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최고의 미남 배우라고 불렸던 알랭 들롱이 지난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그는 <사랑은 오직 한 길>(1958),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1959) 등의 로맨스 영화에서 아름다운 외모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조이 하우스>(1964)에서 들롱과 함께 출연한 배우 제인 폰다는 그를 두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칭했다.
영화계에 발을 들이기 전 그는 웨이터와 짐꾼, 판매원 등 온갖 일을 전전하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들린 칸영화제에서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뒤바뀐다. 알랭 들롱의 아름다운 외모와 드러나는 매력이 미국 영화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그는 셀즈닉에 의해 처음 배우의 길에 들어서지만, 고국으로 돌아와 마크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살며시 안아주세요>(1957)로 데뷔한다. 이후 한동안 프랑스에서 활동을 이어간 그는 공전의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오른다. 그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에 출연하고 직접 제작하기도 하면서 숱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런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2012년 제65회 로카르노영화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그의 지난 시간을 다시 떠올리며 대표작 몇 편을 소개한다.
<태양은 가득히>(1960)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알랭 들롱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알랭 들롱은 경력 초기에 젊고 활기차면서 동시에 종종 도덕적으로 타락한 남자를 연기했다. 당시의 이미지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태양은 가득히>다. 알랭 들롱은 이번 영화에서 거짓을 일삼는 인물 톰 리플리로 분해 젊은 냉소주의자의 심리적 초상을 그린다.


영화는 미국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를 각색했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청년 톰 리플리(알랭 들롱)는 방탕한 나날을 보내는 친구 필립(모리스 로네)의 비위를 맞추며 그의 곁에 머무른다. 톰은 자신을 막 대하는 필립의 태도가 달갑지는 않지만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바로 그가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기 때문. 톰은 필립의 아버지로부터 자택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필립을 데려오면 5천 달러를 받기로 한다.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그는 필립의 애인 마르쥬(마리 라포레)도 동행하는 요트 투어에도 따라나서고, 그곳에서 필립의 막된 행각에 견디다 못해 그를 살해한다. 톰 리플리는 돌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과 사기를 서슴없이 일삼는다. 알랭 들롱의 깊고 파란 눈은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의 미스터리를 증대시킨다. 알랭 들롱은 아름다움 속에 냉소를 품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낸다.
<일식>(196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은 영화 <일식>(1962)에서 인간성이 배제되고 소통이 단절된 전후 이탈리아의 사회를 그리기 위해 공간과 건축물, 사물에 주목했다. 영화는 도시의 텅 빈 공간을 담아내 냉소적이고 비인격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태양은 외로워>에서 등장하는 건축물과 사물은 프레임 중심에 놓이거나 커다란 크기로 프레임 영역을 넓게 차지하며 인간을 한없이 미약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번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끌리는 젊은 주식 중개인 피에로 역을 맡았다. 비토리아(모니카 비티)는 막 끝낸 연애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어머니를 찾으러 주식거래소에 간다. 사람들의 공허한 아우성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그녀는 젊은 주식 중개인 피에로(알랭 들롱)를 만난다. 둘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서로에게 빠져들지만, 동시에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간격도 인식한다. 알랭 들롱이 분한 피에로는 비토리아와 다른 삶의 반경을 지닌 인물이다. 아프리카 문화를 동경하고, 문명화된(동시에 영화에서 가장 소란스러우며, 돈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인간 군상들로 야만적인) 장소인 주식 거래소에서 이방인처럼 존재하는 비토리아와 달리 피에로는 그 공간의 질서와 생리가 몸에 밴 현대적인 인물이다. 알랭 들롱은 직업인의 가면을 쓴 모습과 동시에 인물 내면의 불안함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연기는 영화의 냉소적인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안토니오니 감독의 비전을 충실히 구현해 냈다.
<레오파드>(1963)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더없이 아름다운 영화 <레오파드>에서 알랭 들롱은 젊고 야심 찬 전쟁 영웅으로 분한다.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은 1963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귀족이자 공산주의자라는 상반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비스콘티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귀족 사회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의 미장센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소멸성이 묻어 있어 애석한 감정을 자아낸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와 더불어 1960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불린다.

1860년대의 시칠리아. 이탈리아의 통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가리발디의 혁명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살리나 공작은 변화를 맞이한다. 혁명군에 합류한 그의 조카 탄크레디(알랭 들롱)는 전쟁 영웅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살리나(버트 랭카스터)는 가문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그를 마을 시장의 딸인 안젤리카(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와 결혼시키려 한다. 알랭 들롱의 얼굴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젊은 세대의 불안과 열망을 표현하는 역에 제격이었다. 들롱은 이 영화를 통해 미남 배우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고독>(1967)

한 남자가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둑한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에 누워 담배를 태운다. 세간살이의 단출함은 도리어 방 안의 빈 공간을 내비치고,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와 창밖의 자동차 소리는 적막을 인식하게 한다. 오래도록 지속되는 이 장면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권태를 부연 설명 없이 깔끔하게 전달한다.
살인청부업자 제프(알랭 들롱)는 의뢰를 받고 어느 나이트클럽의 사장을 살해한다. 사장을 살해한 방에서 유유히 빠져나오던 제프는 클럽의 피아니스트 발레리(카티 로지어)에게 모습을 들킨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한 유일한 목격자인 발레리를 수사에 끌어들이고 용의자를 색출한다. 경찰에 체포된 제프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발레리 앞에 서게 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발레리는 그의 정체를 실토하지 않고, 그는 미리 애인 잔느(나탈리 들롱)와 공모해 둔 알리바이가 인정돼 풀려난다. 하지만 그는 살인의 대가로 돈을 받으러 간 곳에서 암살자로부터 팔을 저격당한다. 이제 그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의뢰인을 찾아 나선다.


중절모와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남자.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예정된 파국을 향해 걸어간다. 알랭 들롱은 장 피에르 멜빌의 손길이 묻은 이 영화에서 프렌치 누아르의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그는 영화 <고독>을 기점으로 <시실리안>(1969), <암흑가의 세 사람>(1970), <암흑가의 두 사람>(1973), <고독한 추적>(1976) 등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복장을 고수하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고독한 남성의 이미지를 확립한다. 그중 <고독>은 들롱의 감정의 일렁임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과 그에 반해 우수에 찬 그의 눈빛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