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감독 곤 사토시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파프리카> 등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서사 구조와 독특한 편집 기법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넘어 실사 영화감독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할리우드의 크리스토퍼 놀란과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영향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인셉션>에서 <파프리카>의 한 장면을 오마주했고, 곤 사토시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는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자신의 영화 <레퀴엠>에서 <퍼펙트 블루>의 욕조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주제와 분위기 면에서 매우 유사하게 <블랙 스완>을 연출했다.

그는 10년 동안 4개의 영화와 1개의 TV 애니메이션만을 남겼지만, 자신의 독특한 인장을 충분히 각인시킨다. 곤 사토시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복잡한 플롯을 빠른 리듬감을 동력 삼아 펼쳐 낸다. 그가 빈번하게 활용하는 과감한 생략은 영화의 속도감을 더욱 높인다. 또 되감기, TV로부터 줌아웃하기, 검은 화면으로 점프컷하기, 영화 속 사물을 사용해 화면 전환하기 등 여러 편집 방식을 감각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그는 조지 로이 힐 감독이 연출한 영화 <제5도살장>(1972, 국내명 <죽음의 순례자>)의 영향을 받아 매치컷을 자유자재로 쓴다. 그의 영화에는 일반적인 매치컷과 그래픽 매치컷, 다른 시간대를 넘나드는 매치컷 모두 자주 눈에 띈다. 그의 매치컷은 꿈과 기억, 현실 그리고 삶과 영화 등의 각기 다른 세계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퍼펙트 블루> (1997)

소규모 공연장을 전전하는 중소 아이돌 그룹 챰의 핵심 멤버 미마. 아티스트를 돈벌이로만 보는 기획사 대표의 권유로 미마는 아이돌 가수를 그만두고 배우로 전향한다. 미마의 극성팬은 그녀가 자신의 청순한 아이돌로만 남기를 바라며 탤런트가 된 미마를 쫓아다니며 염탐한다. 미마는 연속극 ‘더블 바인드’에 단역에 가까운 조연으로 출연해 성실히 배우 활동을 해 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팬이 미마의 일상을 예측한 것을 옮겨 놓은 가상의 웹사이트 ‘미마의 방’이 자신의 일상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또 변태적인 드라마 작가에 의해 강간 장면을 연기한 후 자책에 빠지면서 여전히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돌로 남은 자신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녀는 점점 현실로 침입해 오는 환상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곤 사토시의 데뷔작 <퍼펙트 블루>는 당시 애니메이션계에서 보기 힘든 사이코 스릴러다. 당시 무명이었던 그는 저예산으로 데뷔작을 만들어야 했기에 동화(원화의 사이에 채워 넣어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하는 그림) 매수를 충분히 쓸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한계에 부닥쳤지만, 작화와 채색에 더욱 공을 들이고 그의 독보적인 편집으로 작품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퍼펙트 블루>는 곤 사토시의 환상적인 세계의 토대가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곤 사토시의 적확한 시선은 연예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영화는 아티스트에 환상을 덧입혀 대상화하는 팬들의 시선과 자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연예 산업의 생태계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미마의 심리를 따라간다. 사생팬 '미마니아'가 무대에 올라 있는 미마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싸 쥐는 듯한 동작을 취하는 장면은 아이돌을 소유물로 여기는 팬덤 문화의 어두운 단면을 응축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비판 의식은 연예계에만 국한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파괴될 수 있는지까지 나아간다.
<천년여우>(2001)

겐야는 일본 영화사를 함께 해온 영화 제작사 은영 영화사의 70주년을 기념하여 그 역사를 지탱해 온 대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발자취를 좇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한다. 한때 ‘도쿄의 마돈나’로 불렸던 치요코는 커리어의 정점에서 돌연 사라져 버리고, 이후 은둔 생활을 해온 70대 여배우다. 그녀는 자신의 열혈팬이기도 한 겐야에게 어린 시절 만났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영화와 함께했던 수십 년간의 세월에 대해 들려준다. 영화는 치요코의 이야기를 단순한 회상 장면으로 처리하지 않고 그녀의 현실과 과거를 뒤섞어서 넘나든다.

곤 사토시 감독은 현실과 영화 속 세계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치요코의 삶과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중첩한다. 그 속에서 그는 일본 영화계의 황금기를 함께 그려낸다. 우선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뮤즈 하라 세츠코의 생애를 모티브로 삼아 인물 치요코를 만들어낸다. 또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영화부터 사무라이 영화, <고지라>와 같은 괴수물, 오즈 야스지로풍의 영화들을 치요코가 출연한 작품으로 그려내면서 일본의 영화사를 훑어 낸다. 치요코가 남자를 쫓는 행위는 곤 사토시가 영화의 이상을 좇는 행위와 같다. <천년여우>는 꿈을 좇는 것의 의미와 예술의 영원성을 천년의 시공간 속에 녹아 낸다.
<파프리카>(2006)

무대 위 조그마한 장난감 자동차에서 피에로가 빠져나와 쇼의 시작을 알린다. 놀라운 쇼가 연이어 벌어지다가 이내 관객석을 배회하는 한 남자에게 핀 조명이 내리꽂히면서 모든 관심이 쏠린다. 어느새 남자는 무대 위 철창 안에 갇혀 있고, 자신의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쫓긴다. 갑자기 남자의 발밑은 천장이 되고, 아래로 떨어지는 남자를 빨간 단발머리의 여자 파프리카가 구해낸다. 남자는 파프리카와 함께 여러 시공간을 옮겨 다니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놀랍도록 초현실주의적인 <파프리카>의 오프닝 시퀀스는 인물 코나카와 경감의 꿈이다. 경감을 구해낸 파프리카는 심리치료장치 DC미니를 이용해 환자들의 꿈속으로 들어가 직접 치료하는 무의식의 탐험가, 영화 같은 꿈속의 여배우다. 사람들의 꿈을 누비는 그녀의 정체는 사실 냉철한 과학자 아츠코다. 어느 날, 제어장치가 걸려 있지 않은 DC미니의 샘플이 사라지면서 현실 속 도시에 광기와 욕망 어린 꿈의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아츠코와 그의 동료들은 DC미니를 찾아 꿈과 현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한다.


곤 사토시의 매치컷은 꿈의 비현실적이고 유동적인 본질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그의 영화 <파프리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파프리카>의 오프닝 시퀀스는 여러 매치컷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하며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또 인간의 꿈을 영화에 유비하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과 꿈을 다루는 <파프리카>는 프로이트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퍼레이드는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던 인간의 욕망을 전치한 이미지다. <파프리카>는 여러 세계가 마구 뒤엉키는 환상적인 픽션 속에서 진실을 찾고자 했던 곤 사토시의 집념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