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시작 20분이 채 되지 않아 뭔가 찜찜하고 지루하다.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한다. 관람을 그만둘까 싶은 충동마저 느낀다. 같은 감독, 같은 주연배우가 5년 만에 다시 만난 속편 치고는 지나치게 느슨하고 구구절절이다.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며 뮤지컬 형식으로 돌변하는 모습은 뜨악하기까지 하다. 온 도시를 폭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괴인’의 존재감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추레한 범죄자의 모습뿐이다. 왠지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할 인간의 비천함과 나약함을 생짜로 목격하는 기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폴리 아 되>(2024)는 영화 자체가 어째 조커 같다.
이봐 조커, 너 실망인걸!
그럼에도 결국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은 뭘까. 감옥에 갇힌 조커/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전작보다 훨씬 늙어 보이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항변하려는 의지 따위 없어 보인다. 적어도 초반 삼분의 일 지점까지는 그저 모든 걸 포기한 죄수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행려병자처럼 행동한다. 이 역시 조커 특유의 광대짓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한 <조커>(2019)의 후속편이 되려면 그는 다시 광대 분장을 하고 세상을 희롱하고 뒤엎어야 하는 게 관객 대부분의 기대일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대 이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조커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아서가 수감된 감옥과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정신병동 음악반에서 만난 리 퀸젤(레이디 가가)은 조커의 광팬임을 자처한다. 리는 의기소침한 아서를 부추겨 그가 다시 광폭하고 통쾌한 ‘조커의 위상’을 되찾게 하려 한다. 아서는 재판을 앞두고 있다. 변호사는 그를 해리성 정체 장애 환자라는 명목으로 중형을 면하도록 애를 쓴다. 영화는 이때부터 숫제 정신상담원 같은 분위기가 된다. 아서의 정신적 결함을(이를테면 ‘조커’라는 다른 인격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 증명하려는 측과 아서가 아무런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지 않는 정상인임을 주장하는 검사 측.
아서는 변호인을 당황스럽게 하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아서 스스로도 종내 자신이 환자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변호사를 거부하고 스스로 변호하려 한다. 이 또한 조커의 장난이고 술수일까. 그러면서 영화는 점점 조커가 저지르는 행위보다 조커라는 희대의 광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 가짜로 꾸며낸 것인지를 판명하는 기이한 재판장처럼 돼버린다. 조커의 재판장 자체가 조커의 무대로 변해버리는 것. 감독의 진짜 속셈은 바로 그 지점인 듯하다.
여기가 바로 정신병원이자 재판장이자 감옥이지

조커는 고담시 전체를 폭동의 도가니로 몰고 간 인물이다. 그의 무기는 자신의 슬픔과 상처에서 발원한 기이한 웃음이다. 웃음이란 일종의 타이밍 싸움이다. 쌍방이 적절한 포인트에서 뭔가 뒤틀렸음을 들켜버렸을 때 웃음이 발생한다. 하지만 조커/아서는 어릴 적부터 그 타이밍이 남들과 달랐다. 그래서 스스로 웃음거리가 돼버리곤 하는데, 그 웃음은 웃음조차 나올 수 없는, 되레 상대로 하여금 화를 불러일으키거나 모욕감을 주는 행위로 간주된다. 조커/아서는 바로 그것으로 도시 전체를 휘어잡고 있던 ‘웃음의 권력(?)’을 전복시켜 버렸다.
어쩌면 그게 바로 사람들이 조커에게 열광하는 이유일 수 있다. 가난하고 핍박받고 사람들에게 삶을 통째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권력이 정해놓은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조커가 체제의 위험인물이 되는 건 그가 저지른 살인사건 자체보다 그가 살인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규칙과 규범을 제멋대로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제는 그것을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축소시켜 시스템 전체를 보지하려 한다. 근원적으로 모순되고 구멍 나 있는 시스템의 본색을 감추기 위해 조커를 희생양 삼는 것이다. 그러나 조커/아서는 그러한 체제의 독선 따위 큰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건, 모든 개인이 그러하듯,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자신만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소박해 보이는 꿈은 그러나, 체제의 광포한 억압 아래 짓눌린 채 압살당한다. 그럴수록 꿈은 망상에 가까워진다. 크게 한판 저지르고 감옥에 갇힌 조커는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런 그에게 리가 다가간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눌어붙어 있던 죄수 아서에게 리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사랑이라는, 조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삶의 가치와 따뜻한 보상의 꿈을 심어주는 것이다. 조커는 얼핏 양분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은 그를 판결하려 하지만, 사랑을 만난 조커는 그저 여리디여리고 순하고 순한 한 명의 범인(凡人)일 뿐이다. 조커는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
사랑도 폭동도 다 꿈일 뿐이야

영화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조커와 리의 듀엣 장면. 리는 조커가 꾸는 꿈속에서 할리퀸으로 변신하는 희대의 디바다. 동시에 리가 조커를 통해 투사하는 자신만의 환상이기도 하다. 둘은 그들만이 쌓을 수 있는 ‘산’에 대해 노래한다. 그런데 동시에 꾸는 꿈 같지만, 어딘가 어긋나 있다. 리는 의사 아버지를 둔 부유층 딸이다. 정신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걸 보면 체제의 안전망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꿈 많고 허영 가득한 여성이다. 그런 리에게 조커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기보다 자신의 허영 속에서 가공된 허구의 전사다. 어쩌면 리는 조커의 기행에 열광한 모든 이의 가면일지도 모른다.
부제로 쓰인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뜻하는 프랑스 말이다. 리로 대표되는 조커의 팬덤 자체가 그러한 병증을 공유한 집단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변호사가 진단하는 조커의 병증은 두 개 이상의 인격이 혼재하는 이른바 ‘해리성 정체 장애’에 가깝다. 1990년대 이전엔 ‘다중인격 장애’라 불리던 진단명이다. 그런데 그것을 병이라 명명하는 순간, 북미 전체에서 소위 ‘해리성 정체 장애’라고 진단된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통계가 있다. “병을 병이라 하면 병이 아니다”라 했던 노자(老子)의 역설이 그야말로 역설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랄까. 어째 병 자체가 ‘조커 현상’ 같다.

영화는 시종일관 뒤죽박죽이고 느닷없으며 생뚱맞은 전개를 펼친다. 조커의 ‘실체(?)’를 밝히려는 내용들이 모두 조커를 더 알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조커의 범죄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됐는지는 대한 판결 또한 조악하게 거덜한 종이쪼가리처럼 풀풀 먼지만 날리다 사라지는 느낌이다. 뮤지컬 장면은 또 어떤가. 정통 상업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뮤지컬의 비현실적인 낭만성이 생짜 그대로 인용되면서 뮤지컬이 지닌 허구의 위안을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린다. 이건 조커에게도,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초반의 이질감과 거북함이 더 이상하고 부담스러워지는 동시에 어째 결국 저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은 괴이한 착종도 생긴다. 허무하고 맹랑해서 외려 더 부각되는 조커의 실제 모습. 그건 애초에 영화라는 가면을 통해 삶을 위안 받고 여흥을 누리려는 욕망 자체를 까발리려는 도발 아닐까.
“이것은 조커가 만든 영화다!”

뮤지컬 장면에서 조커와 할리퀸은 자주 엇갈린다. 따스한 하모니로 노래 부르던 그들이 서로의 그림자처럼 노닐다가 일순간 분열한다. 서로의 눈과 입이 서로를 향한 총이 되는 시점. 할리퀸이 갑자기 조커에게 총을 쏜다. 조커가 피를 흘리며 당황한다. 관객들은 더 열광한다. 노래가 아름다웠으니 총을 쏘는 모습 또한 극적이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인가. 판타지에서 총을 쏘고 죽이는 건 범죄도 아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조커에 대해 환상을 품었던 할리퀸은 조커가 현실의 인물임을 알게 되는 순간, 뒤돌아선다. 조커가 꿈꾸던 아름다운 사랑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떤 영화를 보든, 마지막 장면이 끝나면 실제로는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을 뿐이고, 다 잊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을 유혹하고, 더 잘 유혹하기 위해 더 폭발력이 강한 가면과 무기를 장착하려 한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조커라는 것.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누군가를 조커로 둔갑시키는 일이라는 것. <조커: 폴리 아 되>는 바로 그런 직관을 조커의 또 다른 가면으로 폭로하고자 한 영화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이들의 비판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것은 조커가 만든 영화다!”라며 쌍수를 들었던 것에 나도 동의한다. 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