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 팝(iggy Pop)은 한국에선 많이 알려진 뮤지션이 아니다. 50년 넘게 음악 활동을 꾸준히 해 봤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히트 싱글 하나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서양 록 음악계에선 ‘펑크록의 대부’로 아직도 추앙받는다. 과격하고 요란하고 음란하기까지 한 무대 퍼포먼스로 유명한데 2013년도에 딱 한 번 내한공연을 한 적 있다. 예순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광란적인 무대 매너를 선보였다. 물론, 골수 록 마니아들만 가득 들어찬 공연이었다.
펑크록의 대부, 자신을 돌이키다
본명은 제임스 뉴웰 오스터버그 주니어(James Newell Osterberg, Jr.), 1947년 미국 미시간 출생이다. 이기 팝이라는 이름은 무명 시절 드럼을 치던 밴드 ‘더 이구아나스’(The Iguanas)에서 따왔다. 지인들 사이에선 짐 오스터버그라 불리기도 한다. 젊은 시절부터 헤로인 등 온갖 마약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맨 적도 있다. 그런 그를 꾸준히 도왔던 게 데이비드 보위다. 데이비드 보위는 2016년 사망했지만, 이기 팝은 아직 건재하다. 나이가 믿기지 않는 광란의 퍼포먼스도 여전하다.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한 배우이기도 한데, 짐 자무시와 절친이다. <김미 데인저>(2016)는 짐 자무시가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이기 팝이 솔로 데뷔하기 이전을 주로 다룬다. 바로 더 스투지스(The Stooges)라는 밴드다. 짐 자무시가 프레임 바깥에서 질문을 하고 이기 팝을 비롯, 스투지스의 전 멤버들과 관련자가 화면에 등장해 인터뷰하는 형식이다. 기존 다큐멘터리들과 크게 다른 형식은 아니다. 짐 자무시는 이기 팝을 줄곧 짐이라 부르는데, 그게 약간 재미있다. 짐이 묻고 또다른 짐이 대답하는 식인 거다. 짐 자무시는 이기 팝보다 6살 어리다. 그 역시 로큰롤 마니아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둘 사이가 각별하다는 것도 알만한 사람들은 알 테다. 이 영화가 짐과 짐의 예술 마인드 합작으로 여겨지는 것도 그래서 무리는 아니다.

출연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무난하게 흘러가지만, 짐 자무시의 특장이 드러나는 장면이 곳곳에 묻어 있다. 이기 팝이 어렸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실제 이기의 어렸을 적 사진들과 당시 유행하던 영화나 TV시리즈 장면들이 몽타주 되어 리드미컬한 ‘실증’ 작용을 한다. 거기에 이기와 친구들의 당시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 장면들도 수차례 등장한다. 고전 영화에 해박한 짐 자무시의 성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기 팝이 성장하던 시절 미국의 사회상들이 뉴스 보도 등을 통해 인용된다. 문화가 어떤 식으로 사회의 영향을 받고, 다시 사회가 어떤 문화적 변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되는지 단순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반항아들마저 길들이는 자본주의 마력
이기 팝이 처음 음악 활동을 시작한 건 10대 시절인 1960년대 중반부터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전과 매카시즘 등 갖가지 정치적 병폐에 시달리던 때였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젊은이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록 음악이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잭 케루악이나 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 문학가들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마약을 통해 의식 개혁을 탐구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서양 자본주의의 토대를 뒤흔들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환이었는데, 결과적으론 그게 다시 미국식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마수에 흡수되어 1980년대엔 숫제 모든 문화 활동이 흥청망청 소구되는 소비재로 전락한다. 히피가 머리 자르고 여피가 되어버리는 일들이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비일비재해진다.
저항은 곧 순응이 되고, 순응은 곧 체제 유지의 동력이 된다. 자본주의는 그런 방식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굳건해진 지금에 와서는 별스럽지도 않고, 새삼 분개할 일도 아니다. 모든 문화적 아이템들은 거대 백화점에 대롱대롱 매달린 장식품처럼 일회적으로 소비되기만 할 뿐, 어떤 별다른 사회적 문제의식이나 도전정신 따위는 땅을 파도(?) 잘 보이지 않는다.

소위 K컬쳐니 K팝이니 하는 홍보문구는 매우 놀라운 현상이기는 하다. 불과 30년 전에만 해도 빌보드 차트는 ‘불가능한 문화의 성전’인 양 추앙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K팝이 그 무대의 최전선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다. 세계 문화의 중심에서 모든 음악이 K팝의 설정과 모티프에 열광하면서 모방에 열중이다. 딱히 그 자체를 비판할 만한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문화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 경제 등 복합적인 구조를 생각할 땐 재고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건 문화 산업의 일률적이고 독점적인 구조이다. 대개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아이돌스타 하나에 목매달고 산다. 모든 시스템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에서 희생되거나 노역에 시달리거나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자칫 ‘그’에게 문제가 발생하거나 또는 ‘그’가 문제를 일으키면 회사 전체가 흔들린다. 아주아주 불안하고 위태로운 ‘신전’ 쌓기라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그 ‘신전’ 이외 다른 문화적 형식이나 분위기는 자본의 무관심 아래 짓눌려 겨우 연명하거나 몰살당한다. <김미 데인저>를 보면서 곱씹게 되는 작금의 상황이 씁쓸하게 다가왔던 건 그런 까닭이다.
그는 왜 스스로 위험을 자초했나

’Give me Danger’. 스투지스의 노래 제목이다. 아주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이다. 곡 스타일도 그렇다. 스투지스 시절 이기 팝의 보컬은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특징이 있다. 야비하고 처절하고 반항적인 감정이 잔뜩 담겨있다. 숫제 빈정거리는 듯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가 아주 음울하게 목소리를 깔고 허무하고 무기력한 내용의 가사를 읊조리기도 한다. 무대 매너 또한 그러하다. 반나 상태로 자해를 하는가 하면, 대놓고 음란한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관객 속으로 다이빙하는 소위 ‘크라우드 서핑’을 처음 시도한 게 이기 팝이다. 그러다 코피가 터지고 치아와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Dangerous’ 그 자체라 아니 할 수 없다. 여든을 코앞에 둔 지금은 약간 온화해졌으나, 에너지만큼은 젊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왜 그토록 ‘위험’을 자초했을까.
사람에게는 오욕칠정이 있다. 그것들이 순환하면서 자주 시련을 겪으며 아주 가끔 ‘행복’을 맛본다. 그런데 기쁨과 행복은 일회적인 동시에 일차적이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잠깐 기쁘지만, 결국 또다른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기쁨은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들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또 행복을 좇게 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불행의 굴레로 작용한다. 그게 임계점에 달했을 때 모종의 분노가 폭력적으로 발산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축제가 그것의 안전핀이다. 내면의 불덩이와 오물들을 토해냄으로써 몸과 정신을 청소하는 것. 70여 년 동안 록 음악은 그런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결국 자본이 먹이가 되었고, 지금은 거의 멸종 직전의 공룡이 되어 버렸다.
해소되지 않는 욕망과 불안, 그 양 극점에서 사람은 미친다. 미친 사람은 아무렇게나 말하고 자기 멋대로 타인 혹은 세계를 재단해 그 어떤 위험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한 내면적 충동과 광기를 돌보라고 무대가 존재한다. 무대는 ‘쇼’를 전제로 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선 모든 게 가능한 동시에 모든 게 허구이자 모든 게 감동의 조건을 전제한다. 그러한 무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무대가 사라지니 어떤 믿기지 않는 실재가 쇼처럼 발생한다. 권력을 움켜쥔 자가 편향된 망상과 피해의식에 절어 군사를 함부로 동원하는 일도, 한순간 잘못을 저지른 여배우가 불특정 다수의 인신공격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실재와 쇼, 허구와 사실을 분간하지 못한 뭇 대중들의 골방 놀이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세계는 조만간 자폭할 것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1990년대에 이미 “현실은 포르노를 모방한다”고 일갈한 적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1980년대에 이미 “세상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실재한다”고 진단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흥미롭고 요란해졌다는 것 또한 새삼 언급하는 게 고루할 정도다. 억눌린 본능과 그것을 통제하려 드는 대중의 도덕관념이 일방향으로 충돌할 때 세상은 끝없는 내상(內傷)에 시달리기 마련. 지금은 그게 폭발 직전까지 다다른 느낌이다.
한동안 임의로 연재를 게을리한 연유도 거기 기인한다. 도저히 그 어떤 영화도 집중해서 볼 수 없을 만큼 내적 열기와 호기심을 실재의 복마전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는 허탈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에서 그 모든 상처와 분노를 끌어안은 채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룡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이구아나처럼 요리조리 몸을 비틀고 춤추면서. 그 모든 모욕과 환희를 인간의 가장 첨예한 본성이라 소리치면서.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