도망친 여자>(2020), <당신 얼굴 앞에서>(2021), <여행자의 필요>(2024) 등 여성 주인공의 내밀한 심리 변화를 다룬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띤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과는 달리 <수유천>의 주인공 전임은 관찰자의 위상을 지닌다. 실물에서 패턴의 영감을 얻는다는 태피스트리답게 전임은 현상을 관찰하고 관계의 구조를 직조한다.

 

전임 앞에는 두 개의 사랑이 있다. 삼촌 시언과 정 교수 그리고 연출 준원과 학생들 간의 것이다. 전임은 이들의 애정을 ‘옳지 않다’며 부정하고 이에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전임의 정(正)에 반(反)하는 것이다. 유부남인 시언과 자신의 상사인 정 교수가 마음을 키우고, 연출 한 명이 세 명의 배우들과 동시다발적으로 만남을 가지는 모습에 전임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임에게 정(正)이란 그가 매일 아침 스케치하는 수유천의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 순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수유천〉
〈수유천〉

하지만 다른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작 진실을 놓치는 것은 전임이다. ‘편안한 것이 좋’아 정 교수에 대한 마음을 쌓은 시언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전임은 다소 어긋난 모습을 보인다. ‘서로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냐’며 따져 묻는 연출 준원 앞에서 사소한 잘잘못을 따지는 전임은 미성숙해 보이기도 한다. 이들에게 전임은 정(正)과 반(反)의 이분법에 매몰되어 그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는 전임이 자신만의 필터를 거쳐 현상을 구조화하는 패턴을 다루는 아티스트라는 것과 맞닿는다.

 

영화 <수유천>은 중반부까지 이 대척점 사이에서 비교적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내 보름달이 떠오르고 그 속내를 은근히 드러낸다.

 

촌극제를 마친 시언과 학생들은 뒤풀이 자리에 모여 앉는다. 시언의 작품을 불쾌히 여긴 대학 총장은 정 교수에 이어 전임까지 불러들인다. 침울한 분위기에서 시언은 “뭐가 그리 거슬릴까?”라며 답답함을 토로한다.

 

〈수유천〉
〈수유천〉

그리곤 학생들에게 갑작스레 어떤 사람이 되고 싶느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영화는 마치 방언을 터뜨리듯 심경을 토로한다. 시언의 물음에 학생들은 각각 ‘솔직하게 살고 싶다’, ‘사람임을 잊지 않고 싶다’, ‘가짜가 아닌 사랑이 가득 찬 삶을 살고 싶다’며 속절없이 눈물을 흘린다. 갓 미성년에서 벗어난 네 명의 대학생이 뜨겁게 자신의 가치에 대해 쏟아내는 이 장면은 앞서 등장한 조심스럽고 냉소적인 어른들의 모습과 대비되며 웃음을 유발한다. 특히, 이들은 홍상수 감독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독특한 톤으로 말을 이어나가는데 이것이 흡사 종교단체의 기도회와 같은 생경한 느낌을 자아낸다. 주로 젊은 여성 배우들에게서 볼 수 있는 비일상적 격식체가 더욱 기묘하게 전달되는 순간이다.

 

이후 시언과 정 교수의 관계에 불편해하던 전임에게 시언은 이혼 소식을 전한다. 영화는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표정의 전임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아주 노골적이다. ‘오랜 기간 별거 후 이혼을 했다’는 시언의 대사는 영화 밖의 논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영화 <수유천>은 극 중 스캔들이라 매도되는 이들의 사랑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111분. 80~90분 남짓하던 홍상수 감독의 최근 작품 중 이례적으로 긴 시간을 할애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말이다.

 


배우 김민희(사진=로카르노영화제)
배우 김민희(사진=로카르노영화제)

지난 8월 17일 <수유천>으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김민희는 전임을 통해 9년 전 홍상수 감독과의 첫 협업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편안함을 보여주었다. 극의 중심부에서 늘상 뾰족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연기를 선보이던 그는 이제 프레임의 주변부에서 다른 인물에게 곁을 내주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지난 19일 로카르노국제영화제가 공개한 인터뷰에서 김민희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소소하지만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하고 정말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며 “내 나이에 나한테 이렇게 재밌고 신나는 일이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그런 에너지가 그 캐릭터에 그대로 들어가게 된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다.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단은 김민희에 대해 “홍상수 감독의 감동적인 영화 <수유천>에서 이 배우는 이 모든 것(섬세함과 인내, 절제를 위한 대담함)과 그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내어 심사위원단 모두를 경탄하게 했다”고 평했다.

 

씨네플레이 이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