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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떠오르는 5가지 생각

씨네플레이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워졌을 무렵 이 콘텐츠를 기획했다. 낮엔 더웠지만 밤공기가 달라졌음을 느끼던 시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유독 더웠던 여름 탓일까, 냉랭하게 느껴지는 건조한 가을 공기마저 기분 좋게 느껴진다. ‘덥다’라는 감각이 가시자, 이성이 활개를 친다. 
 

가을은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계절, 이라는 표현은 이래서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은 단풍으로 물들어 가며, 거리에는 낙엽이 흩날리는 시기. 이 계절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책을 읽거나 따뜻한 음식으로 마음을 달래고 싶어진다. 이번에는 가을 정취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는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서부터 사색, 고독, 음식 그리고 단풍까지, 키워드를 통해 가을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나보자. 만약 가을마다 즐기는 나만의 영화가 있다면 댓글로 추천해주시길.
 



<독서 - 토니 타키타니>
 

〈토니 타키타니〉(2005)
〈토니 타키타니〉(2005)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니 타키타니>는 독특한 서사 구조와 미니멀리즘한 연출로 마니아층을 탄탄히 쌓은 작품이다. 토니 타키타니(오가타 잇세이)는 어릴 적부터 고독에 익숙한 인물로, 타인과의 깊은 교류 없이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그는 옷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여자 에이코(미야자와 리에)를 만나게 되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에 변화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내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다시 혼자가 된 토니의 깊은 상실감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다. <토니 타키타니>를 ‘고독’ 키워드에 넣을까, 무척 고민이 많았으나 결국 독서에 넣었다.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는 아니고, 토니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영화의 연출이 마치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느낌을 줘서다. 책장을 넘기듯, 단방향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독특한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와 문학 작품을 동시에 보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토니 타키타니〉(2005)
〈토니 타키타니〉(2005)


영화는 내레이션과 정적인 화면 구성으로 토니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과도한 감정 표현이나 극적인 전개 없이도 인물의 심리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데, 특히 화면 전환과 음악 사용은 시간의 흐름과 감정 변화를 이어주며 영화와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장치 역할을 한다. 공간의 여백과 반복되는 일상, 고요한 사운드와 절제된 배우들의 연기는 그의 내면세계를 대변하며 정적인 연출은 마치 문장과 문장 사이 작은 여백처럼 보인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바쁜 일상으로 인해 책 한 권 완독이 부담스럽다면 <토니 타키타니>를 추천한다. 영화와 문학이 교차하는 새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색 - 원더풀 라이프> 
 

〈원더풀 라이프〉(1998)
〈원더풀 라이프〉(1998)


“운명처럼 다가오는 영화가 있다"라는 평가로 이동진 평론가가 극찬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원더풀 라이프>는 1998년작으로 사후 세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사람들이 사후 일주일 동안 머무르는 중간역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한순간을 선택해야 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선택한 기억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영상으로 재현되며, 그들은 그 기억만을 갖고 천국으로 떠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 덕분에 이동진 평론가가 “생의 마지막 날 보고 싶은 영화"로 꼽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중간역 림보에 도착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진행된다. 각기 다른 배경과 인생을 살아온 이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을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기도 한다. 특정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림보의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직원 모치즈키 타카시(이우라 아라타)는 자신의 삶에 특별한 기억이 없다고 생각해 림보에 남아있는 인물이지만, 이윽고 자신도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원더풀 라이프〉(1998)
〈원더풀 라이프〉(1998)


“만약 나라면 어떤 기억을 고를까.” 영화의 막이 내리는 순간, 관객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에 답하며 사색을 시작한다. 영화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나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깨닫게 하며, 이는 곧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난 ‘나만의 행복’ 즉, 행복의 본질을 사유하게 만든다. 영화 속 인물들이 기억을 선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같다. 관객은 다큐멘터리처럼 자신의 실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의 아주 단편적이고 일상적인 순간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름다운 인생, 즉 뷰티풀 라이프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원더풀 라이프>는 깊어가는 가을, 사색의 시간을 관객에게 선물할 것이다. 
 



<고독 - 환상의 빛>

 

〈환상의 빛〉(1995)
〈환상의 빛〉(1995)


‘고독’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많지만, 겨울의 비참한 혹은 비극적인 고독이 아닌 가을의 쓸쓸하고 조용한 고독과 닮은 영화를 고르다보니 또 다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다.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감독의 데뷔작으로 1995년에 개봉했다. 삶과 죽음, 그리고 고독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으로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 이후 겪는 주인공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내면과 고독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유미코가 할머니를 쫓아가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학창 시절 고향집으로 간 할머니가 그대로 행방불명되고, 이에 유미코는 늘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을 안고 산다. 시간이 흘러, 그는 동네 친구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와 결혼해 아들 유이치를 키우며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이쿠오는 예고 없이 목숨을 끊고 유미코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과 슬픔에 빠진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그는 새로운 사람과 재혼하여 다른 곳에서 살아가지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고독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다. 
 

〈환상의 빛〉(1995)
〈환상의 빛〉(1995)


영화는 유미코의 고독을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부각시킨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 그리고 한적한 길들은 유미코의 마음속 공허함을 상징하며 긴 침묵, 그리고 여백이 많은 시각적 이미지는 그가 겪고 있는 상실감을 관객에게 대사 없이 전달한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자살로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유가족은 ‘만약에’를 떨치기 어렵다. ‘만약에 내가 그때 화내지 않았더라면’, ‘더 잘해줬더라면’. 돌아오지 않는 ‘만약’을 끝없이 늘어놓으며 깊어가는 자기혐오는 결국 남은 가족의 삶의 의미까지 퇴색시키고 만다. 유미코 역시 남편의 죽음 이후 언제 소중한 이가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죄책감, 무력감으로 고요한 슬픔에 잠겨 있지만 결국 고독을 받아들인다. 넘실대는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눈물조차 흘리지 않던 그가 결국에 울음을 토해내는 장면은, 상실로 인한 고독을 경험한 이들에게 공감의 손길을 건넨다. 
 



<음식 - 식물도감>

 

〈식물도감〉(2016)
〈식물도감〉(2016)


아리카와 히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식물도감>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잘생긴 노숙자를 집에 데려와버렸다! 여차저차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그가 부자?”라는 전형적인 순정만화 전개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영화 속 제철 음식 덕분이다. 들판에서 채집한 재료로 만든 파스타, 꽃잎을 곁들인 샐러드, 고사리 무침 등 영화는 초록초록한 음식이 주는 싱그러움과 생명력을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아낸다. 특히 채소 음식 중심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깊숙한 시골 산속이 아닌 도심 한복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며 강변에서 얼핏 보이는 나물들로 음식을 만들어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근교로 나들이를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식물도감〉(2016)
〈식물도감〉(2016)


주인공 사야카(타카하타 미츠키)는 일상에 지친 회사원으로 어느 날 집 앞에 있는 수수께끼의 남자 이츠키(이와타 타카노리)를 발견한다. “아가씨, 나를 주워주지 않을래요? 물지도 않고 착하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어필하는 이츠키를 일단 집으로 들인 사야카는 그와 함께 지내며 점차 행복을 알아간다. 상사의 잔소리와 온기 없는 집, 늘 차갑게 식은 인스턴트 음식, 그리고 붐비는 도시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 잿빛 일상을 보내던 사야카에게 이츠키는 직접 딴 재료로 요리를 하는 즐거움을 알려준다. 아기자기한 도시락에 문을 열면 누군가 나를 반겨주고 있다. 사야카는 이츠키와 함께 하는 요리를 통해 일상을 천천히 덥히며 생기를 되찾아간다.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일본 순정 만화 감수성이지 않을까. 영화 속 요리들을 좀 더 보여줬으면, 싶을 정도로 맛깔난 요리에 반해 로맨스는 상투적이다. 우연하게 사랑에 빠지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하고 결국엔 눈물겨운 재회를 하는 전형적인 로맨스 서사를 따르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순정만화같은 대사는 약간의 사족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음식 영화 중 ‘식물도감’을 선정한 건 머위 밥, 호장근볶음 등 보는 내내 따끈한 밥이 생각나는 건강한 음식들 때문이다. ‘아가씨’라는 대사를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민 없이 보길 추천하는 작품. 
 



<단풍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판타스틱 Mr. 폭스〉(2009)
〈판타스틱 Mr. 폭스〉(2009)


단풍 영화하면 저마다 떠오르는 영화들이 하나씩 있을 테다. 누군가는 <가을로>를 떠올리며 한국의 단풍을, 또 다른 누군가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뉴욕의 가을을 그릴 것이다. 수많은 단풍들을 뒤로하고, 웨스 앤더슨 감독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Mr. 폭스>를 가져온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가을을 녹인 듯한 색감이다. 영화 전반 오렌지와 브라운 계열의 컬러 팔레트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황금빛 들판, 붉게 물든 나무, 낙엽이 흩날리는 숲 등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경이 스톱모션 특유의 질감과 어우러져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색감 사용은 배경을 넘어 캐릭터의 의상과 소품, 심지어 조명과 그림자에까지 세심하게 반영되어있다. 웨스 앤더슨의 완벽하고 치밀한 미장센에 혀를 내두를 정도.  
 

〈판타스틱 Mr. 폭스〉(2009)
〈판타스틱 Mr. 폭스〉(2009)


영화 주인공 Mr. 폭스(조지 클루니)는 가족과 함께 굴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과거 도둑질을 하며 먹고살던 주인공은 아내 Mrs. 폭스가 임신한 이후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아내와의 약속대로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던 그이지만 굴에서 지내는 게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 억눌러 온 야생 본능이 그를 안전한 굴이 아닌, 위험한 들판으로 내몬다. 지상엔 여우를 사냥하기 위해 눈을 번들거리는 인간 농장주들이 있고, Mr. 폭스는 동료들을 꼬드겨 인간과 대립한다. 스토리를 굉장히 플랫하게 소개했지만 작품은 동물을 의인화해 대놓고 우화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질투와 시기, ‘나’라는 본질과 같은 개인의 사상부터 환경 오염, 집단 이기주의 등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문제들까지 풍자한다. 만약 웨스 앤더슨 영화가 취향에 안 맞았더라도 이 영화만큼은 보길 추천한다. 기발한 전개에 리드미컬하게 속도감 있는 연출, 거기다 조지 클루니, 메릴 스트립과 같은 대배우의 목소리까지. 약속을 어기고 도둑질하겠다는 말을 조지 클루니 목소리로 하니,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온통 단풍색으로 물든 기묘한 동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단연코 봐야 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