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아장커(贾樟柯 : 1970~ )의 영화는 시간과 기억의 영화이다. 만약 영화역사에 오로지 뤼미에르와 멜리에스의 계보, 즉 카메라에 현실을 투영하는가, 아니면 창조된 극의 서사를 담는가라는 두 가지 선택뿐이라면 그의 미학은 명백히 전자에 속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간의 흘러감을 멈출 수 없지만, 적어도 이미지를 통해 사라진 과거의 흔적들을 새겨 넣음으로서 그 프레임 안에서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우리가 지나쳐온 삶의 시간들 속에서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에 대한 증거를 남길 수는 있다. <소무>(1997)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그의 작품 세계는 희망과 상실이 번갈아 교차하는 중국 자본주의 발전사의 서늘한 인류학적 기록에 다름 아니다.
<풍류일대>(2024)는 제목에서부터 다분히 지아장커답다는 인상을 준다. ‘한 세대(一代)가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갔다‘함이니 그 비감(悲感)한 뉘앙스에서부터 무상(無常)한 세월의 변화를 고스란히 실어내 한 폭의 장대한 풍속화를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가 선연히 묻어난다. 이미 우리는 <산하고인>(2015)과 <강호아녀>(2018)에서 유장한 시간의 길이 속에 인물을 집어넣고 지나쳐가는 풍경 속에 세상의 변화를 압축해 담는 그의 화술을 지켜보아온 바 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풍류일대> 속에 담긴, 층층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지층들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결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16mm와 35mm 필름, 디지털 촬영분 등. 각기 다른 화질과 화면비(가변화면비는 <산하고인>에서 시대 구분을 위해 도입한 바 있다)의 포맷을 혼용한 데에, CGI까지 뒤섞이며 촬영 당시의 시점과 작업환경이 어떠했는가를 바로 드러내는 영상 톤의 불균질함은 112분의 러닝타임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아날로그의 과거에서 디지털의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의 여행으로 만든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하다. 중국 북부의 다퉁(大同)시. 빈(주유)은 댄서와 모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차오차오(자오타오)와 연인 관계이지만, 촌구석에서 일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빈은 큰 일거리를 찾아 차오차오에게 말도 없이 떠난다. 빈이 큰 도시로 떠난 후 연락이 닿지 않자 차오차오는 재회하고자 그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에 오른다. 다통에서 산샤댐 건설로 수몰되어가는 펑지에(奉節)를 거쳐 가다가, 큰 원환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는 순환의 오디세이. 만약 일반적인 드라마 작법이었다면 두 남녀의 굴곡진 인생사와 멜로적 감정선을 전달하기 위한 극적 장치들이 조미료처럼 첨가되었겠지만, 그런 건 지아장커의 관심사가 아니다. 막상 차오차오와 빈이 재회하는 순간도 침묵 끝에 빈이 결별을 고하는 말 한 마디만 던지고 사라지는 식으로 감정의 고이고 흘러넘침을 자제한 채 무심하게 연출된다.
만약 <풍류일대>를 보면서 당혹스러운 기분이 든다면, 당연한 일이다. 두 인물이 처한 일상의 순간들은 파편처럼 산발적으로 던져지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 중심의 작법에 익숙한 관객은 사건의 큰 그림을 잡지 못해 자연스레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대신 제시되는 건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현실에서 건져 올린 끝없는 풍경 이미지, 고프리 레지오의 <포와카시>(Powaqqatsi, 1988)마저 떠올리게 하는 다큐멘터리 푸티지의 연속이다. 마치 로베르 브레송이 ‘이야기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핑계거리’(「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노트」)라 한 말을 실제로 실천하기라도 하듯, 초라하리만치 단출한 스토리라인, 결핍된 서사의 여백을 채우는 것은 두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목격하게 되는, 중국의 인민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풍경이며, 보는 도중에 큰 줄거리와 인물의 인상마저 뇌리에서 반쯤 지워질 지경이 되도록 지아장커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도 그 안에 있다.

사실 이 영화의 분열적인 성격은 작업 방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지아장커는 자신의 초기작인 <임소요>(2002)와 <스틸 라이프>(2006), 그리고 <강호아녀>를 만들었던 당시에 촬영한 푸티지를 다시 발굴하고는 이를 바탕삼아 하나의 내러티브로 엮어내고, 각 영화의 사이에 쓰이지 않은 이야기와 장면이 있는 것처럼 보강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전체의 3분의 2 가량이 예전 작품을 위해 촬영한 분량들이고 포맷과 화면비가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소요>와 <강호아녀>에서도 차오차오와 빈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공통분모처럼 등장하지만, 감독의 영원한 뮤즈, 배우이자 아내인 자오타오의 차오차오 말고 빈은 매번 배우가 바뀌었고, 각 이야기 간에 시리즈로서의 연결성도 전혀 존재하지 않아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라 보는 것이 옳다. 억지스러운 면면에도 불구하고 <풍류일대>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했던 건, <임소요>를 찍은 이래 20여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의 불확실성에 불안해하고 방황하던 청년이 어느새 따라가기 어려운 세태의 변화에 체념해버린 중늙은이가 되기 충분했던, 그 세월 동안 있었던 중국 사회와 인민 삶의 변화를 통사(通史)로 한데 아울러 돌이켜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청년 시절을 보냈던 시절의 다통은 깡촌이나 다름없었지만, 초로(初老)의 중년이 된 빈이 일거리를 찾아 돌아올 즈음에는 깔끔히 정비된 신시가지가 되어있고, 차오차오는 젊은이들의 러닝크루 대열에 끼어서 함께 달린다. 과거에는 강당에 마을 사람들과 모여서 다 함께 노래 부르고 담배 피우고 술을 나눠 마시며 공동체의 활기를 만끽했다면, 마트 가판대에서 일하게 된 중년의 차오차오는 매장의 인공지능 로봇를 친구 삼아 놀고 있다. 빈을 찾아가던 여행의 도중에는 중국의 우주 개발과 미래의 청사진에 대한 낙관어린 전망이 방송을 타고 들려오는데, 이러한 발전상의 이면에는 차오차오가 산샤를 지나오면서 목격하게 되는, 아마도 중국 각지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을 재개발을 위한 파괴가 있다. 지아장커가 보기에 중국은 가건물(假建物)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자본은 항상 깔끔하고 최신인 것들로 공간을 재단장하고는, 그 경이로움을 위한 밑바탕이 되었던 과거의 남루한 것들을 시선의 바깥으로 치워버리려고 한다. 번영을 구가하는 지금의 풍경도 다음 세대에는 어떤 식으로 변할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 지속적인 불안정의 재생산.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조각배와도 같은 인민의 삶은 파도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수차례 존재의 위기를 맞고, 그때마다 정체성을 달리하며 파란의 세월을 견디어갈 따름이다.

중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꾸준히 카메라에 담아왔음에도 지아장커는 그에 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직접적인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진 않으려 한다. 경력 내내 그는 파괴와 상실의 현실을 보여주지만, 가치 판단은 가능한 관객의 몫으로 남기는 절제로 일관해왔다. 그럼에도 그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옹호하는 건, 그 모든 변화, 거칠고 모진 세파(世波)가 있었음에도 끝끝내 가라앉지 않고, 어떻게든 적응하며 고난을 헤치고 꿋꿋이 자아와 존엄을 지켜내는 풀뿌리 민초(民草)의 강인함, 그 인간적 가치이다. 감독의 페르소나 자오타오의 덤덤한 듯 하면서도 결연함이 깃든 표정은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버티어내며 살아내고, 또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민초의 의지를 대변하듯 오롯이 빛난다. 앞으로도 삶은 이어지고, 자본의 욕망에 따라 세상의 추이는 변한다. 부서진 폐가의 잔해 위에 마천루와 아파트가 솟아오르고, 또 무너지고 세워지길 반복하겠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긴 건 바로 저 백성들이야”(구로사와 아키라, <7인의 사무라이>(1954)의 마지막 대사)라는 점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