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마피아 빈센조가 한국에 와서 상인연합을 돕더니(<빈센조>), 청년 현우의 얼굴로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인 재벌의 성역으로 들어가 한국사회를 조망하기도 했다(<재벌집 막내아들>). 가장의 보호로부터 떨어져 나간 소년을 조건 없이 돕는 중간보스 치건(<화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낯선 땅 벨기에에 도착한 탈북자 기완까지(<로기완>). 송중기의 개인의 ‘선택’을 따로 두지 않고 이어붙인 지점에는 신기하게도 소재적인 면에서 한국사회를 담아내고 액션, 누아르, 판타지 장르를 교차하게 만드는 일련의 흐름이 있다.
1997년 IMF, 사업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콜롬비아 보고타에 발을 디딘 19살의 청년. ‘커피의 산지’로만 알았던 그곳에서 추락한 자신의 나라를 등지고 실추한 가장을 대신해 일어서려 한인 상인들과 밀수 사업에 가담했다가 결국 제 손에 피를 묻히고 일인자가 되어가는 청년 국희의 산전수전 연대기.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하 <보고타>)은 촬영의 시작점으로 보면 앞서 소개된 작품보다 먼저인 작품이다. 앞선 작품들의 요소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 송중기의 한 챕터를 규정할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늑대소년>의 해사하게 맑은 얼굴을 벗고 <태양의 후예>의 강직한 남성성을 경유한 그는, 이 모든 도전의 장에서 자신의 얼굴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중이다.
종합해 보면, 확실히 그는 내심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만을 착실히 따르고 되돌려 주는 모범적인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전혀 다른 면모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도전적 면모와,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하는 영리함, 주연배우로 통솔과 배려하는 친화력이 어우러진 보스 같은 기질은 지금 송중기의 매번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특질이다. 39살 송중기의 파워는 그렇게 한국영화와 시리즈의 한 축을 형성해 내고 있다. 작품 이야기에 진지하다가도, “장모님이 콜롬비아 분이라 누구보다 반가워하며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며 스스럼없는 이야기까지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송중기와의 대화를 전한다.

<보고타>는 무엇보다 해외 올로케이션이 가지는 도전과 매력이 다분한 작품인데요. 한국영화의 프로덕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의 의미로 볼 때, 아무래도 주연 배우로서는 작품 선택에 있어서 대형 프로젝트를 함께 이끌어 나간다는 흥미가 크게 다가왔을 것 같은데요.
현지 올로케이션이 주는 매력은 분명히 있어요. 첫 번째는 아니지만, 그 작업에 대한 재미는 그전부터 많이 느끼고 있었어요. 다른 작품도 해외 촬영 경험이 있지만, 이렇게 100% 올로케로 하는 작품은 처음이었죠. <로기완>은 헝가리에서 5개월 체류하면서 찍었지만 <보고타> 이후에 한 작품이었고요. 제가 평소에 매력을 느끼는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작품 선택의 시발점이 된 건 맞죠. 다만,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원래 계획한 신선하게 담을 수 있는 로케이션을 100% 다 담지 못한 게 아쉽죠. 제가 이런데 감독님은 오죽하겠어요.
당시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면서, 촬영 중 배우, 스태프진이 귀국하던 급박했던 상황을 모두 공유 받았었죠. 프로덕션 도전의 크기만큼 코로나 영향도 많이 받은 작품이었어요.
그러니 지금 개봉을 표현하자면 ‘감개무량’이에요. 콜롬비아 체류 두 달 반 정도 됐을 때, 영화를 50% 정도 찍었을 때였는데 다른 작품들 촬영이 중단된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때도 저희는 촬영을 하고 있었고, 콜롬비아 시장이 등장하는 군중씬을 찍고 있었는데 콜롬비아 정부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진 거죠. 그런데 돌아가는 비행기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죠.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와서 그 사이에 저는 <빈센조> 찍고, (이)희준이 형은 <핸섬가이즈> 들어가고 다들 다른 작품을 시작하는 바람에 정말 그때는 우리 작품 이러다 엎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컸어요.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재벌집 막내아들>의 제 부분 촬영을 미루고 이걸 먼저 완성하자 했어요. 그 당시도 입국 거부하는 나라가 많아서 보고타 촬영의 상당 부분을 그때는 사이프러스에서 찍었어요. 그래서 로케이션이 보고타, 사이프러스, 한국 세 곳이 된 거예요. 완성까지 많은 노력을 했고, 그 상황 안에서 잘 구현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 더 애착이 가고, 그래서 많은 분들께 알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 작품이에요.

프로덕션의 외형과 더불어 이 작품을 제안받고 배우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또 다른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제작사 대표님(영화사 수박의 신범수 대표)께 처음 대본을 받았는데 그분이 <이태원 살인사건>(2009) 제작을 하신 분이에요. 제가 완전 신인일 때 저한테 기회를 주셨던 분이고, 또 함께 하면서 그분이 가진 마인드가 좋아서 함께 작품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줬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드는 게 결국 사람들끼리 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분이 콜롬비아에서 대학 생활을 하셨어요. 영화에서 한인사회나 고대 언급 설정 같은 것들이 그 당시 직접 보고 들은 거였다고 해요. 그걸 발전시키고 상상을 보태서 기획한 거라 시나리오가 리얼하고 흥미로웠어요. 이런 이유들로 제안받았을 때부터 호감도가 컸던 프로젝트예요. 더불어 <소수의견>(2015)을 보면서 김성제 감독님이 연출하신 캐릭터 밀도들에 대한 기대감도 컸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땅에 가서 발을 붙이고,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는 캐릭터의 변화를 그리는데요. 배우님이 실제 보고타 현지에 가서 직접 흡수한 것들이, 국희라는 캐릭터의 심경을 표현하는데도 힌트를 줬을 것 같아요.
정말요. 시나리오상으로 봤을 때보다 현지에 가서 지내면서 제 캐릭터의 바이브가 네 다섯 배는 뜨거워졌어요. 현지 분위기가 정말 한몫한다고 생각해요. 그곳 사람들이 정말 뜨거워요. 흥도 많고. 길거리 가다가 음악 나오면 그냥 춤추고 그래요. 그 바이브가 너무 좋고 그곳 음식도 잘 맞고, 그래서 그 영향을 분명히 받은 것 같아요. 스태프도 콜롬비아 스태프들이 한국 스태프보다 2배 정도 많았어요. 같이 있으니 그 흥에 맞춰가고, 뭣보다 제가 그분들께 스페인어를 배우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콜롬비아 스태프들이 있어서 계속 언어도 배우고 있어요.

스페인어 적용에 있어서, 영화에서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많았던 것 같네요.
영화에는 제가 스페인어 하는 장면이 많이 편집되긴 했는데, 제가 애드립한 것도 정말 많았어요. 바로 배워서 욕설 같은 건 쓰기도 했고요. (웃음) 이 영화 직전이 <승리호>였는데 그때 살짝 스페인어 대사가 있어서 마침 배우고 있었거든요. 마침 도움이 됐었죠. 10대부터 30대까지 국희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제가 현지 언어를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절대 외형적인 모습만 바꿔서는 안 된다, 국희가 그 땅에 적응을 하면서 언어를 제대로 구사해야 이 인물의 콘트라스트가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열심히 배우려 한 거죠.
언어뿐만 아니라, 컬러풀한 남미 의상들이 주를 이루는 전반부를 보면 외적 변화를 보여주는 데도 현지 바이브가 충분히 적용되었던 것 같아요.
스태프들끼리 가는 건데, 촬영 전부터 제가 거길 따라갔어요. (웃음) <승리호> 끝나자마자, 미리 간 거죠. 가까운 일본이나 이런 곳은 감이 오는데, (콜롬비아는) 정말 저한테 낯설어서 직접 봐야겠다 싶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비주얼적으로 레퍼런스 삼을 만한 것들도 그때 다 찾은 것 같아요. 의상, 분장 실장님한테 ‘머리 밀어 버립시다’ ‘짧게 합시다’ 이런 걸 현지인들 모습을 보고 제가 제안을 했죠. 의상이 그분들은 빨간 바지에 파란 셔츠 이런 게 기본이에요. 제가 겁이 많아서 피어싱을 해본 적이 없는데, 현지 분들이 진짜 피어싱이 일상화되어 있어요. 그래서 타투샵 가서 귀도 뚫고 그랬죠. 과해 보이는데, 막상 그렇게 설정하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면 현지 톤에 딱 맞더라고요. 아, 희준이 형 콧수염도 그때 저랑 같이 가서 찾은 거예요.

가까이는 마약 카르텔을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나르코스>가, 밑바닥부터 시작해 패권을 장악하며 가장의 역할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레전드 작품인 <대부>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연대기 속의 인물은 그만큼 욕심나는 인물이자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 같아요.
기자님 말씀에 정말 동의해요. 워낙 그런 장르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욕심이 나는데 해낼 수 있을까, 그래서 제안받고 한번 고사했어요. 특히 제가 시나리오 받았을 때 34살이었는데 19살부터 표현을 해야 하니 민망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더 늦으면 기회가 없다, 한번 해보자 했고 그때부터는 고민 없이 빠져들었죠. 말씀대로 너무 대단한 작품을 언급해야 해서 조심스럽긴 한데 <대부>는 너무 교과서 같은 작품이고 그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혼자 <대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1부 마지막에 문이 닫히면서 아내를 쳐다보는 알 파치노의 표정에서 끝나는데, 염두에 뒀다기보다는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국희가 처음 그곳을 보고 느낀 표정과, 보고타 한인 사회에서 실세가 된 다음 표정은 그런 표정이어야겠다, 그래야 매력이 있겠다 생각했어요.
‘무능력한 아버지’를 따라 간 보고타에서 국희가 찾은 건 또 다른 아버지의 상일 수 있는데요. 변화와 성장은 박병장(권해효), 수영(이희준) 캐릭터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데요. 그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박병장과 수영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은 게 있죠. 세상에는 믿을 놈이 하나 없구나, 나를 믿어야겠구나. 모두가 나를 위해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다 자기들 속만 챙기고 있구나 그런 비정함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대가리가 컸다’고 그러죠. 내가 살아남으려면 나도 내 더듬이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변화하게 되죠. 모두 자기들 이윤 챙겨 먹으려고 하는 건데, 내가 그들에게 바라거나 기댈 필요가 없구나, 내가 세져야겠구나 하는 걸 깨닫는 거죠. 그런 국희의 심정 변화가 이해가 되더라고요. 물리적으로 어린 나이인데 ‘무능력한 아빠와 무기력한 엄마’와 그 환경에서 적응하려고 하면,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공감이 되더라고요.

시대적 배경이 외환위기로 전 국민이 고통받던 1997년 IMF 시기인데요. 국희 가족이 한국을 떠나 ‘기회의 땅’이라 판단한 보고타로 가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배우님께서 그 시절을 통과하면서 겪은 것들에서는 어떤 이해와 영향을 받았나요.
국희의 집처럼 저희 집이 망해가는 경험은 아니었지만, 저희 아버지도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 그때 본 것들을 떠올려 보면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 시절을 떠올려 보면 감독님이 왜 이 영화의 출발을, 배경을 이 시기로 잡았는지 받아들여졌어요. 그때 제가 초등학생이었는데 그 분위기들을 알고 있으니 그냥 책으로만 보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솔직히 국희네 가족에게는 보고타가 아니라 다른 곳이어도 괜찮았을 거예요. 아버지와 군 생활을 같이 한 박병장이 그곳에서 성공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간 거니까요. 이들에게는 도피처가 필요했던 것이죠. 멀리만 떠나면 되는 거였죠. 그래서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었던 거고요.
국희에게는 보고타로 가면서 한국에서 ‘가장’이었던 아버지의 역할이 축소되고 그 자리를 대신할 관계들이 형성되는데요. 권해효 배우가 유사 아버지 같은, 이희준 배우가 유사 형제 같은 관계인데요. 그 과정에서 이해가 상충되며 충돌하는 만큼 긴밀하게 호흡해야 했었을 텐데요. 상대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배우들 모두와 호흡이 정말 잘 맞았어요. 그중 희준이 형 이야기를 좀 드리자면 희준이 형과 저희끼리 연기 스터디 모임이 있어요. 진선규, 김설진, 한예리, 양경원 배우 등과 같이 하는데요. <승리호> 찍을 때 진선규 형과 대화를 하다가, <보고타> 촬영 이야기를 하고 연기 고민도 하게 됐어요. 그때 선규 형이 “중기야, 너 나 믿고 한번 가볼래?”하고 이 모임을 제안해 주셨어요. 희준이 형을 거기서 만난 거죠. 둘이 같은 극단이기도 하면서 두 분은 원래 계속 친했었고요. 그러다 보니 같이 이 작품 캐스팅되고 희준이 형이랑 인연이구나 싶더라고요. 형은 저랑 성격이 워낙 반대인데 제가 숲을 보는 스타일이라면, 형은 나뭇가지 위의 작은 열매까지 다 보는 섬세한 사람이에요. 어쩌면 국희와 수영의 상반되는 지점도 우리 모습에서도 조금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보고타>는 단순히 이 작품뿐만 아니라 배우님 최근작들의 일련의 흐름 안에서 볼 때 비슷한 면모가 읽히는 작품인데요. 소재나 장르적인 면에서 지금 배우님의 관심사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또 이후 작품 선택에도 이 작품의 경험이 영향을 준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죠. 제가 좋아하는 취향의 작품 위주로 선택했으니 거기에 저의 기질과 성향이 다 묻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마음이 들지 않거나 공감이 안되면 절대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작품들에 제 색깔이 더 많이 묻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보고타>를 먼저 찍고서 아마 이후 작품들에 영향을 준 것도 맞다는 생각이 들고요.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현지 촬영이 주는 만족도도 컸어요. 많이 배울 수 있는 현장이었어요. 제가 좀 오지랖이 넓은데 콜롬비아 스태프들과 촬영 기간 동안 친해져서 한번 회식을 했죠. 한 번이 뭐예요, 아 엄청 먹었어요. (웃음) 다들 저를 ‘쿠키’(Cookie)라고 불렀는데요. 절 보고 “너희들은 왜 이렇게 ‘straight’해?’하더라고요. 한국 스태프들의 위계질서, 선배에 대한 인사 같은 예절이 그들에게는 좀 딱딱하게 느껴졌나 봐요. 그들은 감독, 선배 할 것 없이 서로 다 볼 뽀뽀하고 그러거든요. 우리가 안 좋다 이런 게 아니라, 저들의 마인드나 문화 같은 걸 좋은 건 적용해 봐도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볼 뽀뽀는 바로 적용을 하셨나요?
네, 바로 해봤죠. 김종수 선배랑 박지환 형, 희준이 형이랑 다음 날부터 해봤어요. 저희 다 그런 편안한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쉽지는 않더라고요. (웃음)

<보고타> 개봉까지 더해지면서, 코로나 이후 한 쉬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으로 소통하고 있는데요.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일에 있어서 스스로를 좀 푸시하는 성격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스스로는 어떻게 판단하시나요.
제가 막 저를 벼랑 끝에 내모는 성격은 아닌데, 뭔가 주어졌을 때 책임감이 좀 큰 성격이라 일적으로 그렇게 비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간 찍어 놓은 작품이 연달아 공개되어 그래 보이는데요. 사실 첫째 아이를 낳고는 거의 1년을 촬영 없이 쉬었어요. 제가 돌아봐도 아기 낳기 전에는 바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요새는 좀 여유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둘째도 생겼고, 저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 가열하게 작품만 해왔던 삶과는 이제 좀 달라지지 않을까. 숨 고르면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제게 너무 중요하지 싶어요. 왜냐면 아기가 금방 금방 크더라고요. 매일 달라지니까, 잠깐 안 보는 사이에도 깜짝깜짝 놀라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