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은 너무 멀어 언제나 타인의 것이라고, 달아나고 미화해서 회피해 보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한 뼘도 달아날 수 없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그것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룸 넥스트 도어>는 회피하기 바빴던 죽음에 정면으로 마주 선다. 두 친구의 대화로 죽음에 대한 침묵을 깨뜨리고, 존엄을 지키며 생의 무대에서 퇴장하고자 하는 한 인간을 비추며 능동적 죽음을 긍정한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종종 종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인간다운 죽음까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룸 넥스트 도어>는 내가 죽는 순간 옆방에 동행할 친구 한 명이 있다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죽음은 가능할 것이라고,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줄 것(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이라고 전망한다.
스스로 삶을 끝내기로 결심한 한 사람

베스트셀러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신간 출판 기념 사인회에서 젊은 시절 뉴욕 잡지사에서 일하며 우정을 나눴던 마사(틸다 스윈튼)의 근황을 듣는다. 세계 곳곳을 누비는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마사가 현재 수술로도 손쓸 도리가 없는 자궁경부암 3기 환자라는 것. 한걸음에 옛 친구를 찾은 잉그리드는 마사의 집과 암센터를 왕래하며 소식이 두절된 채 살아온 수십 년의 공백을 끝없는 대화로 채운다. 두 사람이 공유했던 남자친구 데이미언(존 터투로), 관계가 소원한 마사의 딸 미쉘, 전쟁의 여파로 인한 미쉘 생부의 죽음,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만났던 동성 수사의 러브스토리로 시작된 대화는 에드워드 호퍼,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버스터 키튼 등 이제 사라지고 없는 작가까지 소환한다. 개인적 회고에서 출발한 대화는 예술과 지구로 확장되고 해후한 두 친구는 예술의 목적과 가치, 시대의 상처와 질문들을 유쾌하고 거침없이 헤집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잉그리드와 만나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마사는 친구에게 중대한 결심을 털어놓는다. 희망 없는 치료에 매달리는 대신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택하겠다는 결심이다.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면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의미다. 약물을 이용해 존엄하게 죽음을 맞겠다는 마사의 생각은 확고하다. 재고하라는 친구의 설득을 마사는 자신이 죽어 갈 동안 옆방에 머물러 달라는 부탁으로 응수한다. 전장을 누비던 시절부터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직면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행이 존재했다는 이유다. 오랜 친구의 소원을 거절할 수 없던 잉그리드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지낼 뉴욕 교외의 별장으로 향한다.

의지를 행사할 도구를 손에 쥔 마사는 외롭거나 수치스럽거나 혹은 끔찍한 종말을 맞으리란 두려움을 덜어낸다. 빛이 쏟아지는 따뜻한 집과 그것을 둘러싼 울창한 숲, 평화로운 새의 노래. 안전하고 고통 없이 예측 가능한 결과로 이어지는 죽음에 대한 비전이,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는 안심이 희망이 되고 마사는 차분히 마지막을 준비한다.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마사의 방문부터 확인한다. '닫힌 문'은 마사의 죽음을 뜻하는 이들 사이의 표식이다. 얼마 안 가 닫힐 방문이, 닥쳐올 죽음이 두렵다가도 친구와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을 잉그리드는 햇살이 쏟아지는 선베드에서, 새소리가 들려오는 밤의 장막 아래에서 듣고 또 듣는다. 언제나 말하는 쪽은 마사고, 듣는 쪽은 잉그리드다. 좋은 죽음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 잉그리드는 기꺼이 곁을 내어주고 공감하며 마지막을 함께한다.
현대 예술사의 유물들로 콜라주한 총천연색 상실

'마사'라는 개인의 마지막을 관조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전쟁과 기후 위기 등 시종 죽음의 이미지를 앞세우지만, 역설적으로 화면은 빛나는 생의 감각과 색들로 가득하다. 영화의 원작인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가 스크린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색깔들이 속속 입혀지는데, 뉴욕의 빌딩 숲 사이로 쏟아지는 원색의 강렬함은 이 영화가 알모도바르의 연출작임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인장이다. "침울한 분위기 대신 빛과 생명력이 충만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따라 보색 대비를 맞춘 듯한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의 의상과 화려한 인테리어 컬러를 즐기다 보면 나의 마지막을 함께할 색상을 자연스레 상상해 보게 된다.

영화는 현대 예술사의 주요 작품을 등장시켜 주제를 드러내는 정교한 미장센을 구축한다. 먼저 그간 앙리 마티스나 파블로 피카소의 화풍에 비유된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이번 작품에서 소환한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다. 처음엔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던 잉그리드가 마사와 내밀한 대화를 나눈 끝에 부탁을 수락하게 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두 친구가 도시를 떠나 도착한 숲속 집에 놓인 선베드로 이어진다. 이 그림은 영화 후반부 결정적인 장면에 배우의 몸으로 재현되며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죽은 사람들」의 구절 또한 평온한 생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장치 중 하나다. 영화 초반 두 친구가 병실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마사의 목소리로, 숲속 집에서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잉그리드의 목소리로 변주되어 낭독되는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는 어떠한 생명이라도 필연적으로 종착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은유다. 언젠가 이 삶도 멈추리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잉그리드가 “비극 속에서 사는 방법은 아주 많거든. 당연히 고통스럽지. 하지만 견딜 수 있어”라고 희망을 내보인 이유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크리스티나 가르시아 로데로의 작품 또한 두 친구의 어깨너머 화면 중앙에 출현한다. 마사의 집에 걸린 흑백 사진에는 고인과의 인연이 없는 장례식에서도 애도를 위해 검은 옷을 입고 베일을 쓴 채 울음을 나누는 스페인의 장례 문화가 담겨 있다. 이는 “다른 말없이 그저 함께하고 옆에 있어주는 것. 고통과 환희의 순간에 동행하는 것. 누군가와 동행하는 너그러움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이로운 감정”이라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연출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치다.
<룸 넥스트 도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영화다. 노쇠한 육체, 병과 전쟁이 야기한 죽음 앞, 서로 다른 세대의 인물이 교차하고 유대하는 모습을 담은 <페인 앤 글로리>(2019), <패러렐 마더스)(2021)와 함께 '죽음 3부작'으로 명명될 만하다.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