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정전>(1990)의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문 양조위가 외출을 준비하는 낡은 집 장면이 바로 구룡성채(九龍城寨)에서 촬영됐다. <성항기병>(1984)에서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주인공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바로 구룡성채였다. 홍콩영화 마니아였던 뤽 베송 감독이 <성항기병>의 이 마지막 장면에 매혹되어 <레옹>(1994)의 클라이맥스 아파트 탈출 장면을 만들었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의 도시 이미지가 구룡성채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도 유명하다. 1993년 강제 재개발에 들어가 이제는 ‘구룡성채 공원’으로 남아있는 이곳은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울한 불법 집단 거주지역이었다. 역사가 청나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곳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뒤에도 계속 중국의 통치하에 남겨뒀고, 결국 외지인들과 삼합회가 가득한 채, 영국과 중국 두 나라의 통치를 전혀 받지 않는 무법지대가 됐다. 그렇게 점점 건물이 덕지덕지 붙고 늘어나, <구룡성채: 무법지대>에도 크나큰 영감을 제공한 그렉 지라르의 사진집 「City of Darkness」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사진집과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곳에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정 바오루이 감독과 구룡성채의 만남은 필연일까. <구교구>(2006), <군계>(2007) 등 ‘어둠의 액션’에 관한 한 남다른 터치를 보여준 정 바오루이 감독이, 어쩌면 그 어둠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좋을 ‘마계촌’ 구룡성채를 주 무대로 삼은 <구룡성채: 무법지대>를 내놓았다. 올해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 초청을 시작으로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한국 관객과도 만났다. 내용은 이렇다. 1980년대,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동시에 사회, 경제적으로 혼돈의 시대를 보내고 있던 홍콩. 찬록쿤(임봉)이라는 남자가 빅보스(홍금보)가 이끄는 갱단에게 쫓기던 도중 우연히 구룡성채로 몸을 피한다. 구룡성채는 사이클론(고천락)이 이끌고 그 뒤를 받치는 세 남자 신이(유준겸) 십이소(호자동), AV(장문걸)의 조직이 지배하고 있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구룡성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이들의 도움으로 찬록쿤은 구룡성채 생활에 적응하게 되나, 그를 잡으려고 구룡성채로 진입하려는 악당들의 위협은 점점 더 거세진다.

홍콩영화 팬들에게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홍콩 액션영화의 ‘부활’과 ‘향수’ 모두를 느끼게 해준다. 찬록쿤이 구룡성채로 들어가기 직전, 마치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1985)에서의 명장면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이 2층 버스에서 창문을 뚫고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이 펼쳐진다. 어쩌면 그때부터 ‘폴리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 구룡성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란 신호와도 같다. 게다가 이때 침입자들을 막아서는 인물은 마치 <천장지구>(1990)처럼 오토바이를 탄 앤디 라우(유덕화)가 아니라 테렌스 라우(유준겸)다. 심지어 유준겸은 최근 영화 <아니타>(2022)에서 장국영을 연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며, 경기공을 구사하며 구룡성채를 ‘접수’하려는 빌런(오윤룡)이 카라오케로 부르는 노래도 장국영의 ‘모니카’다. 또한 그들은 고천락에 이어 ‘홍콩영화의 대부’ 홍금보까지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오래전 홍콩영화 최전성기를 열었던 인물 중 하나다. 심지어 오윤룡은 <용쟁호투: 전설의 시작>(Birth of the Dragon, 龍之誕生, 2016)에서 이소룡을 연기한 배우이기도 하다. 이처럼 구룡성채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그렇고 성룡, 유덕화, 장국영, 홍금보, 이소룡에 이르기까지 홍콩영화 팬들로 하여금 단숨에 추억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액션 연출은 더더욱 놀랍다. 지난 시간 특수효과에 매몰되어 본질을 도외시했던 여러 홍콩영화들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그를 최소화하고 쉼 없는 액션의 연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구룡성채 내부의 이곳저곳을 최대한 활용하고 맨손 액션에 더해 다양한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액션영화의 패러다임을 뒤바꿔놓을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몇 해 전, 역시 구룡성채를 배경으로 삼았던 왕정 감독, 견자단과 유덕화 주연 <추룡>(2017)과 비교해도 프로덕션 디자인과 액션 디자인의 퀄리티는 압도적이다. 리얼한 액션의 경연장이 아니라 무수한 고수들이 득시글대는 ‘무림’이나 ‘강호’처럼 구룡성채를 묘사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치 홍콩의 축소판이라고 불러도 좋을 구룡성채에 대한 묘사를 통해, 결국 그곳을 묵묵히 채우고 살았던 ‘사람’들을 따뜻하게 묘사한다. 정 바오루이 감독을 이제 ‘대가’라 불러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와 지금의 홍콩영화가 해낼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뽑아냈다.

정 바오루이 감독은 두기봉 감독이 이끄는 영화사 ‘밀키웨이 이미지’에서 성장해 <엑시던트>(2009), <모터웨이: 분노의 질주>(2012) 등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드러냈고 <몽키킹: 손오공의 탄생>(2014) 등 <몽키킹> 시리즈로 중국 본토 박스오피스도 점령했다. 그처럼 어느새 2000년대 홍콩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큼 올라선 그가, 1980년대 홍콩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씬 시티’ 구룡성채를 배경으로, 숨돌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과몰입 액션영화를 만들었다. ‘홍콩 액션영화의 화려한 부활’이라는 평가를 단박에 수긍하게 만드는, 도파민 폭발 액션영화로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았던 정 바오루이 감독과의 인터뷰를 덧붙인다.

홍콩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최근 많은 홍콩영화들이 1980년대를 주목하고 있다. 나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시절 어둠의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면서 거꾸로 내가 성장한 그 시절의 홍콩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됐다. 1980년대의 홍콩은 굉장히 독특하고 매력적인 곳이었다. 작지만 많은 걸 이뤄냈으며 무엇보다 ‘영화’의 전성기였다.
<구룡성채: 무법지대>는 언뜻 당신의 전작들인 <구교구>나 <군계>처럼 인물들을 극한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액션영화처럼 보였지만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장풍’ 등 거의 무협지처럼 판타지에 가까운 화려한 액션이 펼쳐진다.
이번 작품은 언제나 함께 한 황위량 무술감독이 아니라, 타니가키 겐지 무술감독과 함께 했다. <특수경찰: 스페셜 ID>(2013) 등 견자단과 여러 편을 함께 했고, 나와는 <몽키 킹>(2014)을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물론 리얼한 스트리트 파이팅 안무의 대가라 할 수 있는 황위량 무술감독이 언제나 내게 1순위 무술감독인 것은 변함이 없다. 다만 이번 작품은 조금 더 기교를 부리고 과장되게 액션을 디자인해서 보다 만화적인 액션 연출을 하고 싶었다. 격투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컨셉을 그렇게 가져가고 싶어서 타니가키 겐지와 함께 했다. 게다가 유준겸 배우를 비롯해 액션 경험이 부족한 젊은 배우들을 트레이닝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해줬다.

클라이맥스 옥상 액션신을 거의 20일 동안 찍었다고 들었다. 아마 관객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 액션의 강도가 그대로 느껴진다.
25분 정도로 분량을 잡고 시작했다. 액션 연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견자단 배우와도 여러 편을 함께 했지만, 이번 영화의 배우들은 견자단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했다. (웃음) 그래서 보다 꼼꼼하고 주의를 들여 액션신을 연출했고, 그러다 보니 굉장히 긴 시간이 들긴 했다. 배우의 상태가 캐릭터의 상태와 최대한 비슷할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배우와 제작진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에서, 극도로 배우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까지 영화에 담아냈다. 최종적으로 액션을 하는 배우와 그를 지켜보는 관객이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까지 가고 싶었다.
구룡성채에서 빌런을 연기한 오윤룡 배우가 장국영의 노래 ‘모니카’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그 노래를 부른 배우는 아니지만 구룡성채를 지키고자 하는 ‘신이’ 역의 유준겸 배우는 영화 <아니타>(2021)에서 장국영을 연기한 배우이기도 하다.
나는 장국영의 광팬이다. 그리고 그즈음의 엄청난 히트곡이기도 했다. 당시 홍콩의 남녀노소 다 좋아한 곳이었으니, 그런 악당도 좋아했을 것이다.(웃음) 가사 중에 ‘누가 너를 대체할 수 있냐’는 가사가 나오는데, 그걸 빌런의 입을 통해 ‘누가 나를 대체할 수 있냐’로 바꿨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가진 두기봉 감독은 당신의 영원한 멘토라 할 수 있다. 가령 이미 장편 데뷔한 뒤에도 당신은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2) 촬영현장에서 확성기를 들고 연출부, 정확하게는 ‘Second Unit Director’로 뛰어다녔다. 당신에게 두기봉 감독과 밀키웨이 영화사는 남다른 의미일 것 같다.
맞다, 두기봉 감독님은 내 영화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다른 제작사와도 작업하고 있는데, 종종 영화사를 들른다. 두 감독님이 호출하면 언제든 간다. 그럴 때마다 다시 영화를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것 같고 두 감독님은 교장 선생님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언제나 엄격하셨고 한 번도 ‘합격’이라고 하신 적 없다. 창작자로서 만족을 모르시는 분이다. 밀키웨이는 설립 이념 자체가 창작자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이었고, 언제나 든든하게 보호받고 지원받으며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었다. 앞서 <운명>(2022)이라는 영화를 밀키웨이에서 만들었는데,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한 번도 예산 초과에 대해 지적하지 않으셨다.
홍콩영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에필로그를 보고 울컥할 수밖에 없다. 당시 구룡성채에는 아침마다 누들 반죽을 하고 에그타르트를 만들며 돼지고기를 삶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엔딩 장면이 여운이 길게 남는다. 어쩌면 액션 누아르 장르에 대한 추구를 초월하는 의미를 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1980년대 홍콩의 치외법권 지대로 남아 있던 구룡성채라는 공간의 어두운 면에만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범죄가 일어나는 장소였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점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제작비의 절반 가까이 구룡성채 재현에 썼고, 직접 그곳에서 살았던 원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제작했다. 홍콩을 향한 나의 변함없는 사랑을 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