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에거스는 현대 영화계에서 독특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를 지닌 감독 중 한 명이다. 그의 영화 세계는 마치 고딕 소설의 한 페이지를 펼쳐 놓은 듯 음울하고 신비로우며, 동시에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보는 거울과도 같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되살아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이상하고 불편하지만 매력적인’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탐구하고 있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100년 만에 부활시킨 클래식 공포영화 <노스페라투>로 돌아왔다. <노스페라투>는 오랜 시간 알 수 없는 악몽과 괴로움에 시달려온 엘렌(릴리 로즈 뎁)과 그리고 그녀를 갈망하는 뱀파이어 백작 올록(빌 스카스가드)의 집착이 심해지면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을 그린다. <노스페라투>를 보기 전 그의 기괴한 영화들을 먼저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
<더 위치>(2015)

로버트 에거스는 데뷔작 <더 위치>로 런던국제영화제 서덜랜드상, 선댄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데뷔와 동시에 주목을 받았다. 세일럼 마녀재판을 다룬 호러 영화 <더 위치>는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의상과 풍습을 완벽하게 재현하며 관객을 과거로 이끌었다. 동시에 그의 기괴하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킨 시작점이기도 하다.

청교도 가정의 첫째 딸 토마신(안야 테일러 조이)과 그의 가족들은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마을에서 추방당해 황량한 숲 근처에 정착한다. 어느 날 토마신이 돌보고 있던 막냇동생이 사라지면서 가족들을 둘러싼 비극이 시작된다. 겨울을 날 식량은 동나고, 숲으로 사냥을 나선 아들 칼렙마저 자취를 감춘다. 발가벗겨진 채 다시 돌아온 칼렙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몸져눕는다. 막내를 잃어버리면서 엄마의 눈 밖에 난 토마신은 쌍둥이 동생들에 의해 마녀로 내몰리고, 가족들에게 의심을 받는다.

안야 테일러 조이는 <더 위치>로 단숨에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신예 배우로 떠올랐다. 어두운 지하실을 희미하게 밝히는 촛불에서 시작해 광기에 휩싸인 마녀들을 더 흥분되게 만드는 거대한 화염으로 끝내는 것. 이것이 안야 테일러 조이가 <더 위치>에서 보여준 연기의 궤적이다. 그녀는 순수한 신앙심과 내면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교도 소녀의 모습에서 시작해 어둠의 힘을 받아들이는 마녀로 변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안야 테일러 조이의 얼굴에는 순수한 영혼이 어둠의 힘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시간이 각인되어 있다.

로버트 에거스의 영화에서 여성은 마녀와 인어 등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당대의 힘없고 핍박을 받던 존재들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기존 질서와 규범에 저항하는 존재이다. <라이트하우스>의 인어는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고 파멸시키는 세이렌으로 등장하며, 안야 테일러 조이가 연기한 <노스맨>의 점쟁이 올가는 생명을 지키는 선택을 통해 파멸을 불러오는 남성성과 대비되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더 위치>의 토마신도 청교도 사회의 억압과 종교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선택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녀가 마녀가 되는 것은 청교도 사회의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는 해방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라이트하우스>(2019)

뉴잉글랜드의 외딴섬에 있는 등대를 지키는 두 남자. 고참 등대지기 웨이크(윌렘 대포)는 그곳에 새로 온 등대지기 윈슬로(로버트 패틴슨)에게 고된 일을 시킨다. 윈슬로는 등대의 건물 바닥과 계단을 끊임없이 쓸고 닦는 일부터, 평탄하지 않은 길로 석탄을 나르는 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지만 정작 등대 꼭대기의 불빛에는 접근할 수 없다. 등대의 꼭대기에는 오직 웨이크만 들어갈 수 있다. 웨이크의 폭압적인 권위에 짓눌린 윈슬로는 술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 폭풍우로 인해 보급선의 왕래마저 끊기면서 두 남자는 고립된 상태에 빠지고, 윈슬로는 정신적 붕괴를 겪는다.


인간의 광기 어린 욕망을 파고드는 영화 <라이트하우스>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영화 속 두 남자 윈슬로와 웨이크는 등대의 불빛에 집착한다. 특히 등대의 꼭대기에 들어설 수 없는 윈슬로는 금지된 구역에 있는 빛을 광적으로 갈구한다. 마치 「모비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흰고래를 집요하게 쫓듯이 말이다. 하지만 에이해브가 집착한 대상이 피와 살이 있는 실체로 드러나는 것에 반해 윈슬로의 빛에 대한 집착은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한다. 「모비딕」에서 흰색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기도 한다. “공허한 공백이자 의미로 가득하고 (…) 색이 없지만 모든 색이 합해진 무신론”. 결국 그가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모비딕」의 리바이어던이 바다의 심연에서 인간의 오만함을 시험하는 초월적인 존재라면, <라이트하우스>의 등대는 하늘로 향해 솟은 또 다른 모습의 리바이어던이다.
<노스맨>(2022)

<노스맨>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모티브가 된 암레트 왕자의 북유럽 전설을 기본 토대로 삼았다. 이번 영화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람이 부는 땅에서 오딘의 자손들이 피로 쓴 복수의 서사를 펼쳐낸다. 어린 암레트 왕자는 숙부 피욀니르(클라에스 방)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는다. 암레트(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자신의 목숨마저 앗아가려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간다. 그는 복수심을 품고 자라 늑대 전사 비욘울프러로 거듭난다. 피욀니르가 왕국을 빼앗기고 피신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암레트는 그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다시 바다를 건넌다.

<노스맨>은 여전히 마녀와 점쟁이의 예언, 발할라의 전사들, 죽지 않는 자의 칼 ‘드라우그’ 등 초자연적 요소들이 등장하지만 이를 신화적 스케일로 확장한다.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영화 속 세계는 전쟁의 신 오딘의 사자 까마귀가 전장을 날아다니고, 운명의 여신 노른이 인간의 운명을 직조한다. <노스맨>은 시종일관 인간의 의지와 신들이 정한 운명 사이의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복수를 다짐하며 살아온 암레트는 마녀로부터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해 듣는다. 훗날 그가 혈육에 대한 정과 원수에 대한 증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을 거라는 것을. 그는 끝내 자신의 자식을 품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와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지 않고, 피욀니르의 숨통을 끊으러 떠난다. <노스맨>은 그의 파멸에 이르는 최후를 그리며 남성적 영웅주의와 가부장적인 가치의 한계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