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트맨과 짐 모리슨을 연기했던 배우 발 킬머가 향년 6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80년대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작 <탑건>(1986)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한 ‘매버릭’ 피트 미첼과 갈등하는 ‘아이스맨’ 톰 카잔스키 역할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흘러 무려 40여 년 만에 제작된 속편 <탑건: 매버릭>(2022)에 출연하며 이를 유작으로 남긴 발 킬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탑건> 뿐만 아니라 밴드 도어즈의 짐 모리슨을 연기한 <더 도어즈>(1991),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배트맨이 되었던 <배트맨 포에버>(1995) 등 수십 편의 영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한때를 풍미한 불세출의 배우 중 한 명이다.

195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발 킬머는 어려서부터 연기에 재능을 보였고, 고교 졸업 후엔 뉴욕의 명문 예술대 줄리어드의 드라마 학부에 최연소로 입학하기도 했다. 워낙 대스타로 발돋움했기에, 말 그대로 ‘연기에 진심’이었던 그를 평가할 때 가장 간과되는 경력이 바로 이것이다. 줄리어드에서 서독 급진주의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 ‘How It All Began’을 각색하고 무대에 올렸으며, 1983년에는 젊은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슬랩 보이즈’(The Slab Boys)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는데, 숀 펜과 케빈 베이컨도 이 작품으로 함께 데뷔했다. 이후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발 킬머가 와이어트 어프(커트 러셀)의 친구 닥 할리데이를 연기한 <툼스톤>(1993)을 예로 들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배우 중 한 명”으로 그를 꼽기도 했다.

데뷔작인 ZAZ 사단의 코미디 <특급 비밀>(1984) 이후 톰 크루즈와 함께 출연한 토니 스콧의 <탑건>을 발판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특급 비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사하는 것 같은 연기를 통해 음악적 재능을 뽐내기도 했던 그는 올리버 스톤의 <도어즈>(1991)에서 전설의 록그룹 도어즈의 리드싱어 짐 모리슨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이후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를 통해서는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1990년대에는 주연작들 외에도 비중을 떠나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각본을 쓴 것으로 유명한 토니 스콧 감독의 <트루 로맨스>(1993)에서 마약 중독자 역할을 인상적으로 해냈고, 마이클 만의 <히트>(1995)에서 당대 최고 배우들인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와 함께 출연했고, 존 프랑켄하이머의 <닥터 모로의 DNA>(1996)에서는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인 모로 박사(말론 브란도)의 정신 나간 조수이자 과학자 몽고메리를 개성 넘치게 만들었고, 필립 노이스의 <세인트>(1997)에서는 주문받은 물건을 감쪽같이 훔쳐내서 막대한 금액의 사례금을 받아내는 변장의 명수인 도둑 사이먼 템플러를 멋지게 연기해냈다.

2014년에는 후두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기관절개술을 받아 원래의 목소리를 잃었지만, 배우인 딸 메르세데스 킬머와 함께 영화 <블랙머니>(원제: Paydirt, 2020)에 출연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2021년 7월 칸영화제에서는 팅 푸, 레오 스콧 감독이 그에 관해 만든 다큐멘터리 <발>(Val)이 다큐멘터리에 대해 시상하는 골든 아이 부문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목소리 내기가 힘든 그를 대신해 그의 아들이 목소리를 제공했고, 그가 수년 동안 녹화한 수백 시간 분량의 비디오를 활용하여 발 킬머가 얼마나 자기 성찰적인 예술가인지를 잘 보여줬다. 이후 사실상 배우로서의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었던 그는 <탑건: 매버릭>에 우정 출연하며 이를 유작으로 남겼다.

발 킬머가 세상을 떠난 이후, 함께 했던 동료 영화인들의 추모가 SNS를 통해 이어졌다. 먼저 <탑건>의 공식 계정이 발 킬머를 기리며 “그의 지울 수 없는 영화적 흔적은 장르와 세대를 아우른다. RIP 아이스맨”이라는 추모의 글을 남겼고, 절친 조시 브롤린은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또 보자, 친구. 네가 그리울 거야. 넌 언제나 똑똑하고, 도전적이고, 용감하고, 창조적인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이었어. 내가 언젠가 천국에서 너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1998)에서 발 킬머가 모세를 맡고 자신이 람세스를 맡아 목소리 연기를 함께 했던 랄프 파인즈도 그와 함께 한 사진을 올려 추억했다.

발 킬머가 마녀사냥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 홀 볼티모어로 출연한 공포영화 <트윅스트>(2011)를 연출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오래전부터 그를 보아온 기억을 경유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발 킬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장 재능 있는 배우였고, 그 재능은 평생 더 커졌다. 그는 함께 일하기에 훌륭한 사람이었고, 알아가는 것이 기쁜 사람이었다. 나는 항상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발 킬머가 수수께끼의 인물 매드마티칸을 연기한 론 하워드 감독의 <윌로우>(1988) 등 발 킬머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한 전설적인 시각특수효과 스튜디오 ILM(Industrial Light & Magic)도 다음과 같은 추모글을 올렸다. “친구이자 동료인 발 킬머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어 매우 슬프다. <윌로우>의 매드마티건, <탑건>의 아이스맨< <툼스톤>의 닥 할리데이, <도어즈>의 짐 모리슨과 같은 역할을 통해 그는 위대한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깊이 그가 그리울 것이다”.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