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3년 데뷔한 이래 약 41년간 활동했음에도 김희애는 아직 신인배우 같다. 영화 <허스토리>(2018), <윤희에게>(2019),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 등, 그리고 최근작 <퀸메이커>나 <돌풍> 등에서 김희애가 보여주는 모습은 여전히 그가 ‘훗날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임을 증명한다.
그의 말마따나 “연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연기를 한다기에는 김희애가 연기한 인물들은 유난히도 생명력이 넘친다. 오는 16일 개봉하는 <보통의 가족>은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던 네 사람이 아이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CCTV를 보게 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담은 서스펜스 영화다. 배우 김희애는 극 중 시호(김정철)의 엄마이자 재규(장동건)의 아내 연경 역할을 맡았다.
극 중 연경은 가장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캐릭터다. 재완-재규 형제에게 “정말 이상한 형제들이네, 돌아가며 나 돌게 만드네”라며 직설적으로 내지르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른 아들 시호에게는 ‘넌 그런 적 없던 거야’라며 가족을 감싸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지난 7일 오후,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희애와 나눈 대화를 전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막 다녀오셨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통의 가족>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전체적으로 소재나 이야기가 무거워서 어떻게 보실까 싶었는데, 되게 흥미롭게 보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도 비슷하게 보셨고요. 엔딩 장면도 되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처음 <보통의 가족>의 제안을 받고,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매력을 느껴서 출연을 결정하셨나요.
흠잡을 데가 없었어요. 완벽한 대본이었고. 또, 감독님께서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 찍으시는 걸 보고 참 대단하다 싶었고요. 좋은 배우들과 함께해서, 배우로서는 정말 더 이상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컨디션이구나 싶었어요.
기자간담회에서는 <보통의 가족>이 ‘마치 감독님이 오랜 시간 끓여 낸 곰국 같다’라는 비유를 해주셨어요.
왜 그랬냐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을 보고 있어요. 저는 그냥 조리 과정이 간단한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할 줄도 모르고. 그런데 <흑백요리사>를 보니까, 정말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저런 음식이 나올 수가 없구나 하고 놀랐거든요. 그런 게 생각이 나서 그렇게 말씀드렸던 건데,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 때) 정말 정성을 다해서, 인스턴트 같은 게 아니라, 쥐어짜듯 하셔서. 제가 참 만나 뵙고 싶었던 감독님의 스타일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요.

김희애 배우님은 80년대부터 오랜 시간 활동해 오셨는데,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허진호 감독과는 <보통의 가족>으로 처음 만났어요. 평소에 허진호 감독을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왜, 괜히 좋은 거 있잖아요. 사람들이 어떤 제품이나 브랜드, 애플 마크를 좋아하는 것처럼 (허진호 감독님은 그런 존재예요). 허진호 감독님은 여자 배우라면 꼭 한 번쯤 같이 작업해 보고 싶은 그런 로망의 감독님이세요. 그래서 앞뒤 가릴 것 없이 나한테 기회가 왔구나, 했죠. 왜냐면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등) 감독님이 여배우들을 아름답게 담으시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멜로가 아니고, 딥하고, 현실적인 얘기라. 이상적인 꿈의 얘기가 아니고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얘기라, 제가 생각하는 그런 로망은 없었지만. (웃음)
허진호 감독은 현장에서 대사를 바꾸고, 연출 방법을 바꾸는 등 작업 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한 연출자로 유명해요. 이번 <보통의 가족> 촬영 때는 어떠셨나요?
항상 마음을 열어놓으시고, 정답은 없으니까 가장 좋은 방법, 창의적인 건 뭘까, 재밌는 건 뭘까를 항상 생각하는 분이셨어요.
<보통의 가족> 속 첫 저녁 식사 때, 화장실에서 지수(수현)와 미묘한 신경전을 하는 장면 중 ‘거울을 보세요’라는 대사는 김희애 배우가 직접 제안했다고 들었어요.
저도 즉석에서 새로운 걸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감독님이 원체 열린 마음으로 계시니까 저도 하나 던진 게 있었어요. 연경이는 지수(수현)가 밉기도 하고, 좀 무시하기도 하고, 자신을 조금 우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속물적인 근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보통의 가족>에는 연경과 지수의 미묘한 긴장 관계가 담겨 있어요. 지수를 향한 연경이의 마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하셨나요.
겉으로는 무시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부러운 거죠. 어리고, 좋은 차를 타고, 몸매 좋은 모델 같은 인물이니까, 열등감이 있어서. 그런데 저는 그런 연경이가 귀여웠어요. 나이 어린 형님을 질투하는 것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연경이는 속물적인 근성이 있으면서도,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니고, 국제구호기구에서 만든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연경이는 속물적인 근성과 따뜻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은데요. 김희애 배우님은 연경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나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요. 자기 앞에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 같고, 그게 시부모님 간병이라거나 자기 직업이라거나, 봉사활동, 아들에 관한 문제 등. 지수를 좀 무시하지만, 그것조차도 앞에서는 웃는 얼굴이다가 뒤에서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앞에서도 하잖아요. 한결같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그런데, 연경이가 영화 후반부에 달라졌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에 봉사활동을 하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도 연경이고, 그리고 또 자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물불 안 가리는 것도 연경이고. 재완과 재규가 싸우니 ‘형제들이 돌게 만든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도 연경이고. 오히려 남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식에게 열정적으로 하고. 그 사람이 봉사활동도 하면서 되게 남편한테 쿨하게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날렸을 수도 있고, 또 남편은 그런 모습에 반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연경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김희애 배우님은 평소에 연기를 하실 때, 맡은 캐릭터에 몰입을 많이 해서 작품이 끝난 후에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이번에 연경이를 연기하며 후유증이 있으셨나요?
예전에는 그랬는데, 그게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전에는 너무 빨리 털어내는 사람들에게 너무 섭섭하기도 하고, ‘어떻게 저럴 수가, 진심이 아니었어!’라며 실연당한 사람처럼 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좋은 것 같지 않은 거예요. 배우에게나, 현실의 저에게나 좋은 게 아니구나. 내 안에 건강한 삶과 건강한 정신을 담아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 그걸 담아두면 미련 곰탱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빨리빨리 털어내려고 해요.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털어내셨어요?
예전에는 6개월, 1년 촬영하면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일만 하고, 사람도 안 만났어요. 왠지 죄책감이 들어서요. 그런데 지금은 틈만 나면 개인적으로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근데 그게 나쁘지 않더라고요. 내가 대본을 다 숙지하고 촬영에 영향을 주는 행동을 안 하는 이상, 밸런스도 유지되고. 연기를 할 때 이렇게 해 놓으니까 끝나고 나서도 빨리 털어낼 수 있었어요.
<보통의 가족>을 찍은 후, <돌풍>에 설경구 배우를 추천하셨다고 해요. 설경구 배우와는 영화 <더 문>,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 그리고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보통의 가족>까지 세 작품에서 호흡하셨어요. 세 작품에서 설경구 배우를 만난 소감은요.
제가 추천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설경구 씨 정도 배우가 한다고 하면 감사해야죠. <보통의 가족>을 먼저 찍고, <돌풍>을 마지막에 찍었는데 시기가 뒤바뀌었죠(<돌풍>은 지난 6월 28일 공개됐다). 그런데, 스크린에서 <보통의 가족>을 보니 <돌풍>의 느낌이 전혀 안 남아있더라고요. 그래서 재밌었어요.
김희애 배우님과 같이 작업을 한 감독과 배우들이 항상 하는 말이, 김희애 배우는 촬영장에서도 연기 연습을 실전처럼 한다는 건데요. 보통, 철저히 계획을 하고 연기를 하는 편이신가요? 이번에는 식사 장면을 카메라 여러 대로 많이 반복해서 찍었다고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새로운 감정 표현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요.
물론 계획은 하지만, 실제로 할 때는 계획한 대로 안 돼요.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계획한 걸 잊어버리고 그냥 하는 스타일이고. 그런데 여러 번 찍어도 ‘저게 몇 번째 간 거였지?’라며 나중에 보면 뭐가 뭔지 몰라요. 그런데 저는 보통 처음에 간 테이크를 좋아해요. 왜냐면 그게 제가 느끼기에 신선해요.

<보통의 가족>이 또 재밌는 점은, 90년대 청춘 스타가 2024년에 이르러 부부가 되어 만났다는 사실인데요. 함께 부부 연기를 한 장동건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장동건 배우가 출연한) <아스달 연대기>를 봤는데, 너무 재밌게 봤어요. 자칫하면 너무 붕 뜰 수 있는 얘기를 굉장히 현실감 있게 표현했고요. 이번에 부부 연기를 하면서는, 어떻게 보면 안 어울리는 사람끼리 부부가 된 거잖아요. 그런데 전혀 외모에 신경 안 쓰고 연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왜냐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미남 배우가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신경 안 쓰고 멋있게 연기하는 것 보고 박수 치고 싶었어요.
김희애 배우는 <윤희에게> 등 작품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출연을 결정하기도 하는데요. 김희애 배우만의 작품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대본이고요. 그런 대본을 고른 감독님의 안목이라면 좋을 것이고, 좋은 대본을 알아보는 배우들도 함께할 거니까요. 그리고, 사실 대본도 100% 완벽한 작품은 저에게 오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치 있는 작품을 한다고 생각해요. 단 한 줄이라도, 마음을 터칭 할 수 있는 작품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각해 보면, 김희애 배우가 출연한 영화 <허스토리>나 <윤희에게> 모두 나름의 팬덤이 있는 작품이에요.
<윤희에게>도 대본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최근에 임대형 감독님이 하신 <LTNS>를 봤는데, 진짜 너무 깜짝 놀랐어요. 너무 장르가 확 달라서, 내가 본 임대형 감독이 맞나 싶고, 천재구나 싶었어요. 그런 것처럼, 제가 선택했던 게 잘한 선택이었구나, 내가 좋은 사람이랑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있어요. <허스토리>도 작업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었어요. 부산 사투리가 그렇게 어려워서. 그런데, 그걸 하고 나니까 <허스토리>가 저의 자랑스러운 필모그래피 중 하나라고 꼽을 정도로 자신 있어요. <허스토리>를 찍을 때는 사람들한테 ‘발연기’ 얘기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되게 걱정을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120%를 했었어요. 자면서도 사투리를 막 하고, 꿈도 꾸고. 그러고 나니까 후회도 없고, 너무나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작은 작품이 흥행과는 상관없이 제 커리어에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작품이 되었고, 제 자존감을 만들어주는 작품이 됐으니, 꼭 필요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윤희에게>나 <허스토리>도 관객들이 환영해 주신 걸 보면 저희는 제대로 된 걸 봐주시는구나 싶어서 너무 감동적이에요.
<윤희에게>로 퀴어 연기도 하시고, <더 문>으로 잠깐이나마 SF 장르에도 도전하시고, <돌풍>이나 <퀸메이커> 같은 정치물에도 도전하셨어요. 또 하고 싶은 캐릭터나 장르가 있으시다면요.
최근에 한 감독님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최근에 이슈가 됐던 어떤 인물을 말하며 저에게 그 역할을 할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지나가는 말처럼 하신 얘기지만, 저는 듣고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 사람이랑 나를 생각할 수 있어? 정말 천재적이다’ 그랬어요. 저는 가치 있는 작품이라면, 저를 가슴이 뛰게 하는 그런 캐릭터라면 할 수 있어요. 배우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기존에 있던 이미지를 자꾸 소모하는 거거든요. 반대로, 새로운 일을 창조하면 저의 생명을 늘리는 거고요.
김희애 배우에게 ‘가치 있는 작품’이란 무엇인지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한다면요.
캐릭터가 매력이 없거나, 흥행만을 신경 쓴 작품들이 있잖아요. 그렇게는 소모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죠. 예를 들면. <윤희에게>는 제가 큰 걸 바라고 한 작품은 아닌데, 다시 저의 생명줄을 이어주고, 저를 소모시키지 않고 더욱 풍부하고 탄탄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올해 벌써 세 작품 <데드맨> <돌풍> <보통의 가족>이 공개됐어요. 올해 유난히 다작을 하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연기를 하고 싶으세요?
다 몰렸어요. 많이 하는 건 모르겠고, 꾸준하게 하는 건 좋을 것 같아요. 언제까지 연기를 하고 싶냐면, 저도 모르죠. 선택받는 일이니까요. 내일이라도 일이 없을 수 있으니까.
1983년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약 41년간 연기를 줄곧 이어오고 계세요. 여전히 연기 욕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연기의 매력’은 뭘까요.
연기만큼 할 줄 아는 게 없어가지고. (불러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