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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여성배우②] '고요한 산 아래 들끓는 용암처럼' 플로렌스 퓨

이진주기자
플로렌스 퓨(사진=IMDb)
플로렌스 퓨(사진=IMDb)

플로렌스 퓨만큼 독보적인 아우라를 가진 배우가 있을까. 뻔한 수식어이지만 결코 아무에게나 붙일 수 없는 이 말로 그를 설명하는 것은 매 작품 플로렌스 퓨가 보여준 존재감 때문이다. 1996년생인 플로렌스 퓨는 크리스토퍼 페어뱅크, 안소니 홉킨스 등 원로 배우뿐 아니라 엠마 왓슨, 시얼샤 로넌 등 할리우드 대표 스타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화면 장악력을 선보인다. 깊은 눈빛, 탁한 목소리, 톡 쏘는 대사 처리 등 플로렌스 퓨의 독특한 인상과 연기 스타일 때문만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플로렌스 퓨의 아우라는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배우의 의지’에서 발생한다.

플로렌스 퓨(사진=IMDb)
플로렌스 퓨(사진=IMDb)

사실 플로렌스 퓨는 지금까지 넓은 범위의 캐릭터성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매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느낌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는 아니라는 뜻이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긴 했지만 그 안에서 그는 꼭 그 다운 인물을 연기했다. 플로렌스 퓨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이 잘 활용되는 작품에서 그저 존재한다. 때문에 그는 어떤 시대의 인물이든, 어떤 장르의 영화이든 작품 속에 살아있다. 때문에 작품을 떼놓고 그를 논하기는 어렵다. 플로렌스 퓨가 걸어온 길을 함께 살펴보자.


레이디 맥베스(2016)

〈레이디 맥베스〉 플로렌스 퓨
〈레이디 맥베스〉 플로렌스 퓨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원작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아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1864년 소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다. 이 소설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시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한 여성의 처절한 생존기이다.

 

19세기 영국 캐서린(플로렌스 퓨)은 팔려가듯 알렉산더(폴 힐튼)와 결혼한다. 남편은 무심하고 시아버지 보리스(크리스토퍼 페어뱅크)는 엄격하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집안에서 캐서린은 흑인 하인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과 눈이 맞게 된다.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은 결국 발각되고 캐서린은 뜻하지 않은 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레이디 맥베스>는 플로렌스 퓨가 지닌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원 톱 주연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레이디 멕베스>를 통해 마치 고요한 산 아래 들끓는 용암처럼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캐서린의 행동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배우가 지닌 이 독특한 정서가 인물에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킹 리어(2018)

〈킹 리어〉 플로렌스 퓨(왼)
〈킹 리어〉 플로렌스 퓨(왼)

플로렌스 퓨가 선택한 다음 고전 명작은 셰익스피어의「리어 왕」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가 제작하고 2018년 리처드 이어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킹 리어>는 연기의 대가 안소니 홉킨스가 80세 노인 리어 왕 역을 맡고 플로렌스 퓨가 그의 막내딸 코델리아 역을 맡았다.

 

영화 <킹 리어>는 연극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다. 예를 들어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관객과의 무언의 약속 하에 인물이 대사를 하는 방백과 같은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연극에 낯선 관객에게는 적잖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대사와 배우들의 경이로운 연기력에 어느새 압도되고 만다. 당시 플로렌스 퓨는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안소니 홉킨스에 밀리지 않는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재산 분배를 두고 세 딸에게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며 '효심이 제일 깊은 딸에게 가장 큰 몫을 주겠다'고 말하는 철 없는(?) 아버지 리어 왕을 두고 두 언니 고너릴(엠마 톰슨)과 리건(에밀리 왓슨)은 아버지의 비위를 맞춘다. 하지만 의자에 비딱하게 앉은 막내딸 코델리아는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를 사랑한다'라며 그 이상의 찬양을 거부한다. 리어 왕은 그 답변에 분노하며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만, 코델리아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코델리아 역의 플로렌스 퓨는 안소니 홉킨스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통해 마치 왕이자 아버지인 리어와 기싸움을 벌이는 듯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작은 아씨들(2019)

〈작은 아씨들〉 플로렌스 퓨(오른쪽)
〈작은 아씨들〉 플로렌스 퓨(오른쪽)

<작은 아씨들>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이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하나인 그레타 거윅의 재해석이 돋보인다. 영화는 19세기 중후반 미국 마치 가문의 네 자매 메그(엠마 왓슨), 조(시얼샤 로넌), 베스(엘리자 스캔런), 에이미(플로렌스 퓨)의 이야기를 담는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애틋하게 위하는 네 자매의 유년기와 7년의 세월이 지난 후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한 성인기를 교차로 보여주며 독특한 정서를 자아낸다.


플로렌스 퓨는 극 중 네 자매의 막내이자 화가 지망생인 에이미 마치 역을 맡았다. 앞서 여섯 차례 영화화된 작품 속 에이미는 작고 귀여운, 전형적인 미소녀로 묘사된다. 이에 비해 플로렌스 퓨의 에이미는 한층 거침없고 대담한 모습이다. 특히 그의 탁하고 낮은 목소리가 지닌 묵직한 에너지는 전형적인 ‘막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플로렌스 퓨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손위 자매 조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로 에이미 마치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미드소마(2019)

〈미드 소마〉 플로렌스 퓨(왼)
〈미드 소마〉 플로렌스 퓨(왼)

 

플로렌스 퓨는 감독 아리 애스터를 만나 또 한 번의 강렬한 연기를 남긴다. 영화 <미드소마>에서 그는 스웨덴의 한 축제에 방문하며 기괴한 일을 겪는 대니 아너 역을 맡았다.

 

갑작스럽게 일가족을 잃게 된 대니 아너. 슬픔에 빠져있던 중 논문 주제를 찾는 남자친구 크리스찬 휴즈(잭 레이너)와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 헬싱글랜드에 위치한 마을 호르가의 축제 미드소마로 떠난다. 흰 의복을 차려입은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환대해 주고 밝은 분위기 속에 축제는 시작한다.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미드소마에 빠져드는 이들은 이 축제의 실체를 알게 된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레이디 맥베스> 이후 플로렌스 퓨의 인생 연기는 <미드소마>의 것이라 확신한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외부 환경에 대해 날카롭게 반응하며 심리적 동요를 보인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90년대생 여자 배우들 중 유독 단단한 느낌을 주는 플로렌스 퓨이기에 속수무책의 상황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심리 묘사가 더욱 돋보인다.


블랙 위도우(2021)

〈블랙 위도우〉 플로렌스 퓨(오른쪽)
〈블랙 위도우〉 플로렌스 퓨(오른쪽)

 

영화를 본 관객은 알 것이다. <블랙 위도우>는 분명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를 위한 영화이지만 포커스가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빈약한 액션과 느슨한 진행 등으로 마블 팬들 사이에게 큰 혹평을 받은 <블랙 위도우>지만 플로렌스 퓨가 연기한 옐레나 벨로바의 엄청난 매력에 이견을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1995년 오하이오 주에서 부모님과 단란하게 살고 있는 두 자매 나타샤와 옐레나에게 갑작스러운 사건이 생긴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21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후 재회한 둘은 가족의 진실을 알고 서로를 경계하지만 이내 마음을 합쳐 아빠와 엄마를 구하기 위한 길을 떠난다.

 

<블랙 위도우>는 연기파 배우 플로렌스 퓨가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 세계관에서도 그 존재감이 빛나는 배우라는 점을 확인케 했다. 안정적인 액션뿐 아니라 능글맞은 유머를 자연스럽게 던지는 모습에서 플로렌스 퓨의 스타성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