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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여성배우③] 안야 테일러 조이, 현실판 엘사를 넘어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뉴 뮤턴트

주성철편집장
〈퀸스 갬빗〉
〈퀸스 갬빗〉

 

장난처럼 안광 테일러 조이라고 불러본다.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2000)으로 골든글로브, 크리틱스초이스, 미국배우조합상 TV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휩쓴 1996년생 안야 테일러 조이는 무엇보다 큰 눈의 매력적인 안광(眼光)으로 캐릭터를 집어삼킨다. 1950년대 한 보육원을 배경으로 한 <퀸스 갬빗>에서, 안야 테일러 조이는 체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주인공을 연기하며 자신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렸다. 친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보육원에 맡겨진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은 초록색 안정제로 중독을 치유하는 과정 중 체스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다. 남성이 지배하는 프로 체스 세계에서 베스 하먼은 체스 스타로서 점점 더 넓은 세계로 향하게 된다. <퀸스 갬빗> 포스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체스의 기물(말)과 안야 테일러 조이의 안광뿐이다. 바둑도 장기도 체스도 알파고 앞에 무릎을 꿇은 시대, 체스판 앞의 안야 테일러 조이는 마치 인류의 마지막 전사처럼 보인다.

 

〈더 위치〉와 〈노스맨〉(오른쪽)
〈더 위치〉와 〈노스맨〉(오른쪽)

안야 테일러 조이가 ‘마녀’(로 의심받는 소녀)로 데뷔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모델로 활동하던 중 배우 제안을 받고 TV 시리즈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세일럼(Salem) 마녀재판을 소재로 한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2015)로 극영화 데뷔하며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했다. 세일럼 마녀재판은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빌리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사건으로 무려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종교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죽인 사건으로, 인간의 집단적 광기를 보여주는 미국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다. ‘제2의 틸다 스윈튼’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금발, 그리고 가늠하기 힘든 서사를 품고 있을 것만 같은 눈빛의 안야 테일러 조이는, 틸다 스윈튼이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이세계(異世界)의 존재처럼 느껴진다.(틸다 스윈튼도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서 ‘하얀 마녀’로 등장한 적 있다) 어쩌면 로버트 에거스는 안야 테일러 조이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활용하는 연출자로 생각되는데, 10세기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북유럽의 신화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만난 것처럼 보이는 <노스맨>(2022)을 통해서는 안야 테일러 조이의 ‘현실판 엘사’라는 별명을 재확인시켜주는 느낌이었다.

 

〈23 아이덴티티〉와 〈글래스〉(오른쪽)
〈23 아이덴티티〉와 〈글래스〉(오른쪽)

 

공포영화 <더 위치>를 통해 주목받은 뒤, 또 다른 공포 스릴러 장르의 거장 M 나이트 샤말란 감독과 함께 <23 아이덴티티>(2017)와 <글래스>(2019)까지 연달아 작업한 것도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언제 누가 등장할지 모르는 인격들 사이를 오가는데, 그러다 24번째 인격의 지시로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를 포함한 3명의 소녀를 납치한다. 과거 학대당한 기억을 안고 있는 케이시는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제임스 맥어보이와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에서 어느덧 할리우드에 안착한 직업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3 아이덴티티>와 <글래스> 모두 제임스 맥어보이의 ‘원맨쇼’에 가깝지만, 그 주변에서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 안야 테일러 조이의 존재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뉴 뮤턴트〉
〈뉴 뮤턴트〉

 

20세기폭스에서 마지막으로 제작한 ‘엑스맨 유니버스’ 영화인 <뉴 뮤턴트>(2020)에서, 안야 테일러 조이는 ‘마녀’를 넘어 급기야 ‘돌연변이’가 됐다. 비밀 시설에 수용되어 심리 상태를 감시받는 10대 돌연변이 중 한 명인 ‘일리야나’였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고 다룰 줄 몰랐던 그들이 믿기지 않는 경험을 하며 각자 능력을 각성하기 시작한다. 슈퍼히어로물의 세대교체를 꿈꾼 야심적인 프로젝트였음에도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연기한 엑스맨 캐릭터 ‘매직’(Magik)만큼은 안광(!)을 뿜어내며 ‘안야 테일러 조이를 위해 준비된’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엠마〉와 〈라스트 나잇 인 소호〉(오른쪽)
〈엠마〉와 〈라스트 나잇 인 소호〉(오른쪽)

 

<뉴 뮤턴트> 이후 안야 테일러 조이는 훌쩍 시간을 뛰어넘어 181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제인 오스틴의 고전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영국의 한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엠마 우드하우스(안야 테일러 조이)는 오지랖 넓게 마을 사람들의 중매를 즐기는 사람인데, 자신 역시 감정의 혼란을 겪으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이야기다. 어울려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시대극’이라는 의상이 안야 테일러 조이와 멋진 조화를 이뤘고, 시카고비평가협회상에서 의상상을 수상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나 할까.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6)의 엠마 톰슨과 케이트 윈슬렛, 먼저 영화화됐던 <엠마>(1997)의 기네스 팰트로, <오만과 편견>(2006)의 키이라 나이틀리, <제인 에어>(2011)의 미아 와시코브스카 등 제인 오스틴 원작 영화들이 당대 주목받는 여성 배우들의 성공의 발판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지나치게 장르적인 캐릭터로 시작했던 안야 테일러 조이가 더 너른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필모그래피 전체를 놓고 보면 시대상과 원작도 확연하게 다르지만, 어쩌면 안야 테일러 조이가 ‘가장 말 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서 더더욱 달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안야 테일러 조이에게는 이른바 ‘현대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의 팬이라면 <엠마>와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 사이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안야 테일러 조이의 ‘배우론’을 쓸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

 

〈듄: 파트2〉런던 프리미어 행사장의 안야 테일러 조이
〈듄: 파트2〉런던 프리미어 행사장의 안야 테일러 조이

 

<듄: 파트2>(2024) 런던 월드 프리미어 행사장에 안야 테일러 조이가 등장하는 순간도 놀라웠다. 당초 출연자 리스트에도 없었지만, 그제서야 그가 본편에 잠깐이나마 출연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마치 ‘하얀 마녀’ 혹은 ‘엘사’ 사이, 그 특유의 이미지로 등장했을 때 완전히 무대를 장악하는 느낌이었다. 당대 무수한 스타들 중에서도 안야 테일러 조이 특유의 포토제닉한 아우라만큼은 쉬이 맞설 자가 없다. 이어 같은 해 개봉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를 통해 안야 테일러 조이는 어떤 정점에 올라섰다. 앞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9)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 자신이 연기하는 프리퀄 1편(<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 끝남과 동시에 아무런 시간 공백 없이 2편(<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 곧장 시작하는 구조 안에서 ‘컨티뉴이티’를 책임져야 한다는, 즉 배우가 바뀌었지만 시간 차가 느껴지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미션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가족도 행복도 모두 빼앗기고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를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를 위해 안야 테일러 조이는 그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건 자신의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던 ‘현실판 엘사’ 이미지를 완전히 내동댕이치고, 긴 머리카락도 자르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물론 그리하여 눈빛만이 더욱 도드라지게) 검게 메이크업을 한 채, 심지어 액션영화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남성 마초 배우들에게나 허용됐던 ‘신체 훼손’의 드라마까지 가져간다. 그 클라이맥스가 전해준 쾌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뭐랄까, 안야 테일러 조이는 시대와 장르를 초월하여 늘 신비롭다. 현존하는 배우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랄까.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