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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에서 건진 영화들①] 구로사와 기요시의 〈클라우드〉, 야쿠쇼 코지의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안티테제

씨네플레이
〈클라우드〉
〈클라우드〉

 

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 : 1955~ )는 호러든 드라마든, 장편이든 단편이든 TV극이든 장르와 부문을 가리지 않고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다작(多作)의 작가이지만, 리메이크판 <뱀의 길>(2024)과 베를린 국제영화제 특별상영부문에 초청된 중편 <차임>(2024), 그리고 <클라우드>(2024)를 잇달아 발표하며, 그중 두 작품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온 올해는 그의 창조적 에너지가 일거에 폭발한 해로 기억될 법하다. <스파이의 아내>(2020)를 발표한 이후 코로나 때문에 현장 작업을 쉬면서 각본에 전념하다, 상황이 호전되자 일본과 프랑스를 종횡무진 오가며 왕성한 창작욕을 발휘한 그의 두 신작은 각각 다른 성격의 인물과 사건을 그리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과 음습한 무드에 휩싸인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큐어>(1997)와 <회로>(2001)에서 절정에 달했던, 일본사회의 일상 속에 감도는 암울한 세기말적 분위기는 그로부터 20년 넘게 지난 현재를 배경삼는 <클라우드>에서도 여전히 도저하게 포착된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버블경제가 붕괴한 여파를 맞아야했던 시기가 다른 한 편으로는 일본 호러 영화의 전성기였던 건, 이 장르가 사람들의 가슴을 채우고 있던, 더 이상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내밀한 불안감에 조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은 이후에도 일본의 경제는 다시는 고도성장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 채 침체 일로를 걸었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제성장의 열매를 맛볼 수 없던 세대가 성장해 이제 성년이 되었다. 기나긴 세기말의 연장. <클라우드>는 그런 시대를 사는 청년을 그린 영화이다.

〈뱀의 길〉
〈뱀의 길〉
〈스파이의 아내〉
〈스파이의 아내〉

 

요시이(스다 마사키)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사장에게서 요즘 사람답지 않게 성실하다는 평판을 듣는 청년이다. 하지만, 그의 주 수입원은 저가로 대량매입한 물건을 집에다 쌓아놓고 몇 배의 가격으로 올려 되팔아치우는 (일본어로 ‘텐바이야’(転売ヤー)라 부르는) 전문 리셀러 활동에서 나온다. 영화는 ‘라텔’이라는 닉네임의 악질 리셀러로서 폭리를 취하는 요시이의 수법을 비추며 막을 연다. 트럭을 끌고 와 팔리지 않는 의료기기 재고를 대량으로 매입하지만 폐기비용도 자신이 부담하는 거라며 원가를 한참 밑도는 푼돈을 내던져주고는, 정작 자신이 팔 때는 정상판매가보다 낮지만 실제 매입한 돈의 수십배는 되는 가격으로 판매 사이트에 올려 완판시키는 식의 전략. 뻔뻔함을 무기 삼아 남의 출혈을 강요하고 부당한 이득을 보는 이런 상술이 피해자의 원한을 사지 않을 리 만무하다. 사업을 확장하고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 부하 직원을 채용하면서 요시이는 승승장구하지만, 그에 비례하듯 라텔의 악명 또한 자자해지고, 점점 그의 주변에서는 수상한 일이 벌어지며 종국에 있을 파국을 예고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요시이를 둘러싼 주변의 사소한 일상적 풍경들은 불길한 무드를 머금은 공포의 장으로 화(化)한다. 클로즈업을 절제하고 실내에서 롱숏을 주로 구사하는 촬영기조는 어두운 숲의 그늘처럼 구석구석이 암부에 침식된 공간의 조명 설계와 엮이면서 감독 특유의 독특한 공포감 연출을 뒷받침하는데 여기에서 롱숏은 단순히 넓은 풍경을 포착하기 위한 통속적이고 과시적인 목적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다. 기요시 영화에서 롱숏의 거리감은 실내 배경 전체의 구도와 양상을 넉넉히 아우르되, 동시에 배우의 얼굴이 분명히 식별될 수 있는 두 기능성 사이의 균형점을 맞추는 선에 머물며, 카메라가 공간에 처해있는 인물의 동선과 벌어지는 상황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자 호흡을 길게 유지하고 움직임을 끌고 가는데서 모종의 리듬감과 무드가 생겨난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채 지속되는 정적과 침묵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긴장과 불안을 한껏 고조시키며, 느닷없이 들이닥치게 될 돌발 상황의 심리적 충격을 강화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클라우드〉 구로사와 기요시
〈클라우드〉 구로사와 기요시

 

​<클라우드>에서 기요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지난 세기를 떠받쳐왔던 일본적 가치가 붕괴하는 현실에 있다. 도입부에서 라텔이 사재기해간 팔리지 않던 의료기기의 악성 재고는 후반부의 버려진 공장으로 대구를 이루듯 이어져 오랜 불황의 여파가 있었음을 증거하며, 공장 사장(아라카와 요시요시)이 직장을 그만두고자 하는 요시이를 붙잡고자 설득하는 말들은 한 직장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머무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잇쇼켄메이(一生懸命)와 연공서열(年功序列)로 대변되는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다음 세대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세대 간의 차이와 괴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안정성이나 장기적인 비전이 없는 건 매한가지이니 요시이가 선택한 건 선배 무라오카(쿠보타 마사타카)가 가르쳐준 전업 리셀러의 길인데, 동업과 도움을 요청하는 선배의 제안을 뿌리치거나 부하직원 사노(오쿠다이라 다이켄)을 자르는 등의 행동에선 조직 문화와 일체감, 협동을 우선시했던 과거 일본 사회의 공동체 지향성이 다음 세대의 관계 문화에서는 무너져가고 있음이 드러난다.

 

요시이가 손쉬우면서 더 많은 벌이를 찾는 건 아키코(후루카와 코토네)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더 넓은 집, 넉넉한 경제적 환경에 대한 갈망 등, 사랑은 더 나은 삶,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욕망을 추동한다. 직장 생활(현재 일본에서 정규직은 정작 연봉이 오르거나 보상은 적은데 책임과 일만 더 늘어난다는 이유로 기피되는 경향이 있다.)로 받는 봉급만으로는 아키코가 원하는 삶을 줄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아키코와의 단란한 가정, 그녀가 일하지 않아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자 더더욱 악성 리셀러 짓에 매달리는데, 정작 연정의 대상인 아키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노를 유혹하거나 시골 생활이 따분하다며(작중 차 번호판을 보면 이사한 집이 도쿄에 인접한 수도권이긴 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의 배경이 된 깡촌 나가노시에 인접한 군마현 쪽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론 도시화된 지역이지만 일본 내에선 벽지라는 인상이 강하다.) 일시적인 가출을 하다가 나중엔 자신이 원한 건 요시이가 아니라 오로지 돈이었다는 속내를 밝히면서,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마저 지금의 일본사회에서는 환상이 되어버렸음을 실토하고 만다.

 

 

〈클라우드〉
〈클라우드〉

그런 점에서 <클라우드>는 감독이 의도한 결과는 아니겠지만 <퍼펙트 데이즈>(2023)에 대한 안티테제와도 같은 성격을 갖는다. 빔 벤더스가 사라져가는 지난 시대의 일본적 가치와 미감(美感)을 표상하던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에 집중하면서 타카시(에모토 토키오)와 그의 애인의 생활은 세세한 면면을 드러낼 여지를 갖지 못했는데, 기요시는 바로 그 젊은 세대의 인간 군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본격적인 액션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는 연출의 변을 밝혔지만 기요시의 관심은 대중영화의 관습적인 줄거리와 표현의 통속성이 아니라, 이를 구실삼아 펼쳐지는 사회의 공포스러운 일면들에 있다. 기요시에게 있어 영화란 관객에게 일시적인 허구의 위안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극한으로부터 칼날같이 날카로운 쐐기를 찾아내’(수상자가 없었던 2021년 오시마 나기사 상 시상의 코멘트) 회복불가능한 사회의 상처를 들추어내고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계몽의 실천이다. <클라우드>는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 연재는 계속됩니다. 조재휘 평론가의 두번째 선정작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인 에릭 쿠의 <영혼의 여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