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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오시마 나기사, 집단 속 억압된 개인을 바라보다 (1)

씨네플레이
11월 20일 개봉한〈전장의 크리스마스〉포스터
11월 20일 개봉한〈전장의 크리스마스〉포스터

 

오시마 나기사, 경력의 전환점을 맞다

 <감각의 제국>(1976)을 기점으로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 1932~2013)의 영화 경력이 중요한 변곡점을 맞았음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다. <청춘 잔혹 이야기>(1960)와 <일본의 밤과 안개>(1960), 그리고 <교사형>(1968)과 같이 과감하고 거침없는 터치로 일본 사회의 민감한 사회적 쟁점과 병리적 현상을 다루던 급진적인 정치성은 줄어들어 보였고, 해마다 많으면 2~3편씩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하던 활발한 행보 또한 뒤로 갈수록 작품 간의 시간적 간격이 길어지면서 상대적으로 활력을 잃고 위축되어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래서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편인 건 후반기의 영화들이지만, 비평적 평가는 경력 초창기의 작품을 높이 쳐주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청춘잔혹 이야기〉와〈교사형〉(오른쪽)
〈청춘잔혹 이야기〉와〈교사형〉(오른쪽)

과연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나는 이러한 관점이 다소 단정적이고 사려 깊지 못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인 관객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거리를 늘 갖기 마련이지만, 여기에는 종종 반향을 얻는 작품에 대한 반감,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이 들고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작품에 대한 경멸이 곧 지적우월성과 통한다는 모종의 계급적 허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영화예술에는 일정 수준의 돈을 들이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성격의 작품들이 분명 존재한다. 큰 영화를 만든다고 작가로서의 능력이 퇴화한다고 보는 건 그 얼마나 편견에 찬 시선들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흔히 처지는 감이 있다고들 말하는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나 유작 <고하토>(1999)와 같은 오시마의 후기작들 역시 잘 만든 작품들이며, 직설적으로 사회상을 겨냥하지는 않지만, 대신 진일보한 형식미와 풍부한 함의를 품은 은유의 깊이, 역사를 통해 당대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사의 보편에 닿고자 하는 거시적인 시야를 얻었다고 본다.

‘쇼치쿠 누벨바그’의 시기, 그리고 쇼치쿠 영화사를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독립영화사 아트 시어터 길드(ATG)를 결성하고 창립 10주년 기념작 <의식>(1971)을 내놓기까지의 기간 동안 오시마는 작가로서의 비판정신과 현실의 질곡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긴장의 불꽃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메인스트림이 아닌 인디펜던트에서 활동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처한 환경 안에서 펼쳐낼 수 있는 비전의 한계가 더더욱 명확해보였음은 분명하다. 예컨대 그의 초기 걸작으로 꼽히는 <일본의 밤과 안개>가 로케이션의 변화나 역동적인 카메라워크 없이 롱테이크가 주가 되어 스튜디오 내부 공간에서만 진행되는 연극적 세팅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플래시백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면서 운동권의 다각적인 면면을 비추는 구조를 취한 건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영화적인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한, 다시 말해 비참한 저예산 작가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는 측면도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오시마 나기사
오시마 나기사

ATG 시절의 그는 항상 일본영화계 편당 평균 제작비의 20% 수준밖에 되지 않는 천만 엔 안팎의 예산에서 모든 걸 해내야 했다. ‘영화의 경제가 곧 영화의 이념’이라는 고다르의 말처럼 예술영화 작가에게 저예산은 주류 상업영화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바를 눈치 보지 않고 관철시킬 수 있는 창작의 자유를 뜻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다작의 이면에는 경영이 악화되어가는 독립영화사의 안정적인 제작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박리다매(薄利多賣)로 찍어내야 한다는 의무감 또한 작용하고 있었음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돈이 들지 않고도 흥미로운 영화를 찍어야만 한다는 과제를 즉흥적이고 전위적인 아이디어의 힘으로 돌파한다는 건 얼핏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마냥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순 없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정치적인 지형의 변화도 언제나 당대성에 민감히 반응해오던 오시마 영화의 성격을 바꾸어놓는 치명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나름 흥행 감독이었던 그와 쇼치쿠 영화사의 관계를 파탄지경에 이르게 한 <일본의 밤과 안개>의 급작스러운 종영(이 영화는 고작 3일 동안만 공개되고 영화사 중역의 결정에 의해 모든 극장에서 내려갔다)은 때마침 일본 현대정치사를 흔들어 놓은 희대의 암살사건, 이른바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민당을 비판하는 요지의 연설을 하던 야당의 중진을 17세의 극우파 청년이 일본도로 찔러 살해한 이 사건으로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어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로부터 12년 뒤 NHK 생중계로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벌어진 아사마 산장 사건과 그로 인해 드러난 산악 베이스 사건의 실체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밤과 안개〉와 〈감각의 제국〉(오른쪽)
〈일본의 밤과 안개〉와 〈감각의 제국〉(오른쪽)

동료를 거리낌 없이 숙청하는 연합적군의 충격적인 내부 실상이 밝혀지면서 운동권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해버렸고 일본 사회 전체에는 좌파 운동에 대한 혐오와 염증이 만연하게 되었다.(얄궂게도 이는 오시마의 과거작인 <일본의 밤과 안개>와 <도쿄전쟁전후비사>(1970)가 공산당 계열과 운동권 측의 과격파로 갈라진 좌익 내부의 분열적인 모습과 폐쇄감을 다루며 투쟁의 음울한 종언을 그린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 두 영화는 불길한 미래의 예언이 된 셈이다) 투쟁의 불씨는 사그라졌고, 정치적 변혁에 대한 열망은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운동에서 발을 뺀 청년들은 경제호황의 열매를 맛보며 급속도로 일본의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어 갔다. 학생 운동에 투신했던 경력의 좌파 지식인으로 일본사회의 보수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혁명의 기운을 영화로 담아내고자 했던 오시마였지만, 세상은 더 이상 좌익 운동을 옹호해주지 않았고 영화사들은 저렴한 대중오락물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의 프로듀서 아나톨 도먼(Anatole Dauman)이 제작비를 전부 감당할 테니 대작을, 그것도 포르노를 찍어보자고 <감각의 제국>을 기획하고 제안한 건 독립영화 감독으로서건, 좌파 지식인으로서건 궁지에 처해있던 오시마에게 있어선 국제무대를 향해 열린 경력의 전환점이자 답답한 현실로부터의 해방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기부터 오시마는 해외 합작에서 활로를 찾게 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일본 영화계의 바깥으로 나가서

 <열정의 제국>을 마친 직후인 1978년부터,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시작되었다. 로렌스 판 데르 포스트의 소설 「씨앗과 파종자」를 원작 삼은 이 영화의 물주로 처음 나선 건 놀랍게도 <일본의 밤과 안개> 상영 종료 사태에 항의하는 성명 발표, 오시마 감독 본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축하차 참석한 영화사 중역들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모욕으로 대놓고 원수만 안 되었다 뿐이지, 관계가 끊어져버리다시피 했던 쇼치쿠 영화사였다. <감각의 제국>이 일으킨 일대 센세이션과 <열정의 제국>의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에 고무된 쇼치쿠에서는 다시 한번 오시마와의 새로운 파트너십을 도모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았던 출발이 헝클어진 것도 쇼치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제작비 전액을 감당한다고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오시마의 영화제작 규모는 더 이상 그 시절의 저예산 수준이 아니었고,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으면서 쇼치쿠에서는 오시마에게 일본영화계 내에서는 마련하기 어려우니 절반 정도는 해외에서 끌어와 충당해달라고 요청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류이치 사카모토
〈전장의 크리스마스〉류이치 사카모토

모양새 빠지는 이야기지만 나중에 필요한 목표 예산 규모가 산정되자 쇼치쿠 측에서는 일본 내 극장배급만 맡을 뿐 제작 관련한 모든 부문에서는 발을 빼는 것으로 말을 바꿔버리게 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시마는 재원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데르수 우잘라>(1975,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제작에도 참여했고 1981년 해럴드 에이스를 창립해 제작과 외화 수입을 활발히 하며 미니시어터의 붐을 일으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그리고 뒷날 이때의 합작 경험을 토대로 <란>(1985)과 <마지막 황제>(1987)에도 관여하게 되는) 프로듀서 하라 마사토가 니콜라스 뢰그의 <배드 타이밍>(1980)을 수입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제레미 토마스를 주선하면서 숨통을 트게 된다. 제레미 토마스가 뉴질랜드의 투자은행에서 일반투자자들을 모아 절반인 300만 달러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뉴질랜드 로케이션(뉴질랜드 자치령 쿡 제도의 라로통가섬)을 추진하면서 세금감면혜택을 얻게 되었고, 오시마 프로덕션은 스미토모 은행의 출자에 TV 아사히의 참여, 거기에 감독 본인이 집을 담보 잡고 있는 사재를 싹싹 털어 마련한 1억 엔을 보태면서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일본, 영국, 뉴질랜드 3개국 합작을 확정 짓고 추진하게 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데이비드 보위
〈전장의 크리스마스〉데이비드 보위

오시마 나기사가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는 영화를 하기로 작정한 데에는 대작 전쟁물 붐이 불던 당시 일본영화계의 흐름을 의식한 면도 있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할 즈음, 토호에서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활약상을 특촬의 스펙터클로 그린 <연합함대>(1981)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고 <203고지>(1980)로 유행을 선도했던 토에이에서도 <대일본제국>(1982)의 촬영을 진행 중이었다. 다분히 우익적인 색채로 전쟁기의 일본인 자신들을 변명하고 낭만화하려는 성격이 강했던 이러한 시도는 골수 좌파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 그 시대의 일본인은 전쟁 피해자가 아니라 제국주의 폭력의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던 오시마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오시마는 “<연합함대>와 <대일본제국>에 출연한 배우만은 쓰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는데, 여기에는 ‘<대일본제국>에서 군인 역을 한 사람이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도 군인을 한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당시 일본영화의 전쟁을 다루는 태도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이 결코 빈말이 아닌 것이 <교사형>을 통해 그는 재일한국인의 범죄가 일본사회의 소수자로서 성장과정에서 겪은 빈곤과 차별의 귀결임을 분명히 한 바 있고, TV 방영 다큐멘터리로 만든 <잊혀진 황군>(1963, 공교롭게도 방영일이 광복절 다음 날인 8월 16일이었다.)은 일본의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 부상을 입고 장애자가 되었지만 보상 한 푼 받지 못한 채 빈곤층으로 전락한 한국인 피해자의 존재와 이들을 외면하는 일본사회의 위선을 신랄하게 까내리며 고발하는 작품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네덜란드군 포로와 동성애 애인 관계인 조선인 군속 가네모토의 등장은 결코 한국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원작 소설에서부터 있는 부분이며, 제국주의의 소모품이자 역사의 피해자로 버려진 이들에 관심을 기울여온 오시마 감독의 작가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기타노 다케시
〈전장의 크리스마스〉기타노 다케시

때문에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캐스팅은 재원을 마련하는 것 못잖게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처음에 셀리어스 역으로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유력 후보로 올랐지만 배우의 일정 조정이 여의치 않아 불발되었고(이 부분은 증언이 조금 엇갈리는데 감독의 여동생이자 오시마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였던 오시마 에이코에 따르면 만나보니 “침착하고 위험한 구석이 없어 보여 이 역에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니콜라스 케이지도 물망에 올랐지만 거절당했다. 오시마는 브로드웨이 연극 ‘엘리펀트 맨’을 보고나서 보위의 캐스팅을 확정했는데, 이에 보위는 이 작품에서의 연기에 전념하기 위해 향후 2년의 일정을 비워둘 만큼 진지하게 임했다고 한다. 요노이 대위 역에는 미우라 토모카즈(<퍼펙트 데이즈>(2023)에서 히라야마가 스미다 강변에서 만나 그림자 겹치기 놀이를 하는 남자가 바로 이 사람. 그는 <대일본제국>에도 출연했기에 리스트에서 금방 제외되었다), 오키 마사야, 타키타 사카에, 그리고 사와다 켄지(가수 겸 배우였던 그는 자신과 공연할 배우로 데이비드 보위를 추천했지만 콘서트 일정 때문에 요노이 역을 고사했다)가 고려되었지만 다들 이러저러한 문제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요노이 역으로 사와다 켄지를 적역이라고 점찍었던 오시마는 내심 낙담했지만 사진 컬렉션을 검토하면서 그를 대신할 배우를 찾다가 우연히 음악을 맡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모습에 주목하고는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었다. 양성애자스러운 인상이 필요하다 여겼던 역할인데 사카모토 류이치에게서 어딘가 사와다 켄지와 닮은 구석이 있음을 본 것이다. 톰 콘티가 연기한 로렌스 중령 역할은 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제안이 갔지만 “동성애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반려했는데, 나중에 그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나서는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했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 연기자,

기타노 다케시와 류이치 사카모토

작중 일본군의 무도하고 패악스러운 면면을 대변하는 하라 상사 역에는 <복수는 나의 것>(1979)의 대배우 오가타 켄, 그리고 <자토이치> 시리즈로 유명세를 얻은 카츠 신타로에게 제안이 갔지만, 오가타 켄은 바쁜 일정 탓에, 카츠 신타로는 대본을 전해 받고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수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연합함대>와 <대일본제국> 등의 배역진을 피해서 기껏 골라내면 다들 이러저런 사유로 줄줄이 캐스팅에 실패하다보니 후보군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갔는데, 최종적으로 오시마의 선택은 당대 일본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인기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기타노 다케시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에 쓴 기타노 다케시의 회상에 따르면 배역을 제안받은 다케시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날을 잡고 같이 감독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난 코미디언이고 사카모토씨는 음악인이라서 각자 일로 먹고사는데 지장 없다. 그래서 배우에 그렇게 연연하거나 아쉬워할 것도 없다. 그러니 정 쓰고 싶으시면 연기 갖고 너무 뭐라 하진 않았으면 한다. 개나 고양이가 그러는 갑다하고 화 내진 말아주시라. 화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만두겠다.” 오시마 나기사의 불같은 성격은 일본 영화계에서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뒷날 다케시는 오시마의 조감독이었던 최양일의 <피와 뼈>(2004)에 출연하면서 마찬가지로 똑같은 단서를 달게 된다. 

(왼쪽부터)칸영화제에 방문한 잭 톰슨, 류이치 사카모토, 데이비드 보위, 오시마 나기사
(왼쪽부터)칸영화제에 방문한 잭 톰슨, 류이치 사카모토, 데이비드 보위, 오시마 나기사

흔쾌히 감독의 승낙을 받아낸 다케시와 류이치는 뉴질랜드의 로케이션 현장으로 넘어가 촬영에 임했다. 문제는 두 사람이 그때까지 영화 현장과 연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였다는 데 있었다. 걸핏하면 대사를 까먹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거나 버벅거리기 일쑤인 두 사람이었지만, 약속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감독은 벙어리 냉가슴 마냥 마음에 드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참아가며 촬영을 진행해나갔다. 대신 스태프들이 감독의 화를 대신 받아줄 애꿎은 희생양이 되었는데, 두 배우가 실수할 때마다 그 둘 대신 감독의 분노를 뒤집어쓰고 욕을 먹거나 얻어맞다보니 독이 바짝 오른 조감독과 이하 스태프들이 직접 뭐라 못하는 감독을 대신해서 NG 날 때마다 다케시와 류이치를 갈구는 내리물림으로 고성이 오가며 현장이 돌아가기 일쑤였다. 다년간의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지만 막상 촬영 자체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돈과 시간 모두 쪼들리는 저예산 독립영화 작업에 익숙해져있다 보니 오시마의 작업 속도는 굉장히 빠르기로 업계에 정평이 나있었는데, 대부분의 장면을 1~2테이크 만에 끝내버리는가 하면, 촬영한 필름을 러시로 현상하지도, 안전인화도 하지 않고 바로 일본의 편집실로 보내버리는 식이었다. 제작진이 라로통가섬에 들어간 건 1982년 8월 9~10일 경이었고, 촬영 기자재가 도착해 하역하느라 23일에 크랭크인되었는데, 9월 20일에 촬영이 끝나 다음날 뉴질랜드로 넘어가서는 10월 8일 일본으로 귀국해 며칠 안되어 러프컷을 완성하는 등, 두 달도 채 못 되는 기간 내에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데이비드 보위와 톰 콘티(오른쪽)
〈전장의 크리스마스〉데이비드 보위와 톰 콘티(오른쪽)

최종적으로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제작비는 당시 돈으로 15억 엔, 달러로 환산해 600만 달러가 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금액인가 하니, 20세기 폭스의 투자를 받아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작 <카게무샤>(1980)가 이와 같은 600만 달러였다. 화면에 다 잡히지 않지만 영화의 배경이 된 포로수용소 세트는 필요한 일부 공간만 짓는 눈속임이 아니라 아예 실제 포로수용소 전체를 통째로 지어버린 것이었다. 배우들이 그 안에서 생활하면서 정말로 포로로 붙잡혀 생활하는 것처럼 느끼길 바랐다는 것이 감독의 연출 의도였는데, 이런 점이 제작비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다행히 영화는 일본에서만 9억 9천만 엔, 북미에서만 23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결과적으로 오시마 나기사의 감독 경력 최대의 히트작이 되었다. 영화가 성공한 뒤에 쇼치쿠 측에서는 무안해졌는지 ‘이럴 줄 알았다면 제작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한 마디 거들 정도였다. 칸영화제에 출품되어 유력한 수상 후보로 손꼽혔던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1983)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데 밀려 무관에 그쳤지만, 1983년 ‘카이에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3위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문예춘추’에 실린 기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100편의 작품 중 하나로 이 영화를 꼽았다. 그리고 이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들 중에는 훗날의 대가 크리스토퍼 놀란이 있었다. <프레스티지>(2006)에서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역으로 데이비드 보위를,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로렌스 중령 역의 톰 콘티를 기용한 건 바로 오시마 나기사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일종의 헌정사였던 셈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기타노 다케시(가운데)
〈전장의 크리스마스〉기타노 다케시(가운데)

시사회가 있던 날, 정작 영화에 담긴 연기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었음에도 현장에서 본인들이 한 짓을 기억하고 있었던 다케치와 류이치 두 사람은 그날 내내 부끄러워서 고개를 내리깔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나서 다케시는 류이치에게 “내 연기도 끔찍하지만 너도 만만찮구나. 우리 둘이서 몰래 필름을 훔쳐다가 태워버릴까?”하는 농담도 했을 정도였다.(웃기는 건 데이비드 보위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은 일본인 배우들의 연기는 현장에서 일일이 지도하고 바로잡았지만, 자신을 포함해 영국 배우들에게는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라며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오시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케시의 연기가 괜찮았다고 칭찬했고 뒷날 <고하토>에서 신선조 국장 히지카타 토시조 역으로 다시 기용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류이치도 연기에 자신이 붙어 <마지막 황제> 때는 음악을 맡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에게 “배역을 준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는 모종의 딜을 해서 아마카스 마사히코 역을 따냈다.(정작 사카모토 류이치 본인은 운동권 출신이자 좌파 성향인데, 이 역할도 일본군 장교였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 그리고 <전장의 크리스마스>로 첫 배우 데뷔를 하며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기타노 다케시는 이때 영화를 감독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어 5년 뒤, 제작사와의 불화로 연출에서 손을 뗀 후카사쿠 킨지 감독을 대신해 메가폰을 잡고는 각본을 대폭 뜯어고쳐 <그 남자, 흉폭하다>(1989)로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또 다른 대가들을 탄생시키는 산실(産室)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