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름한 차림의 남녀가 캐리어를 끌고 골목길을 올라간다. 다 쓰러져 가는 모텔에 들어간다. 남자는 욕실서 어딘가 조금 모자라 보이는 여자의 등을 밀어준다. 깨끗이 씻은 걸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시장에서 새 옷도 사준다. 그리고 들어선 사무실. 탁자 반대편에는 남자 한 명이 앉아 있다. 브로커가 마침내 입을 뗀다. “혹시 당첨되면 실사 조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때는 부부처럼 있어야 해요.” 그렇다. 이들은 집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막 ‘위장 결혼’ 준비를 끝낸 참이다. 남자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모자란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구시렁댄다. 서른이 넘었지만 지적 장애가 있는 딸에게 아빠는 “이제부터 아빠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소꿉놀이하는 거야”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그토록 원하는 집 ‘한 채’를 무사히 가질 수 있을까?
내 집 마련에 혈안이 된 현시대에 다시 한번 집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영화 <한 채>(감독 정범·허장)가 11월 20일 관객을 만난다. 영화를 공동 연출한 정범·허장 감독은 “집 한 채를 얻는 것이 삶의 최대 목표가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과연 집 한 채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의 안정된 삶을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집을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삶을 안정되게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으로 영화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각박하고 냉혹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해 조명하는 영화 <한 채>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전 부문 최고상인 ‘LG올레드 비전상’과 ‘시민평론상’을, 제25회 가치봄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관객에게도 끝나지 않는 여운을 선사했다. 집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 <한 채>를 공동 연출한, 대학원 동기이기도 한 정범·허장 감독을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 2관왕 축하드립니다. 개봉을 앞두고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정범 감독 꿈만 같아요. 제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는 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했는데, 막상 개봉을 한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극장에서 제 영화를 일반 관객과 같이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기대도 큽니다.
허장 감독 작업을 하면서 우리 영화를 영화제에서 상영한다거나, 개봉한다거나 그런 큰 그림까지는 못 그렸었어요. 일단 우리가 구상한 것들을 완성해보자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개봉까지 오게 됐네요. 배급사와도 소통하다 보니, 독립영화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배급도 어떻게 원활하게 할 수 있는지까지도 생각해 보게 돼서 우리 영역이 좀 확장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채>는 어떻게 출발한 영화인가요? 아이디어를 어디서 찾았는지도 궁금합니다.
허장 이 영화를 기획하던 2021년 무렵 저는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었어요. 그때 정범 감독은 ‘빌라왕’ 기사를 접하고 집요하게 붙들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제가 다른 작업을 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쉽지 않을 거라 판단해서, 정범 감독에게 공동 연출을 제안했습니다. 그 후 빌라왕 이슈에서 어떤 인물을 끌어들이고, 어떤 공간을 펼칠지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에는 ‘빌라왕’ 이야기는 없잖아요.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두 분은 어떤 논의를 하셨나요?
정범 1년 반이 넘게 걸렸죠. 빌라왕 기사를 보면 관련 기사에 ‘위장 이혼’, ‘위장 전입’, ‘위장 부부’ 같은 내용이 많더라고요. 신혼부부 특별공급 청약제도가 있다 보니, 그런 사건들이 생기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허장 감독과 위장 부부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논의했죠.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부부가 되면 좋을까를 고민하다가, ‘집’이라는 염원을 가진 소시민 이야기로 풀어가면 좋겠다는 데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러면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실제 기사들을 기반으로 한 건지, 아니면 영화적으로 창조한 픽션인지 궁금해지네요.
허장 기사들은 초반에 많이 참고했어요. 우리 영화에 시간과 공간을 대입해서 논의하기 시작하면서는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처음에는 청년 부부이기도 했다가, 또 다른 시나리오로 수정하면서는 탈북 여성이 한국 남성을 만나 집 한 채를 꾸려가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렇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최종 목적지가 지금의 형태가 됐습니다.
제목 <한 채>는 처음부터 그 제목이었나요? 저는 문호(임후성)가 딸 고은(이수정)에게 “이제부터 소꿉놀이하는 거야”라고 말할 때, 그 눈높이 설명이 참 좋았거든요.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 로베르토 베니니가 아들에게 전쟁놀이하는 거라고 말했듯이요. 물론 <한 채>라는 제목이 직관적으로 한 번에 와닿기는 하는데, 혹시 제목 후보군 중에 ‘소꿉놀이’는 없었는지 질문 드립니다.(웃음)
정범 소꿉놀이는 없었습니다.(웃음) 후보군은 많았어요. 우선 ‘연흔(漣痕)’이 있었죠. 파도와 바람이 침식작용을 하면서 모래에 생기는 흔적을 일컫는 용어인데요. ‘리플(ripple) 현상’이라고도 해요. 잔물결 현상을 뜻하는 말이죠. 그거 말고도 ‘두껍아 두껍아’도 있었습니다.(웃음) 여러 제목을 고민하다가 ‘한 채’라는 제목이 우리 이야기에서 무언가 딱, 집약적으로 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소꿉놀이’는 없었던 걸로요.(웃음) 저는 영화를 보면서 정말 써야 할 인물들로만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빠 문호를 비롯해 딸 고은, 남자 도경(이도진), 브로커(이주형), 도경 누나(지성은)까지요. 엔딩 크레딧을 확인해 보니, 이렇게 주연급 배우 다섯 명과 조연 다섯 명, 그러니까 딱 10명으로 영화를 만드셨더라고요. 너무나도 완벽한 캐스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캐스팅에 어떤 원칙을 두셨나요?
정범 처음부터 전문 배우는 말씀하신 대로 딱 다섯 분만 정하고, 나머지는 비전문 배우로 꾸리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로케이션 답사를 하면서 진짜 옷가게 사장님, 부동산 사장님을 섭외했죠. 농장에 나오는 문호의 형 역할은 제 아버지가 하셨고요, 이도진(도경의 누나)의 자녀는 지성은 배우의 딸과 제 아들이 나옵니다.(웃음) 저예산 영화다 보니, 예산을 줄여가는 방식에 비전문 배우를 플러스한 거죠. 그럴 때 어떻게 리얼리즘이 구축될 수 있는지 도전해보고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미 캐스팅된 전문 배우들에게도 비전문 배우와 찍을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준비했죠.
일반인 배우를 캐스팅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촬영 현장에서 연기 디렉션을 줄 때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허장 저희가 촬영할 때 로케이션 자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생활감이 있는 공간에 그만한 인간미가 묻어나는 사람들을 캐스팅하려고 했죠. 옷가게나 부동산이나 정말 ‘주인장은 주인장’이더라고요. 조심스럽게 접근하긴 했지만, 결국 공간과 인물을 같이 보면서 확정해나간 방식입니다.
정범 처음에 모텔 주인만 섭외에 실패했어요. 공을 들였는데, 결국 성사가 안 됐죠.
허장 모텔 주인장이 할아버지셨어요. 재개발 직전 모텔의 주인이 할아버지라니! 느낌이 좋아서 너무 탐냈죠. 안타깝게도 캐스팅이 안 됐습니다. 아무리 다른 배우로 대체해보려 해도 도무지 그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결국 즉흥적으로 작업을 수정해야 했어요. 고은이가 작은 문을 열고 “계세요?”라고 대사를 하는 걸로요.

저는 특히 아버지 문호 역할의 임후성 배우가, <한 채>가 건진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기가 어마어마하던데요. 어떻게 캐스팅하신 건가요?
정범 제가 극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극단 피오르라는 곳이었는데, 당시 연출이셨어요. 그때 임후성 연출이 제게 “배우는 언제든 할 수 있다. 너는 연출에 재능이 있으니 조연출부터 해보지 않을래?”라고 제안을 주셔서, 조연출로 2020년에 <돌이 된 여자>에 참여했습니다. 임후성 배우가 연출이시긴 해도, 연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연출하면서 연기를 하니, 연기하는 방식도 특별하고, 연기론이 좀 남달랐어요. 그런 부분들은 이미 제가 경험했죠.
<한 채>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 임후성 연출을 영화라는 매체에서 한 번 배우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허장 감독이랑 임후성 연출이 무대에 올린 <표절작가>를 보러 갔는데, 허장 감독도 임후성 연출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캐스팅하자고 해서, 시나리오를 갖다 드렸죠. 깜짝 놀라시며 영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내 생각 하면서 쓴 거야?”라고 하시면서요.(웃음)
허장 임후성 배우는 최근 직업이 하나 더 생겼어요. 작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인으로 등단하셨거든요.(웃음)
앞으로 충무로의 러브콜을 많이 받으실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정범·허장 (입을 모아) 그러면 너무 좋죠!

제가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게 많은데요. 우선 도경과 고은의 관계부터요. 택배 배송도 같이 하고, 등도 밀어주면서 둘은 정이 듭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는 둘이 마음을 통하게 된, 마음을 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은 없어요.
허장 와, 제가 어제 전북독립영화제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어요. 사실 저희는 영화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많이 생략하고 압축하는 방식을 추구했어요. 오히려 생활하는 디테일을 더 보여주자고요. 고은 역을 맡은 이수정 배우도 그렇게 얘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특정한 사건이 있었다기보다, 서로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범 방금 허장 감독이 말한 것이 저희가 이 영화에서 늘 추구했던 겁니다. 서사를 만든 후 카메라에 담으면 다큐멘터리 방식이죠. 우리 영화는 공간의 영화입니다. 공간에 인물을 녹여놓고 포착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했죠. 그렇게 실험해보고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졸업작품으로 논문도 써야 했으니까요. 기존에 영화를 만드는 방식을 탈피해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했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오고, 또 촬영분으로 편집할 때 어떻게 나올지 논의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리허설을 정말 많이 했어요. 현장 리허설까지 포함해서 3개월 거쳐 20번 정도 했으니까요. 배우 리허설이기도 하지만, 연출 태도에 대한 리허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물들을 배우들과 함께 탐구한 거 같아요. 형식과 시나리오에 서사에 구겨 넣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영화가 완성될 것인가, 아닌가를 시도해 본 거죠.
허장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시도할 때도 결국 편집 단계 호흡을 생각하면서 덜어내게 되더라고요.
정범 편집도 공간 중심으로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한 채>에서 인물이 어떤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오프닝, 엔딩에만 있어요. 영화가 시작하고부터는 공간이 주어져 있고, 그 안에 들어간 인물들을 카메라가 포착해낸다는 생각으로 찍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초 편집본 러닝타임이 두 시간 반이었는데요. 한 시간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연출 방식이라고 하셨는데요. 극영화에서 그런 시도가 처음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작업해 보니, 어떻던가요? 공간을 주고 인물이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방식이요.
허장 이 대답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한 건데요. 사실 영화라는 매체가 탄생한 지 이제 100년 남짓 됐잖아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개인적인 감상이긴 한데, 문학이나 드라마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영화의 핵심은 이미지와 사운드잖아요? 그걸 드라마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을 포착하고 싶었던 거죠. 그런 이야기를 정범 감독이랑 소통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걸 목표로 실험을 해보자! 그런 느낌으로요.
두 시간 반 짜리 영화에서 한 시간을 덜어낸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편집에서 원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정범 가급적으로 인물을 이상하게 만드는 장면은 다 걷어냈습니다. 예를 들면, 문호와 고은이 컵라면을 먹는 씬이 있었어요. 아빠가 잠깐 씻으러 간 사이에, 딸이 끓는 물을 엎질러서 화상을 입어요. 욕실에서 급하게 나온 아빠가 응급처치를 하죠. 딸 허벅지에 찬물을 대라고 하면서요. 그러다가 엎질러진 라면을 다시 컵라면에 주워 담아서 먹는 장면이 있었어요. 편집할 때 걷어냈죠.

인물들을 너무 몰아세웠다는 느낌이 강하긴 하네요. <한 채>에 특히 밥 먹는 장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많은 이유가 있을까요?
정범 담배는 가장 서민의 기호식품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좀 담배를 피우면서 혼자 있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들을 두게 한 거죠. 그런데 아빠 문호 역을 맡은 임후성 배우는 원래 담배를 안 피우고요. 도경 역을 맡은 이도진 배우는 담배를 끊었더라고요. 그래서 두 분께 금연초를 드리며 연기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웃음)
허장 ‘한 채’라는 제목에서 저희가 표현하고 싶었던 건 ‘물리적 한 채’가 아니라 ‘한 채를 채우는 인간, 인간성’에 대한 거더라고요. 같이 밥을 먹는다는 ‘식구’의 개념이나, 같이 잠을 잔다든가 하는 것들을 많이 활용하려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정범 영어로 하면, ‘house’보다 ‘home’ 개념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를 허장 감독과 많이 했죠. 결국 한국어 제목은 그렇게 공간적 개념으로 지었고요. 영어 제목은 상실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The Berefts’로 했습니다. 물리적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집은 무엇인가, 집을 자본의 가치로 볼 때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또 진짜 집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조명해보려고 한 거죠.
허장 방금 정범 감독이 말한 ‘식구’라는 단어도 있고요, ‘보금자리’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가 처음에는 집 한 채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가족으로 확장되더라고요. 청약에 당첨되면, 정상적인 여자와 재혼하라는 누나의 말이 그래서 더 크게 와닿았나 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누가 장애이고, 비장애인지도 모를 지경인데 말이죠. 이 장면에서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셨나요?
허장 방금 기자님 말씀하신 것처럼요. 누나는 동생 도경이가 장애를 가진 인물과 만남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가장 크게 걱정했을 인물이라 생각했어요. 누나는 도경이를 가장 아끼는 인물이니까요. 사실 그 대사는 처음부터 누나의 대사는 아니었습니다.
정범 저희가 연출하는 방식이요, 배우들에게 정확한 대사를 주지 않아요. 리허설을 많이 해서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요. 리허설 때 누나 역을 맡은 지성은 배우에게 물어봤죠. 지금의 도경이를 보면서 누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거 같냐고요. ‘영화에서는 도경의 부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일지, 동생이 한번 실패한 결혼에 대해 누나가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동생이 온전한 가정 꾸려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그렇게 물어본 거 아닐까요?’ 지성은 배우는 이렇게 생각했대요. 도경이는 동생이지만, 사실 누나 입장에서는 모성애로 돌보는 존재라고요. 그렇기에 동생 도경의 딸을 누나가 맡아서 키우기도 한 거겠죠. 그런 사람이기에, 동생이 어떤 삶을 선택할지 걱정이 돼서 물어본 겁니다. 이게 지성은 배우의 해석이기도 했어요.
허장 사실 도경과 누나 사이의 전사가 없었어요. 그 장면을 찍으면서 이도진 배우와 지성은 배우가, ‘도경과 누나는 부모님이 없고,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식구’라는 전사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리허설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군요. 저는 이 영화에서 딱 하나 수족관 장면이 정말 좋았어요.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 속에서 환상적인, 마치 시간이 멎은 듯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이랄까요? 특별히 이 장면을 넣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정범 아쿠아리움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해마였어요. 해양 생물 중에 해마만 유일하게 아빠가 새끼를 낳는다더라고요. 우리 영화가 부성애가 중요하거든요. 그 해마 때문에라도 아쿠아리움은 꼭 가야 한다고, 시나리오 쓸 때부터 넣어뒀죠. <한 채>는 부성애에 대한 부분도 크니까, 꼭 찍어야 한다, 그게 우리 영화의 핵심이다 이런 생각으로요.
허장 사실 저는 촬영 전까지 아쿠아리움에 가 본 경험이 없어요. 정범 감독이 아이들 데리고 처음 아쿠아리움 간 이야기를 해줄 때도 낯설었죠.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서 임후성, 이수정 배우가 아쿠아리움을 보면서 반응하는 그 모습들이 실제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모습이 방금 기자님이 보신 느낌처럼 반영된 것 같다고 느껴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래서, 고은과 도경은 어떻게 됐을까요?(웃음)
허장 저는 쉽게 손을 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범 감독과 동상이몽일 수는 있지만요. 도경과 고은, 문호는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배우들이 표현하지도 않았고요, 또 제 염원이기도 합니다.
정범 무엇보다 문호를 기다리지 않을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GV에서 임후성 배우가 정말 영감을 크게 줬습니다. “난 목표가 있다, 난 딸을 처리한다”라고요. 지적 장애가 있는 딸을 누군가에게 ‘인계’한다는 건, 문호에게 너무 고상하죠. 어떡해서든 딸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임후성 배우가 GV에서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관객들이 다 울었어요. 문호의 어떤 행위와 결과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말을 함으로써 문호가 스스로를 더 가두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그날 GV가 우리 영화를 완성시켜 준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한 채>는 두 분이 공동으로 연출하셨죠. 두 분 인연은 언제부터인지, 또 공동 연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부터 시너지가 났던 부분이나 힘들었던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허장 단국대 대학원 동기로 만났어요. 발표에서 같은 조였는데요, <한 채> 찍으면서 장난삼아 “우리는 왜 같이 발표를 했을까?”라고 말하기도 했죠.(웃음) 왜, 발표를 준비할 때 다른 팀들을 염탐하고 그러잖아요? 그때 정범 감독 프로젝트가 자유분방해 보였어요. 그래서 <한 채>는 제가 공동연출을 제안했죠. 제가 제작 쪽 경험이 조금 있다 보니, 촬영 부분에 있어서는 정범 감독에게 최대한 지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힘든 거라면 뭐, 사람이 다 다르니까, 의견을 합쳐가는 과정에서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3년을 같이 작업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봐도 이 정도 호흡이면 파트너 궁합점수로 치면 꽤 높은 점수일 것 같네요.(웃음)
정범 공동 연출하는 이들이라면 다 겪을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각자의 생각을 모아 시너지를 내기까지 단계가 있어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저와 허장 감독이 알아가는 시간이 정말 도경이네와 고은이네가 알아가는 시간, 관계와 비슷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거 아닌데’ 하며 충돌도 하고, 의기투합하려 노력도 했어요. 그래도 허장 감독에게 감사한 건, 촬영적으로 제가 뭔가 이야기하면, 허장 감독이 고민해보다가 “그래, 그건 맞을 것 같아”라고 지지를 많이 해줬어요. 저는 촬영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허장 감독은 편집점을 생각했다고 할까요? 이런 부분이 시너지였던 것 같습니다. 다툼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었죠. 아무래도 저는 남자다 보니 남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봤는데, 허장 감독 덕분에 여성의 시각으로도 바라볼 수 있었죠. 다툼이자 시너지였던 관계성이라고 할까요?(웃음)
예를 들면 어떤 장면이었을까요?
허장 도경이 고은의 등을 밀어주는 씬이 그랬어요. 저희 의도와 달리 이 장면이 섹슈얼하게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연출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정범 감독과 많이 나눴습니다.
정범 그 장면을 찍을 때 이수정 배우를 이해시킨 사람이 허장 감독이에요. 이수정 배우가 엄청 고민을 했대요. 굳이 이 장면을 왜 찍어야 하느냐고요. 허장 감독이 이 장면은 절대 섹슈얼한 게 아니라, 가족끼리 할 수 있는 보편적 행동일 수 있다고 설명한 거죠.
허장 아빠가 딸의 등을 밀어주는 씬에 대해서 이수정 배우가 큰 충돌 없이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도경이 등 밀어주는 그 장면에서 충돌이 살짝 있었던 거죠. 둘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제가 “만약 제가 아버지랑 단둘이 살고 있고, 우리 둘 중 하나가 몸이 불편하다면, 저는 나이와 상관없이 아버지 등을 밀어드릴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이수정 배우가 이해하고 받아들여 줬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라는 ‘가짜 집’이 아닌 살 부대끼는 사람들이 모인 가족이 ‘진짜 집’이라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진짜 집의 의미를 고민해 보자고 하지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범 제가 <한 채>에서 바란 건 이겁니다. 집을 물리적 가치로 홍보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가정을 먼저 꾸릴 수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거죠. 결혼할 수 있고, 출산할 수 있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먼저고, 그다음에 집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들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대는 결혼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잖아요? 가정을 구성한다거나, 아이를 낳는다는 것에 대해 아랫세대들이 훨씬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모든 이슈가 집이라는 물질적 가치에 너무 포커싱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난 결혼 안 해’, ‘혼자 살래’ 이런 생각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허장 방금 기자님께서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셨는데요. 솔직히 답변을 드리자면, 영화를 만들면서 사회적인 접근을 많이 하진 않았습니다. <한 채>의 공간은 크게 세 개인데요. 도경이네 반지하 집, 도경이 누나의 오래된 허름한 빌라 그리고 이제 막 재개발에 들어가는 모텔촌이죠. 이렇게 상징화된 공간 속에서, 이들이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면서도, 삶이라는 끈을 팽팽하게 쥐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마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요.
그래서 두 분 감독님들께 집 ‘한 채’는 어떤 의미인가요? 영화를 찍기 전과 후 그 의미가 달라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정범 저는 동일해요. 달라진 건 크게 없습니다. 저도 아들, 딸이 있어요. 영화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힘들잖아요. 현실에 부딪히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해봤고요. ‘좀 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겠다’ 하는 생각이 오히려 드는데요. 그럴 때 <한 채> 영화가 계속 떠오르더라고요.(웃음)
허장 예전 인터뷰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제게는 오래된 가정사에 대한 숙제가 있어요. 공동연출이긴 하지만, <한 채>라는 영화를 마무리하고 나서 ‘아, 허장이라는 가족의 한 명이, 가족에 대해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걸 제가 이해받고, 또 다른 가족이 손을 내밀어 주시는, 그렇게 가족들과 말없이 화해를 하게 되는 과정 중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치유의 의미가 담긴 영화라고 할까요.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범 그래도 우리 영화가 좀 계절에 맞게 개봉하는 것 같아서 너무 다행인 것 같네요.(웃음) 이 영화는 가짜의 집 한 채를 어떻게 지어가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만의 한 채는 어떤 한 채일까 한 번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영화는 열린 결말이라, 아직도 한 채를 지어가고 있거든요. 그렇게 자기만의 한 채를 어떻게 짓는가에 큰 의미가 있기에 관객들도 이 영화 보고 같이 자기만의 한 채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허장 너무 그럴듯하게 말씀하셔서 딱 한 마디만 보태겠습니다. 거기에 온기 한 스푼 딱 얹어드리고 싶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