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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베스트] 조재휘 평론가의 사사로운 해외 영화 리스트

씨네플레이

연말에 접어들면 한 해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작성해보는 것은 시네필이라면 갖기 마련인 은근한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동안 보았던 영화를 돌이키고 여러 작품들과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들을 엮어 정리하며 한 해를 마감하는 한편으로는, 내년에 마주하게 될 미지의 영화에 대한 기대 역시 품어보게 됩니다. 이 리스트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저마다 마음속으로 정해두고 있을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한 줄을 보태어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영화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그것은 누군가의 리스트가 절대적인 평가의 기준으로 내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참고할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리해보면서 새삼 발견하게 되는 건 국내와 해외 막론하고 공통되게 드러나는 어떤 경향입니다. 메인스트림에서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절충하며 균형 잡힌 웰메이드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거나 호응을 얻지 못하는 한편으로는, 영화적 활력과 품격을 간직한 주목할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중저예산, 또는 작가주의와 인디펜던트를 지향한 영화들 중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극장 표값의 상승과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자 증가가 맞물린 극장 문화의 퇴조도 중요한 요인으로 일정 부분 작용하고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더 이상 영화산업의 주류 안에서 창의적인 무언가를 시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데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상업영화는 모난 개성을 잘라낸 무난함, 성공한 서사의 공식과 묘사의 표준을 답습하게 되면서 엔터테인먼트에서 참신함을 원하는 관객은 피로감을 호소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나름의 개성과 관점을 지녔지만 규모의 경제를 가질 수 없는 영화들은 지불한 표값에 걸맞은 구경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받는 이중고에 처한 것이 (한국의 경우는 코로나 이전으로 영화 산업을 복원하고자 하는 해외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역행하는 면이 큽니다만) 오늘날 전 세계 영화계가 처한 공통된 현실이지 않은가 싶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언젠가 이러한 함정을 벗어나 영화예술과 극장 산업이 다시금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금 추천하고픈 올해의 영화 목록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

 

1위. <존 오브 인터레스트>(감독 조너선 글래이저)
 

홀로코스트를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지나간 역사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묻는 신기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나 <사울의 아들>(2015)과 같은 일련의 동일 소재 영화들이 유대인 학살의 역사, 폭력의 상황을 재현해 보여줌으로써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적 반응을 자아내지만, 참혹한 현장성을 부각시키며 이미지가 주는 즉각적인 인상의 강렬함에 의지하는 이러한 방식은 다른 한편으로 관객의 지성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며 참상을 가능케 한 원인에 대해 망각하게 만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조너선 글래이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역사에서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빔 벤더스의 말처럼 학살의 현장이 아닌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바깥의 평온함을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담장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가 가족의 선물인 보트를 받기 전에 눈가리개를 하고 나오는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다. 신경에 거슬리는 불쾌한 것에서 눈을 돌리고 치워버리겠다는 안간힘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행동의 반복으로 드러난다. 등장인물들은 외부의 비인간성을 무시하는 듯하지만 실은 분명하게 이를 의식하고 있으며, 이 모순과 균열 속에서 인간성은 망가지고 만다. 집 주변을 중심으로 인물의 동선을 따르는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을 지극히 일상적인 시점에 머물도록 강제하지만, 시각을 차단할 수는 있을지언정, 들리는 청각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저편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를 통해 관객은 보이지 않는 저편에 폭력의 역사가 존재함을 의식하고 이를 가능케 한 구조와 정치상에 관해 사유할 기회를 얻는다.
 

추락하듯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회스의 동선을 비추는 영화의 라스트는 지금의 아우슈비츠로 넘어가며 단순한 역사의 재현을 넘어서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의미의 심도를 완성한다. 회스 일가족의 귀족적인 전원생활이 그랬듯,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은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 착취의 산물일 수 있고, 장벽과 유리창 한 장 너머로 절망의 심연이 자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의 실상에 대해 더없이 무관심하고, 타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자신의 고통에만 몰두한다. 그러는 한 이 시대는 영영 끝나지 않는, 홀로코스트의 고요한 연장일 수밖에 없다는 침묵 속의 외침이 더없이 뼈아프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2위. <클로즈 유어 아이즈>(감독 빅토르 에리세) 
 

빅토르 에리세가 돌아왔다. 스페인 내전이 남긴 현대사의 상흔(傷痕)과 불안을 다루었던 <벌집의 정령>(1973)과 <남쪽>(1983) 두 작품만으로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이 과작의 대가가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이래 간간히 단편영화만을 작업하며 자그마치 31년간 지켜왔던 침묵을 깨고 돌아온 데에는 무언가 큰 결심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우리 시대에 새로 만든 또 다른 버전의 <시네마 천국>(1988)이다. <시네마 천국>의 첫 공개 당시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이탈리아 영화산업의 몰락과 황폐화를 목도하고는 한때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영화(映畵)와 극장이 호황을 구가했던 영화(榮華)로운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했다고 밝힌 연출의 변은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매끈한 젊은이의 얼굴 반대편에 덥수룩한 수염의 노인을 배치하는, 야누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리석 흉상. 도입부에서 관객의 눈앞으로 던져지는 상징적 이미지는 과거와 현재, 영화 안과 바깥의 현실을 불가분의 관계로 놓는 상호 침투성의 모티브와 수미쌍관의 구조를 단적으로 함축해낸다. 미완성된 과거의 필름, 실종된 과거의 배우를 찾는 과거의 감독의 과거를 향한 여정. 감독은 디지털 매체와 스트리밍 포맷이 등장하면서 이젠 영화가 흘러간 한 시절의 유산, 구닥다리로 취급받는 오늘날의 세태에 맞서고자 하는 복고(復古)의 의지를 천명한다. 기억을 잃고 망가진 명배우는 잃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두 릴 분량의 필름만 남긴 채 영영 미완으로만 남을 것 같던 영화는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침체 일변도의 내리막길을 걷는 오늘날 영화의 현실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 슬픔의 지점에 가라앉는대서 그치는 건 아니다. 차가운 대리석 조각상에 간절한 염원을 실으면, 그에 화답해 피가 흐르고 온기가 감도는 사람의 육신으로 화(化)한다는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우화처럼, 이 영화는 언젠가 영화예술과 극장이 빈사 상태로부터 깨어나 다시금 살아나길 바라는 영화적인 부활의 제의(祭儀)이기도 한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


3위. <퍼펙트 데이즈>(감독 빔 벤더스) 


<도쿄-가>(1985)에서 이미 오즈 야스지로가 남긴 유산들을 경의에 찬 심경으로 답사한 바 있던 빔 벤더스는 이젠 오즈와 과거의 도쿄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오즈의 시선을 통과해 바라본 현재의 도쿄를 영화로 찍기로 작정한 듯하다. <퍼펙트 데이즈>는 그러한 의도의 소산이다. 비록 이 영화는 인물이 프레임 바깥을 떠나더라도 화면에 남는 정물적 풍경과 정적인 무드를 무심히 담아내던 오즈의 스타일을 있던 그대로 재현하려는 건 아니지만, <만춘>(1949) 이래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의 풍경을 소묘하고, 그 안에 처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낄 법한 감정의 여운, 생활의 감각에 동참케 해준다는 오즈의 정수만큼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그에 비견할 법한 공감각적인 순간들을 빚어내는 데 성공한다.

 

매일매일 흐트러짐 없이 지속되는 일과의 연속. 마치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를 방불케 하는 히라야마(이 이름은 <동경 이야기>(1953)와 <꽁치의 맛>(1962)에서 류 치수가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을 오마주한 것)의 모습은 잇쇼켄메이(一生懸命 : 목숨을 바치듯 무언가를 한 가지를 붙잡고 열심히 함)라는 일본적 가치관의 한 이상을 체현(體現)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히라야마의 여동생이 청소부로 일한다는 게 정말인지를 묻는대서 드러나듯, 분명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인정받지도, 대우받지도 못하는 일에 그토록 정성을 들이고 매진하는 삶의 성실성과 소박함은 화려한 출세(出世), 입신양명만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가치이자 미덕이라는 식으로 배우고 주입받아왔던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는 사뭇 생경하면서도 고요한 수면 위에 이는 물결처럼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편으로 영화를 통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을 소묘하는 표면의 너머에서 은근한 마각을 드러낸다. 히라야마가 일과 도중에 겪는 사건의 순간순간은 아른거리는 잔상처럼 단편적인 영상으로 꿈속에 반영되고, 그의 방구석 다락에는 평소 소지하고 다니는 필름카메라로 찍고 현상한 사진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어떤 사진을 남기고 버릴지를 일일이 골라내는 모습은 은연중에 영화의 편집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스쳐 지나가는 현실의 그림자(影), 찰나의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예술의 형식이 바로 사진이고, 그 사진들을 1초당 24프레임으로 한데 모은 것이 바로 ‘영화’가 아니던가? 차곡차곡 쌓인 이미지가 모여 한 사람의 인생, 한 편의 서사를 완성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영화의 존재방식에 관한 일종의 메타시네마(meta-cinema :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4위.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
 

<미나리>(2020)나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와 같은 유형의 영화들,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 영화라는 소(小) 장르로 분류되는 작품들에는 일련의 공통점이 있다. 한국을 떠나왔지만 낯선 타지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으면서 적응의 과정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계인들의 서사라는 큰 틀을 공유하기에 이들 영화는 하나의 정육면체 주사위가 갖는 다른 면과도 같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인 이민자 2세의 이야기임에도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있다. 나영은 유년기에 일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가고,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되지만, 영화는 그녀와 가족이 겪었을 법한 시행착오의 역사에는 그다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소꿉친구 해성의 성장과정을 나영과 번갈아 비추면서 서로 다른 행보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삶을 대비시킨다.
 

‘회수 남쪽의 귤이 하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옛 고사처럼, 뿌리는 같은 한국인이라도 한국에 남아 병역을 치르고 취직하는 남성과 뉴욕에서 작가 지망생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꿈에서 한걸음 다가서는 여성의 삶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영과 해성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실패가 예정된 멜로드라마의 두 주인공인 셈인데, 분명 호감을 품고 있고 서로를 연결하는 끈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들이 맺어지지 못하는 건,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태평양을 사이에 둔 거리만큼이나 벌어진 괴리 때문이다. 두 사람의 캐릭터는 각자가 속해있는 한국과 미국 사회의 관습과 문화가 응축되고 집약된 결과이며, 재회를 기뻐하며 서로를 반김에도 불구하고 둘이 함께 있는 순간에 감도는 모종의 긴장, 어색한 분위기는 성장한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놓인 무형의 경계선을 감지케 한다.
 

그래서 해성을 떠나보낸 나영이 남편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영화의 라스트는 깊고도 진한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건 극히 적으며, 나영 일가족의 이민처럼 돌이켜보면 현재의 삶은 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외부의 흐름에 떠밀려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마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노래했듯 만약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면, 또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되묻곤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장르의 공통된 구도를 답습하는 대신, 흔히 ‘운명’이라고들 말하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조건에 대한 질문에 닿고자 한, 우수 짙은 감성과 성찰의 산물이다.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폴리 아 되〉


5위. <조커: 폴리 아 되>(감독 토드 필립스) 
 

<조커: 폴리 아 되>만큼 많은 기대를 모은 화제작이 열렬한 저주를 받으며 추락한 경우는 영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 관객들은 <조커>(2019)의 말미에서 하층 계급의 우상으로 떠오른 아서 플렉이 고담시의 질서를 위협하는 뒷세계의 거물로 성장해 배트맨 신화의 일부로 포섭되는 피카레스크 로망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예측 가능한 후일담을 만드는 대신 누명처럼 씌워진 조커의 껍데기를 도로 벗겨내고는, 아서를 소외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불우한 이웃의 자리로 되돌려놓고자 한다. 토드 필립스는 대중 관객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속편으로 화답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입장한 ‘아서-조커’가 분장실에서 ‘아서-실체’와 ‘조커-그림자’로 분리되고, 옷장에 실체를 가둔 그림자가 대신 무대에 나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도입부의 애니메이션은 영화 전체의 플롯과 주제를 단번에 함축해낸다. 일개 소시민인 본인의 실체와 주변의 기대에 의해 덮어씌워진 조커의 이미지 사이의 괴리. <조커>에서 아서가 저지른 살인은 자본주의 질서의 불평등에 억눌려있던 (영화 속과 영화 밖 현실 양면에서) 대중의 시대정신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것이었지만, 감독은 파괴적 스펙터클을 펼치는 손쉬운 길보다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 ‘아서’라는 한 개인의 ‘실체’와 작중 할리퀸을 비롯한 대중이 그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로서의 ‘조커’를 분리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조커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라는 개인을 지칭하지 않는다. 부제인 프랑스어 ‘폴리 아 되’(Folie a deux)가 공유정신병적 장애, 즉 한 사람의 망상적 신념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됨을 뜻하지 않던가? 아서는 죽지만 이젠 그를 추종하던 세계의 모든 이들이 조커가 되어간다. <조커>가 하층계급의 사회적 복수극으로 극장 밖 현실과 공명했다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에 열광하고 환호했던 이들, 범죄와 폭력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면서까지 기성 질서의 붕괴를 바라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풍경을 근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죄는 단순하고 간결함을 요구하는 대중영화에서,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윤리의 지점을 다루고자 한 작가적 야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참혹하리만치 저주받았지만 언젠가 재평가되어야 할 올해의 영화 중 한 편.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극찬한 건 한 번쯤 곱씹어볼 구석이 있다.
 


 

〈바튼 아카데미〉
〈바튼 아카데미〉


그 외 올해의 해외영화 추천작들(무순)
 

<바튼 아카데미>(감독 알렉산더 페인)

<메이 디셈버>(감독 토드 헤인즈)

<룸 넥스트 도어>(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나의 올드 오크>(감독 켄 로치)

<오키쿠와 세계>(감독 사카모토 준지)

<듄 - 파트 2>(감독 드니 빌뇌브)

<퓨리오사 - 매드 맥스 사가>(감독 조지 밀러)

<와일드 로봇>(감독 크리스 샌더스)

<클라우드>(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풍류일대>(감독 지아 장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