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일리 스페이니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이미지의 ‘소녀’ 유형을 보유한다. 155cm의 작은 체구는 소녀 역할을 맡기에 이상적인 신체적 특징이 되어주었고, 많은 감독이 이를 알아보고 그녀를 소녀 역할에 캐스팅했다. 2018년 <퍼시픽 림: 업라이징>으로 장편 데뷔한 이후 그녀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에서 루스 긴즈버그의 딸 제인 긴즈버그를 맡았고, <배드 타임즈: 엘 로얄에서 생긴 일>(2018)에서는 컬트 집단에 세뇌된 소녀 로즈를, 케일리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크래프트: 레거시>(2020)에서는 평범한 소녀에서 펑키한 10대 마녀로 거듭나는 릴리로 분했다.

케일리가 분한 세 명의 소녀는 저마다 다르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제인은 성차별의 근원을 무너트리기 위해 세기의 재판을 준비하는 엄마의 남다른 책임감을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어른스러운 딸이었고, <배드 타임즈: 엘 로얄에서 생긴 일>의 로즈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녀의 감정 없는 행동을 보다 보면, 컬트 집단에 합류하기 전부터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에 이르게 된다. 케일리는 이 영화에서 스릴러 장르를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크래프트: 레거시>의 릴리는 염력과 예지력을 비롯한 각종 마법을 부리지만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 주인공에 걸맞은 인물이다.

케일리 스페이니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프리실라>로 비로소 관객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크래프트: 레거시>를 제외한 이전 모든 작품에서 조연에 그쳤던 케일리는 <프리실라>에서 스타 배우가 될 매력과 역량을 남김없이 뽐낸다. 이 영화는 케일리에게 베니스국제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어린 신부였던 프리실라 프레슬리 역을 맡았다.

실제로 장신이었던 엘비스 역은 배우 제이콥 엘로디가 맡았다. 196cm의 거구를 가진 제이콥 엘로디의 옆에서 케일리의 작은 체구는 더 두드러진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를 캐치하고 케일리 스패니의 신체적 특징을 의도적으로 활용한다. 두 배우의 신장 차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투숏은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단단히 묶인 연인의 모습보다 둘의 관계에 숨어 있는 위압을 발견하게 한다. 때때로 케일리는 꿈을 이뤄가며 세계인의 스타로 거듭나는 엘비스의 옆에서 차츰 공허감에 물드는 프리실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작은 몸을 더욱 움츠린다.
<프리실라>에서 보이는 연기가 이전 작품에서의 연기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그녀의 목소리다. 케일리는 <프리실라>에서 이전에 들려주지 않았던 섹슈얼한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여러 공개 석상에서 비춘 모습을 살펴보아도 실제 그녀의 발성과 프리실라의 것은 확연히 다르다. 케일리는 정확한 딕션이 돋보이는 발화를 구사하며 또렷하게 소리를 낸다. <프리실라>에서 그녀는 가녀린 호흡을 곁들인 발성을 통해 간드러진 목소리로 엘비스의 사랑을 갈구한다.

<프리실라>에서 케일리 스페이니는 미성숙한 ‘소녀’와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한다. <프리실라>를 촬영할 당시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던 케일리는 프리실라의 14세부터 28세까지의 시간을 그려낸다. 그 속에서 그녀는 미성숙과 성숙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때로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케일리 스페이니가 두 가지의 여성 유형을 표현해낸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14살의 평범한 프리실라는 여느 소녀처럼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한다. 프리실라 아버지의 말마따나 “모든 여자들이 줄을 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녀의 관계는 애초에 동등하지 않았다. 프리실라는 자신에게 향한 엘비스의 관심과 호감을 붙잡아두기 위해 성숙한 여성의 외양과 제스처를 흉내 냈고, 그것은 소녀의 서툰 몸짓과 어우러져 그녀의 열등감을 드러낸다.

엘비스의 손을 처음 잡은 다음 날 프리실라는 여전히 그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일상을 보낸다. 학교 복도를 천천히 거니는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고, 주변의 인물들을 희미하게 만든 쉘로우 포커스는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더 부각한다.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사랑을 받는 순간만큼은 그를 숭배하는 평범한 소녀들과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다는 환상에 젖은 채 지루한 일상을 견딘다. 그렇게 프리실라는 일상과 비일상을 오가면서 점점 그에게 빠져든다. 굿나잇 키스를 나누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짧은 입맞춤의 여운에 달뜬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다. 케일리 스페이니의 표정 연기는 정확히 사랑에 빠진 여성의 아름다움을 포착해내고, 스타의 아우라마저 두르고 있다.

다시 프랜차이즈 영화로 돌아온 케일리 스페이니는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통해 주연 배우의 입지를 다진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 그녀는 보다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버려진 우주 기지 로물루스로 향하는 레인으로 분한다. 레인은 식민지 개척에 앞장선 거대 기업 웨이랜드 유타니가 소유하고 있는 우주 식민지 잭슨 스타 출신으로, 부모님의 죽음 이후 로봇인 남매 앤디와 서로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기업 웨이랜드의 노역에 시달리던 레인은 암울한 행성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찾고자 로물루스로 향하고, 버려진 우주 기지를 수색하다가 우주에서 가장 무서운 생명체와 맞서게 된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87)의 플롯을 차용했지만, 원작 영화의 진중하고 사색적인 톤을 버리고 엔터테이닝 영화로 전향해 프랜차이즈 영화로서의 생명 기간을 연장시켰다. 그 속에서 케일리 스페이니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리플리의 강인한 여전사 이미지와는 또 다른 영웅을 그린다. 그녀의 강인함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함께한 친구들을 구하려는 내면에서 빚어진다. <에이리언>(1987)의 마지막 시퀀스를 오마주한 마지막 탈출 시퀀스는 케일리 스페이니란 배우에게 아직 발견되지 못한 미개척지가 남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