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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공포를 전달하는 법

씨네플레이

고통을 전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고문 장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피와 살, 끔찍한 악의 폭력 등 대개는 고통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을 택한다.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관객이 육체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게 어쩌면 가장 직관적이고 쉬운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스크린과 객석을 분리해 ‘나는 안전하다’라는 쾌감만을 남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은 자극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어떤 영화는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공포를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하여 메시지를 보다 선명히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불쾌한 소음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그려지지 않은 장면들이 보다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은 머릿속에서 더욱 끔찍한 상상으로 유도한다. 결국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영화의 공포를 재구성하여, 보다 강렬한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늘은 잔혹한 장면 없이 심리적 공포 혹은 불쾌, 불안을 극대화하는 세련된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레드 룸스>

〈레드 룸스〉(2024)
〈레드 룸스〉(2024)

검색엔진이 찾을 수 없는 딥웹 안, 특수한 소프트웨어와 권한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다크웹. <레드 룸스>의 소재가 된 ‘레드 룸’은 다크웹 안에 있는 공간으로 유희를 위해 사람을 고문하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고 한다. 물론 이는 괴담으로, 매체에서 소재로 활용하는 편이다. 스너프 필름 등 역겨울 정도로 자극적인 소재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레드 룸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고문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편인데, <레드 룸스>는 레드 룸을 소재로 하지만 실제로 레드 룸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레드 룸에서 10대 소녀 3명을 살해하는 과정을 생중계한 혐의로 기소된 피의자에게 집착하는 여성에 집중한다. 

 

〈레드 룸스〉
〈레드 룸스〉

 

영화는 피의자 슈발리에(맥스웰 맥케이브-로코스)의 재판으로 시작하지만, 슈발리에와 그의 범죄 행각을 광적으로 추적하는 캘리언(줄리엣 가리에피)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그 집착의 이유를 영화는 조금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캘리언의 직업은 모델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음습하다. 암호화폐를 걸고 불법 온라인 포커를 치며 돈을 따는 그는 이상하리만큼 인터넷 세계에 익숙하다. 눈에 띄지 않는 무채색 옷차림에 어떠한 표정도 없이 무균실 같은 공간에서 친구도, 가족도 없이 홀로 있는 그는 모델 겸 해커다. 캘리언은 법원 앞에서 슈발리에의 무죄를 주장하는 추종자 클레멘타인(로리 배빈)을 만나는데, 두 사람 모두 슈발리에에게 집착한다는 점은 같으나 클레멘타인은 그가 무죄임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두 사람은 슈발리에가 범인임이 확정되는 순간 서로 극명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이때 감독은 “‘캘리언이 우리 시대에 볼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닐까 싶다”고 설명하며 “현실에서는 지극히 외로워하지만 온라인으로 강렬한 인격체로 살아가고 있죠”라고 덧붙였다. 결국 재판에선 스너프 필름이 상영된다. 영상을 직접 보여주진 않지만 전동공구 소리와 끔찍한 비명소리로 공포를 전달하는데, 가장 두려운 점은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판이 시작될 때,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이제부터 잔인한 영상을 틀 테니 무서운 장면을 목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즉시 떠나라고 경고했지만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캘리언처럼 아무도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흉악 범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성적 도착증 하이브리스토필리아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정신질환으로 대표적인 예가 테드 번디나 리처드 라미레즈 같은 연쇄살인범의 여성 팬들이다. 감독은 “악마, 살인자에게 집착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워 사람들이 뇌와 감정으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관객들이 피부 깊숙이 파고들어 배우의 의도, 동기가 무엇일지 파고들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설명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수용소 옆 관사에 살았던 독일군 장교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는 실화 기반 영화로, 시각과 청각의 충돌을 통해 나치의 잔혹함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닌,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제목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반경 40m 안의 주변 지역을 의미하는데,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 가족의 평화로운 생활과 얼핏 들려오는 총성과 흐느낌, 비명소리를 동시에 보여준다. 사운드를 끄고 보면, 평화로운 어떤 백인 가족의 일상을 나열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영화는 시종일관 평화로운 이미지를 유지한다. 하지만 소리를 켜는 순간 잔뜩 심어둔 포도 뒤 담장 너머의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영화 곳곳에 남아있는 참상의 흔적이 보인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총소리에 놀라지 않는 아이들, 강에서 뱃놀이를 할 때 잡히는 뼛조각. 영화는 의도적으로 루돌프 가족이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어떠한 교류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극도의 불편함을 자아낸다. 실존 인물이던 루돌프 가족, 특히 아내는 “몰랐다"라는 말로 일관하지만 영화는 ‘그럴 리 없다’라고 말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

 

남편 루돌프 회스는 밥을 먹는 중에도 효율적인 학살 방식을 강구하고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트에 참여하지만, 아내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는 어떠한 행동을 하진 않는다. 직접적으로 총칼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는 독일의 패망 이후 재판 당시 “몰랐다”라고 말하며, 그는 진실로 자신이 무죄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의 물건 중 마음에 드는 걸 입고 쓰며 스스로를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말하는 인물이다. 벽 너머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기 위해 포도를 잔뜩 심고, 전근을 가야 하는 남편을 향해 “여긴 우리 집이야. 그동안 꿈꿔 왔던 삶이잖아!”라고 소리치며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길 소망한다. 인자하게만 보이던 그는 유대인 하녀에게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스실로 보내버리겠다’는 협박을 한다. 명백하게 벽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행동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지금, 이 시대에 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오스카 수상소감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중략)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 희생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입니다”라고 말하며 영화에서 수용소에 사과를 숨기던 폴란드 소녀,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친다”라며 수상소감을 마무리한다. 

 


<비바리움>

〈비바리움〉(2024)
〈비바리움〉(2024)

 

<비바리움>의 제목은 관찰 혹은 연구를 목적으로 동/식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외부와 단절된 인공적인 환경으로 영화는 이 단어의 의미를 집요하게 시각화한다. 꿈꿔오던 집을 찾기 위해 수상한 부동산 중개업자를 따라간 커플이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강요받으며 느끼는 공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톰(제시 아이젠버그)과 젬마(이모겐 푸츠)는 평범한 연인으로 그들은 멀끔하지만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부동산 중개업자, 마틴(조나단 아리스)을 따라 욘더라는 주택 단지의 9번 주택을 소개받는다. 두 사람은 어딜 둘러봐도 똑같은 집들이 끝없이 이어진 욘더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 그곳을 빠져나오려 하지만 마틴과 차는 사라진 채 두 사람은 그곳에 갇히고 만다. 그들은 한 ‘아기’를 배달 받고 그를 키울 것을 강요받는데, 집과 그 의무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길은 계속해서 그들을 같은 장소로 되돌려 놓는다. 

 

〈비바리움〉
〈비바리움〉

 

영화 속에서 톰은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끝없이 땅을 파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피로감과 좌절뿐이다. 젬마는 기이한 아이를 돌보는 것에 익숙해지지만 점차 자신의 삶이 무언가에 의해 통제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이 처음 집을 둘러볼 때 원했던 ‘안정적인 삶’의 극단적인 형태를 경험하며 그들은 이 삶이 결코 자유를 의미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안정된 가정의 표면 아래 숨겨진 통제와 억압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한다. 무한히 구멍을 파던 톰의 모습은 직장에 몰두하는 남성의 모습으로 보인다. 젬마는 가족과 자식을 위해 본인의 생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을 강요받는 여성의 모습처럼 그려진다. 그들이 원하던 안정적인 삶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 <비바리움>은 일반적인 공포영화나 스릴러 장르의 클리셰를 피하고, 강박적이고 갑갑한 불안을 관객에게 체감하도록 만든다. 우리의 현실이 과연 톰과 젬마의 비극과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게 만들며, 현대 사회가 집착하는 이상적인 가정과 그 안에서의 삶이 과연 진정한 행복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램>

〈램〉(2021)
〈램〉(2021)

 

아이슬란드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불안하고 기이한 이야기, 영화 <램>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 경계에서 태어난 기묘한 존재를 다룬다. 마리아(누미 라파스)와 잉바르(힐미르 스나이르 구오나손)는 아이슬란드의 외딴 농장에서 양을 키우며 살아가는 부부다. 어느 날, 그들은 양 우리에서 태어난 특별한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절반은 양, 절반은 인간의 형태를 가진 아기였다. 이들은 이 기이한 생명을 ‘아다’라 이름 붙이고 부부의 아이로 키우기로 결정한다. 황량하고 적막한 자연 속에서 마리아와 잉바르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그들의 발밑까지 불길한 기운이 다가온다. 

 

〈램〉
〈램〉

 

영화 <램>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면서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어떻게 침해하고 통제하려는지 보여준다. 마리아와 잉바르는 아다를 통해 상실한 가족의 자리를 채우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인간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경고한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자연의 복수가 다가오면서 이들의 행복은 깨지기 시작하는데, 이는 인간이 자연의 경계를 넘어설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리아는 아이를 잃은 대신 찾아온 아다를 축복이라 여기며 극진한 사랑을 베푸는데,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그리워하는 어미양의 울음소리는 거슬리는 존재일 뿐이다. 아다에게 집착하는 마리아는 결국 어미양을 죽이게 되는데, 영화는 이후 자신의 선택한 결과로 인해 광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굴복하는 인간의 모습에 집중한다. 감독 발디마르 요한손은 대사보다 시각적인 연출과 자연의 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광활한 아이슬란드의 풍경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산, 그리고 그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과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영화 전체에 걸쳐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이한 스토리와 연출로 인해 <램>은 공포나 판타지 장르로 분류하기 어렵다. 

 


<조디악>

〈조디악〉(2007)
〈조디악〉(2007)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연쇄살인범 조디악 킬러를 추적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영화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다루는데, 핵심은 범인이 아닌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기자와 경찰, 그리고 삽화가의 집착이다.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은 신문사에서 일하는 삽화가로, 점차 사건 해결에 집착하여 삶이 잠식되는 인물이다. 폴 에이브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기자와 데이브 토스키(마크 러팔로) 형사 역시 조디악 킬러를 잡기 위해 단서를 추적하지만, 점차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이를 조롱하듯 조디악은 언론과 경찰을 조롱하며 암호화된 편지와 메시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조디악〉
〈조디악〉

 

<조디악>은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와 궤를 달리한다. <세븐>(1995), <파이트 클럽>(1999)로 유명한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으로, 그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스타일리시하고 화려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지만 <조디악>은 오히려 건조하고 담담하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연출을 통해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이 사건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집중한다. 세 등장인물 모두 이 사건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데, 특히 로버트는 가족과의 관계마저 희생하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 모습은 집착을 넘어 광기에 가깝다. 핀처 감독은 이러한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느끼는 절망과 혼란을 체감하게 만든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