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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에서 건진 영화들②] 에릭 쿠의 〈영혼의 여행〉, ‘인연’(因緣)의 의미를 묻다

씨네플레이

〈영혼의 여행〉
〈영혼의 여행〉

 

<샤이닝>(1980)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탠리 큐브릭은 원작 소설가 스티븐 킹에게 전화로 연락하고는 질문을 던졌다. “유령이라는 존재 자체가 죽음 뒤의 또 다른 생, 즉 사후세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잖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다분히 낙관적인 콘셉트 아닙니까?”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킹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하지만 지옥이라는 것이 있잖아요?”라 되물었고, 이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큐브릭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난 지옥 따윈 믿지 않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인 에릭 쿠의 <영혼의 여행>은 유령과 사후세계를 두고 낙관적인 콘셉트라 냉소하던 큐브릭의 지적에 넉살 좋은 유머로 화답하는 듯한 영화이다. 돌이켜보면 영적 존재의 등장이란 그에겐 무척 친숙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영화의 총아로 국제무대에 발돋움케 한 데뷔작 <면로>(1995)에서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령이 주방에 앉아있는 모습이나 <12층>(1997)의 자살 이후에도 공공주택을 떠나지 못하는 청년의 유령, <우리가족: 라멘샵>(2018)에서 부모의 영혼이 그랬으며, 다른 작품에서도 유령이나 그와 비슷한 환상들은 자주 출몰하곤 했다. 그의 영화는 줄곧 고독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인간 군상을 다루어왔는데, 작중 영혼 또는 유령과 비슷한 존재의 출현은 초기작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된 주인공의 외로움이 빚어낸 환상이자 허구로 관계가 파편화된 현대사회, 도시문명의 비극을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점점 뒤로 갈수록 위로이자 희망의 징후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영혼의 여행〉
〈영혼의 여행〉

 

영화는 멀리 떨어진 프랑스와 일본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비추는 걸로 시작한다. 샹송가수 클레어(까뜨린느 드뇌브)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반려견 레옹이 죽자 크게 상심하고는, 슬픔을 잊기 위해선 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쿄에서의 콘서트를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한 편 일본에서는 한때 유망한 밴드의 멤버였지만 지금은 홀몸으로 적적히 살아가는 노인 유조(사카이 마사아키)가 있다. 젊은 시절부터 클레어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콘서트가 있기 전에 레코드판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던 중 숨을 거두고, 나름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이지만 슬럼프를 겪던 아들 하야토(타케노우치 유타카)가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콘서트 티켓을 발견하고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공연장을 찾아 클레어의 사인을 받는다. 성황리에 콘서트를 마친 그날 밤, 클레어는 술집에서 홀로 사케 한 병을 자작하다가 그 자리에서 급사한다. 이를 기점부터 영화는 영혼이 된 왕년의 스타 클레어와 그녀의 팬 유조가 함께 손잡고 이승을 떠도는 일종의 로드무비로 전환된다.

 

〈영혼의 여행〉
〈영혼의 여행〉

지지부진한 신작의 준비 작업을 잠시 멈추고 얼마간의 말미를 낸 하야토는 유언에 따라 밴드를 하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후부키 준) 사이에 추억이 담긴 서퍼보드를 차에 싣고 어머니에게 돌려주러 가는 여정에 오른다. 하야토의 뒤를 따르는 유조와 동행하면서 클레어가 목격하게 되는 건 해묵은 상처로 얼룩진 가족 간 관계의 단절이다. 생전에 유조는 아들 하야토와는 평소에는 잘 만나지 않는 격조한 사이였고, 이혼한 하야토의 친모는 재혼해 새 남편과 원만히 지내며 겉으로는 나름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꾸리고 있다. 유조는 온전히 가족을 책임지고 건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품고 있는데, 호기롭게 경력과 가정을 다 챙기겠다고 자신했던 클레어 또한 딸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회한에 찬 고백을 하며 마찬가지였음이 드러난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실패한 부모라는 인생의 쓰라린 경험을 공유하면서 두 사람은 영적 여행의 동행자로서 서로 간의 이해와 결속을 다지게 된다.

 

 

〈영혼의 여행〉
〈영혼의 여행〉

오래전 헤어져 타인이나 다름없는 친어머니를 찾아가는 하야토, 아내를 그리워하며 아들을 뒤따르는 아버지 유조의 여행은 모두에게 있어 그동안 도망친 채 외면해오기만 했던 과거의 과오, 저마다 지은 업(業)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참회와 속죄의 기회가 된다. 하야토의 생모 역시 수십 년 만에 상봉해 어색하기만 한 아들의 면전에서 어머니로서 짊어져야 했을 자식에 대한 책임을 내팽개쳤다는 자책감을 토로한다. 영화의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나온다. 현실을 사는 우리들은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거나, 자기 이외에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약하며 가엾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인생의 어느 갈림길, 시간의 지도리에 처해서 때때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사려가 깊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 결과로 원하지 않았지만 회복불가능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자신의 마음, 사랑을 고백할 자신감이 부족해, 오해와 갈등을 풀고 해원(解寃)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서 돌아서버리곤 하지 않던가?

 

 

〈영혼의 여행〉
〈영혼의 여행〉

 

<12층>과 <내 곁에 있어줘>(2005) 등에서 보아왔던 에릭 쿠의 인물이 늘 그래왔듯, 가족 구성원의 죽음이 극의 사건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고 다들 과거지사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영혼의 여행>은 비관적인 정조와는 거리가 멀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생전의 믿음과는 달리 클레어는 영혼의 형태로 자기 존재와 의식을 보전하고, 그 덕분에 유조는 생전에는 다하지 못했던, 실수를 만회할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내 곁에 있어줘>에서 두 남녀가 서로의 손을 붙잡고 포옹하며 체온을 나누었던 것처럼, 이미 죽었지만 두 사람은 삶의 희망, 긍정과 낙관을 회복하고 사후세계의 또 다른 여행길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화(寓話)스러운 구도를 통해 감독은 좀 더 넓은 시야로 너그럽게 바라보며 한 번뿐인 삶을 가능한 지혜롭게 살라는, 통속적으로 보이지만 소박하고 진정성 어린 계몽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호텔 룸〉
〈호텔 룸〉
〈우리가족: 라멘샵〉
〈우리가족: 라멘샵〉

음울하고 잔혹한 색채가 짙었던 <면로>와 <12층> 때와는 달리 에릭 쿠의 관심은 인간과 세계의 단절을 확인시키는 데서 조금 거리를 두고, 음식을 매개로 오랜 역사의 질곡을 풀고자 했던 <우리가족: 라멘샵>에서처럼 어떻게 단절된 것들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회복시킬 것인가에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클레어는 샹송 가수, 유조는 전직 록 밴드 리더이자 음악애호가, 하야토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각자의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가라는 직종에 종사하며 모종의 동질감을 갖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레나의 노래를 사랑했던 아버지의 음악적 취향은 대신 콘서트를 관람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아들 하야토에게 유전되며,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 흥얼거리는 멜로디, 들리지 않지만 무의식에 작동하는 선배 예술가로서 엘레나의 조언과 ‘죽지말라’는 포옹은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좌절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는 하야토를 허무와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장 〈내 곁에 있어줘〉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장 〈내 곁에 있어줘〉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마이 매직〉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마이 매직〉

 

이러한 묘사는 영혼과 사후세계라는 설정을 단순히 서사의 전개를 위한 편의적인 장치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은유라는 보다 더 깊은 함의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는 종종 어떤 작가의 소설이나 시, 어떤 감독의 영화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고는, 일면식도 없음에도 창작자와 교감하고 있는 듯한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곤 하지 않던가? 클레어의 노래는 아버지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강렬한 호소력을 끼치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남긴 일기장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뭇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하야토는 소일거리 삼아 들른 극장에서 자신의 옛 영화가 20년이 지나서도 명작으로 추억되며 관객의 사랑을 받는 광경을 목격한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예술에는 끝을 다 함이 없으며, 유령이 물리현실의 장벽과 언어에 구애받지 않듯 예술도 시대와 세대, 국경과 시간 등, 그 모든 경계를 초월해 친구를 만들며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그러니 세상에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혼자인 채로 고립된 존재 또한 있을 수 없고, (클레어와 유조가 육신을 잃고 혼백이 되었듯) 비록 형태가 바뀔지언정 영영 사라지고 끝나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다. 싱가포르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일면을 들추어내었던 초기작의 결기를 내려놓은 대신, <영혼의 여행>에서 에릭 쿠의 주제의식은 현재의 지평에 펼쳐진 관계의 수평선에서건, 윗대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의 수직선에서건,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과 관계 속에 놓여있기에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인연생기(因緣生起)라는 불교적 가르침의 원환에 닿는다.

 

〈영혼의 여행〉 에릭 쿠 감독
〈영혼의 여행〉 에릭 쿠 감독
〈영혼의 여행〉 에릭 쿠 감독
〈영혼의 여행〉 에릭 쿠 감독

에릭 쿠 감독은 코로나를 거치면서 집 안에만 있어야 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떠올리며 구원과 탈출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 제 살길을 도모함’이 상식마냥 받아들여지는, 모두가 저마다 고립된 섬으로 쪼개져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불우하고 삭막한 풍경 속에서 <영혼의 여행>는 일말의 낭만주의를 머금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다시금 주변의 삶과 존재, 그리고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돌이켜보아야 하지 않는가를 질문한다. 어쩌면 그러한 작은 변화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파국의 현실을 극복할 새로운 희망이 생겨날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