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숨을 빚진 통역가를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탈레반에 맞선 군인의 이야기, <더 커버넌트>가 9월 27일 개봉했다. 그동안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유명한 가이 리치가 연출한 이번 밀리터리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유대를 얘기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전쟁은 보통 잔혹하거나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구현하는 최적의 장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놓인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시각을 전하기도 한다. <더 커버넌트>처럼 새로운 시점에서 전쟁을 들여다보고, 또 관객에게 호평을 받은 몇몇 밀리터리 영화를 재조명하는 리스트를 소개한다.
자헤드: 그들만의 전쟁
샘 멘데스 / 2005


1990년 걸프전을 배경으로 삼은 <자헤드: 그들만의 전쟁>는 앞서 말한 '전쟁영화'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영화다. 그래서 국내에선 개봉도 못하고 곧바로 2차시장으로 직행했는데, 그럼에도 전쟁영화라는 카테고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수작 중 하나다. '자헤드'는 해병대 머리를 뜻하는 속어로, 극중 해병대 신병이 걸프전 현장에 투입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에 집중적으로 그린다. <더 커버넌트>의 주연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을 맡은 또 하나의 전쟁영화.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 등 개인이 품은 욕망과 심리를 묘사하는 데 특출난 샘 멘데스 감독이 연출했다. 그만큼 전투의 승패나 혹은 국가 단위에 종사하는 군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전장에 투입되는 군인들이 심리적으로 무너지게 되는 군 생활을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풀 메탈 자켓>의 1막을 늘려놓은 것 같"다는 평가처럼 군인들이 감내하는 고된 서열 관계와 사회적 소외 등이 영화의 핵심.
햄버거 힐
존 어빈 / 1987


전쟁영화 마니아들에게 물으면 1순위로 추천받을 영화는 <햄버거 힐>이 아닐까 싶다. 베트남 전쟁 당시 상당히 논란이 됐던 '햄버거 힐 전투'를 옮긴 영화로 전쟁에서 소모되고 마는 군인들을 영화에 담았다. 햄버거 힐 고지는 미군, 남베트남 연합과 북베트남이 전술적 우위를 위해 점령하려고 했던 곳으로 10일 가까이 소모전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북베트남을 패퇴시켰으나 필요 이상의 소모전으로 사망자가 급증해 현지에서도 반전 여론이 높아진 계기가 됐다. 다만 영화는 이런 현실을 좀 더 과장하며 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가 그 때문에 사실 여부 논란을 겪기도 했지만, '무의미한 전투에 희생되는 젊은이들'이란 관점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호평받았다. 한국영화로 치면 <고지전>과 비슷한 분위기의 (그렇지만 신체 훼손 강도는 훨씬 센)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통렬하게 현대식 소모전을 직시하며 영화 공개 이후 30년이 넘은 시점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컴 앤 씨
엘렘 클리모프 / 1985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지구에서의 참사 등이 보도되면서 가장 많이 호명 받은 영화라면 <컴 앤 씨>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벨라루스가 겪은 참상을 담은 이 영화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청소년의 시각에서 강대국이 휘두르는 횡포와 폭력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 개봉 당시 실신한 관객이 있었다는 일화나, 본 사람마다 정신이 피폐해지니까 조심하라는 후기가 있을 정도로 '전장 밖의 전쟁'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이러다보니 최근 전쟁에 휘말려 희생된 민간인들의 사례가 보다 빠르게 전해지는 요즘, 이 영화가 자주 거론된 것. 그렇게 썩 좋지 않은 이유로 재차 호명되고 있지만, 어쨌든 1989년 개봉 이후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던 영화가 '진짜 전쟁영화'라고 재평가 받고 있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불러오는 악영향을 상기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영화를 연출한 엘렘 클리모프 감독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느껴 연출계에서 은퇴를 하기도 했다.
아웃포스트
로드 루리 / 2020

앞선 영화들이 전쟁의 씁쓸한 이면을 그렸지만, 영화의 엔터테인먼트면에선 전쟁이란 때때로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앞장 서곤 한다. 근래 나온 전쟁영화 중 가장 호평받았다 뽑을 수 있는 <아웃포스트>가 그런 사례다. <아웃포스트> 또한 내용만 보면 암울하기 그지없다. 아프가니스탄전에 투입된 미군이 전초기지를 사수하기 위해 탈레반에 맞선 내용을 다룬다. 정치적 이유로 폐쇄가 연기된 상황에서 군인들은 탈레반의 공세에서 기지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목숨까지 사수해야 했다. <아웃포스트>는 기지에 남겨진 미군들의 군상을 그리고, 후반부에 탈레반의 공세에 수성전에 나선 시퀀스를 채워넣는다. 덕분에 군인 신분의 개인에게 집중하면서 동시에 전쟁영화의 스펙터클까지 확실하게 챙긴다. 이 사실적인 묘사는 제이크 태퍼가 집필한 동명 수기, 그리고 영화를 연출한 로드 루리 감독이 미 육군사관학교 출신 이력이 함께 만든 시너리로 보인다. 북미 현지에서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대로 개봉하지 못했지만, 근래 밀리터리 영화 중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점점 커지고 있는 숨은 수작.
액트 오브 밸러
마이크 맥코이, 스콧 워프 / 2012



'한국 특'이라고 하지만, 세계 어느 곳을 봐도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는 포스터에 배우 얼굴이 있기 마련이다. <액트 오브 밸러>는 그런 거 없다. 한국포스터뿐만 아니라 오리지널 포스터에도 배우 얼굴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종종 거론되는 이유는 단 하나. 미쳤다 소리가 절로 나는 밀리터리 고증 때문이다. <액트 오브 밸러>는 전쟁영화는 아니고 순수 밀리터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미 해군의 네이비 씰(육해공 특수부대) 작전을 그린 이 영화는 촌스럽지만 '네이비 씰을 제대로 그린다'는 목표 하나는 완벽하게 수행한다. 미 해군의 협조를 받아 실제 작전을 묘사하고 실제 대원이 도움을 준 덕분에 유례없이 사실적인 전장을 포착한다. 대신 그만큼 '미 해군에 감사하십시오'라는 태도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건 흠. '훌륭한 영화'라는 조건에선 턱없이 부족하지만 '훌륭한 밀리터리 영화'로선 빠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