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2004) <언더 더 스킨>(2013)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최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17만 관객을 동원하며 절찬 상영 중이다. 글레이저는 <섹시 비스트>(2000)로 영화감독 신고식을 치르기 전에도 라디오헤드, 블러, 자미로콰이, 매시브 어택, 닉 케이브 등의 뮤직비디오와 코닥, 나이키, 기네스, 스텔라 아르투아, 폭스바겐, 랭글러 등 글로벌 브랜드의 CF 작업을 병행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전 글레이저가 만든 뮤직비디오와 CF를 소개한다.
Massive Attack
"Karmacoma"
1995

학부에서 극장 디자인을 전공한 조나단 글레이저는 3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한 뒤 광고회사 소속으로 여러 CF를 만들며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1995년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데뷔했다. 첫 작품은 영국 트립합 그룹 매시브 어택의 'Karmacoma'. 평소 글레이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으로 손꼽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파키스탄과 몽골 등의 음악을 샘플링한 비트에 3D와 트리키의 나른한 랩이 어우러진 트랙이, <샤이닝>(1980) 속 기하학적인 호텔 내부와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쌍둥이 소녀의 이미지 등을 차용한 난해한 이미지와 맞물린다. 장편영화 데뷔작 <섹시 비스트>를 발표하고 한동안 뮤직비디오 작업을 하지 않던 글레이저는 2006년 매시브 어택의 'Live with Me'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바 있다.
Blur
"The Universal"
1995

'Karmacoma'와 더불어 1995년 발표한 블러의 'The Universal' 역시 스탠리 큐브릭을 향한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경이 새겨졌다. 큐브릭의 문제작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주인공 알렉스(말콤 맥도웰)처럼, 보컬 데이먼 알반은 오른쪽 눈에만 아이라인을 그린 채로 종종 기괴한 표정을 짓고 알반을 비롯한 블러 멤버들은 하얀 옷을 차려입은 채 저마다 파티를 즐기고 있는 형형색색의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다. 글레이저는 2002년과 2012년 영국의 영화 매체 <사이트 앤 사운드>로부터 최고의 영화 10편을 꼽는 설문을 받았을 때 모두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꼽았는데, 뮤직비디오는 이 작품이 아닌 <샤이닝>과 <시계태엽 오렌지>만을 차용했다. 정작 'The Universal' 싱글 커버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에서 따온 것도 흥미로운 점.
Radiohead
"Street Spirit (Fade Out)"
1996

9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밴드 라디오헤드 역시 일찌감치 뮤직비디오 제작에 힘써왔다. 데뷔 싱글 'Creep'부터 두 번째 앨범 <The Bends>까지 3년 사이 여러 감독들과 함께 10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조나단 글레이저가 연출한 'Street Spirit (Fade Out)'은 <The Bends> 시기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비디오다. 미국 LA 외곽의 사막에서 이틀간 촬영한 뮤직비디오는 흑백 톤 아래 라디오헤드 멤버들과 여러 동물/사물이 움직이는 걸 슬로모션으로 처리해 노래의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한껏 배가시켰다. 글레이저는 이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산문적인 감동을 주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이는 제 작업에서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라디오헤드는 다음 앨범 <OK Computer>의 두 번째 싱글 'Karma Police'의 뮤직비디오 또한 글레이저에게 맡겼다.
Jamiroquai
"Virtual Insanity"
1996

영국 애시드재즈 밴드 자미로콰이의 'Virtual Insanity' 뮤직비디오는 흔히 글레이저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밴드의 프론트맨 제이 케이가 사방이 무채색으로 뒤덮이고 (회색 콘크리트 벽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영감 받았다) 바닥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방에서 자유자재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담았다. 바닥이 종으로 횡으로 움직이는 방에서 훵키하게 춤을 춘다는 콘셉트 외에도 곳곳에 보이는 동물들과 시커먼 소파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피가 유쾌함 그 이상의 맛을 남긴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컴퓨터 그래픽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사실 바닥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세트와 오브제에 바퀴를 달아서 구현한 효과가 빛을 발한 것이라고. 'Virtual Insanity' 비디오는 발표되자마자 선풍적인 반응을 몰고 왔고, 1997년 수많은 시상식에서 올해 최고의 뮤직비디오의 자리를 차지했다.
UNKLE & Thom Yorke
"Rabbit in Your Headlights"
1998

'Rabbit in Your Headlights'는 톰 요크가 보컬을 맡았지만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아니다. 영국 DJ 제임스 라벨이 이끄는 프로젝트 UNKLE은 샘플링 예술의 극점을 보여준 걸작 <Endtroducing.....>를 발표한 DJ 셰도우가 합류하면서 톰 요크, 버브의 리차드 애쉬크로프트, 톡 톡의 마크 홀리스, 비스티 보이즈의 마이크 D, 쿨 G 랩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한 첫 앨범 <Psyence Fiction>을 발표했다. 조나단 글레이저가 감독을 맡아 1998년 11월 처음 선보인 'Rabbit in Your Headlights' 뮤직비디오의 콘셉트는 단순하다.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이 연기한 남자가 터널 안을 휘청휘청 대고 중얼거리며 걷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그를 위험하게 비껴가거나 치고 지나가는 걸 오랫동안 보여준다. 톰 요크의 음울한 목소리에 걸맞은 어느 광인의 수난극처럼 보이지만, 불현듯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이 비디오에 대한 첫인상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린다.
Levi Strauss
"Odyssey"
2002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조나단 글레이저가 만든 CF 가운데 한국 대중들도 기억할 만한 작품은 리바이스의 광고일 것이다. 리바이스가 1999년 론칭한 청바지 라인 '엔지니어드 진'은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광고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는데, 글레이저가 2002년 연출한 <오디세이>(Odyssey)는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Mirror> <Pose>와 더불어)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헨델의 '사라방드'가 음울하게 깔리는 가운데 한 남자가 벽을 뚫어대며 달리면, 그 옆에 달리던 여자가 붙고, 결국 둘은 함께 건물을 뚫고 나와 나무 위를 달리고 저 허공에 몸을 던진다. 'Rabbit in Your Headlights'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육체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The Dead Weather
"Treat Me Like Your Mother"
2009

2024년 현재까지 조나단 글레이저가 만든 마지막 뮤직비디오는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기타리스트 잭 화이트가 결성한 밴드 데드 웨더의 'Treat Me Like Your Mother'다. 제자리를 돌던 폭탄이 터지면서 시작하는 비디오는 가죽 재킷을 입은 잭 화이트가 총을 들고 황량한 길을 걸어가는 거의 1분 동안 쭈욱 따라가고, 이어 비슷한 행색을 한 밴드의 또 다른 멤버 앨리슨 모스하트가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게 비춰지고 두 사람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그리고 노래가 절반에 다다를 즈음, 둘은 갔던 길을 다시 돌아 서로를 향해 다가가며 총을 갈겨댄다. 거리가 멀어지고 좁혀지는 사이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는 과정이 노래 'Treat Me Like Your Mother'의 진행에 맞물려 펼쳐지는 장관은 이후 15년간 멈춰 있는 글레이저의 뮤직비디오 필모그래피가 갱신되기를 바라게 만든다.
Apple
"Flight"
2019

한편, 2019년 공개된 애플의 '애플 워치' 광고 <플라이트>(Flight)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마지막 CF로 남아 있다. 평범하게 거리를 조깅하던 여자는 숲을 가로질러 산을 뛰어오르다가 갑자기 바람에 실려 하늘로 날아오른다. 구름 위로 오른 여자는 당황하던 것도 잠시 자유롭게 바람을 타면서 아크로바틱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수직 낙하해 강으로 떨어지고 통화가 오는 걸 거부하고 물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공간을 넘나들며 운동하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면서도, 애플 워치 제품의 효용성을 드러내는 영리한 작품. <플라이트>가 공개되고 얼마 후 글레이저는 유명 무용수들의 격렬한 몸짓을 포착한 단편영화 <스트라스부르 1518>(2020)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