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소리 배우의 애순은 작품의 7화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16부작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이유의 문학 소녀 애순과 호흡했을 시청자들의 몰입을 깨지 않아야 했다. 동시에 보편적인 엄마가 되어 뭇 여성들의 삶을 녹여내야 했다. 젊은 시절, 제주에서 한가락 한 새침데기 문학소녀를 가슴에 품고,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엄마가 되기 위해 문소리는 부단히 고심하고 노력했다. 문소리 배우를 만나 그 고민의 시간, 아이유 배우와 호흡을 맞춘 시간, 인물 애순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여전히 역대급 대작이란 말이 나오고 있는데, 작품 <폭싹 속았수다>에 참여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참 감사해요. 워낙 대본이 좋아서 주변에서도 “잘될 거예요” 그렇게 얘기해 줬었지만, 이렇게 전 세대가 정말 남녀노소 불문하고 공감을 많이 해 주시니까 감사하죠.
다른 배우분들도 대본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어요. 근데 외려 완벽한 대본이 배우님에게 옥죄는 느낌으로 작용하지는 않으셨어요? 배우님이 인물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서요.
작품마다 다 다르죠. 근데 이번 작품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원래는 재즈하는 사람인데, 카네기홀에서 굉장히 덕망이 높은 지휘자랑 오케스트라 협연을 하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작은 펍에서 재즈를 할 때보다 지켜야 할 약속들이 엄청 많을 거고, 분위기도 다르겠죠. 근데 어떤 음악이 더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죠. 재즈는 재즈대로 자유분방하게 즉흥적으로 하는 음악이고, 또 클래식 음악도 훌륭함이 있죠. 이번 작품은 그렇게 마음을 먹자. 이 수많은 약속 안에서 최대한의 퀄리티로 다 같이 완성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었어요. 대본이 워낙 좋고, 완성도가 있어서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대본이었어요.

인물의 톤을 맞추기 위해 아이유 배우님과 의견을 주고받은 부분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선배셔서 영향을 끼친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가 선배이기 때문에 ‘아이유 배우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런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없고요. 한 인물을 두 명이 같이 연기해야 하니 생각과 바라보는 지점이 맞아야 할 것 같았어요. 네가 흘러서 어디로 가는지 너도 알고, 나는 어디서 왔는지 나도 알아야 잘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지점에서 둘이 대화하길 원했었고, 그런 노력이 꽤 많이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제가 한 애순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아이유 씨의 애순이랑 같지만 또 다른 미션들이 있었어요. 애순이의 본질은 똑같죠.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저는 30대 후반부터 45세 그리고 늙어서까지의 애순이는 사회적으로는 그냥 엄마예요. 보편적인 엄마. ‘누구 엄마겠지’라고 여기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표현해야 돼요. 봄여름(1막, 2막)에는 동네를 떠들썩하게 할 만한 사건도 저지르고, 지나가면 “저 집 딸 유명해”하고 쳐다볼 만한 그런 인물이었죠.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그런 시절이 있었겠죠. 그렇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그냥 엄마, 보편적인 엄마가 되죠. 애순이를 그대로 갖고 가면서도 거기다가 하나의 정체성이 더 씌워진 거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한 인물 안에서 잘 표현할 것이냐가 저에게는 중요한 미션 중의 하나였죠.
사실 한 역할을 두 명이 했을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 튀면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몰입이 깨지잖아요. 근데 문소리 배우님께서 애순의 특징들을 잘 연결하신 것 같은데, 연기를 하면서 특별히 신경 쓰신 부분이 있을까요?
“너무 좋아” 이런 건 대본에도 그대로 쓰여 있었고요. 그럴 정도로 대본이 정교하게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슬쩍 묻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내가 어린 애순이, 그 애순이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린 애순이가 문득문득 보이길 바랐어요. 그 애순이랑 똑같다고 주장하면 당연히 무리가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평소에도 유튜브 ‘아이유의 팔레트’를 계속 보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유 음악 틀어 놓고 했어요.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 모르니까. 내가 아이유랑 계속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근데 어쨌든 시청자들은 7화까지 오는 동안 아이유의 애순에 적응됐을 거란 말이에요. 그럼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헤쳐 나가야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렇게라도 자꾸 보고 듣고 했죠.
아이유 님 노래 중에 어떤 곡을 자주 들으셨어요?
‘무릎’이요. 이 노래 들으면 할머니 무릎 베고 울었던 생각도 나고 그랬어요.

문소리 님의 애순이가 계장도 하고, 나중에는 시장에서 오징어도 팔잖아요. 특히 오징어 파는 애순이는 정말 시장에서 생선을 파시는 아주머니들을 그대로 갖다 놓은 것 같았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저 그거 연습 많이 했어요. 오징어 배 따는 거, 멍게 따는 거. 제주에 계신 선생님이 서울 사무실에 오셔서 비린내 나는 멍게를 엄청 갖다 놓고 연습을 한 번 하고, 제주에서도 계속 연습하고 그랬어요. 또 숙제로도 주셔가지고 집에서도 계속 따가지고 많이 먹었어요. 멍게비빔밥도 해 먹고, 오징어도 엄청 얼려 놨다가 오래 먹었어요.
촬영할 때, 그거를 손만 찍었거든요. 클로즈업으로 손만 찍었는데, 전문가분도 옆에 계셔 가지고 그분 것도 클로즈업으로 찍었어요. 근데 결국 마지막에 들어간 건 제 손으로 한 걸로 했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둘 다 편집해 봤는데, 큰 차이가 없었대요. 그래서 멍게 손질, 오징어 손질 이런 거 잘해요. (웃음)

아이유 씨가 어린 애순부터 50대 금명이까지 여러 세대를 연기하면서 어떻게 보면 많은 역할을 한 거잖아요. 근데 금명이의 나이대가 달라질 때마다 문소리 씨의 애순도 계속 성장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외적으로 얼굴의 변화도 있지만, 전체적인 톤도 달라지더라고요. 이렇게 잔잔히 변해가는 포인트를 어떻게 잡으셨는지 궁금해요.
‘산다는 게 뭘까?’ 진짜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외모도 늙어가지만 그때마다 나도 속 안에 뭔가를 담고 있어야 되잖아요. 배우로 욕심만 내면은 늙어도 한칼 하고 싶죠. 다 내가 판 쓸고 싶지. 근데 늙는다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기운이 빠지고 물러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참 애순이 늙어가면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도 참 선택지가 너무 넓은 거예요. 평범한 엄마부터 시장에서 막 오징어를 팔고 그러면 또 사람이 억세지죠. 사람이 거칠어지고, 우리 엄마 광례(염혜란) 억센 거 봐요. 저도 그렇게 될 수 있거든요. 저는 거기서부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그 정도로 억세질 것인가.
근데 또 우리 문학소녀 애순이는 얼마나 문학에 대한 꿈을 갖고 있고, 관식(박보검·박해준)이 정말 여린 꽃처럼 사랑해 주고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늘 꽃밭 속에 살았던 애순이. 그럼 그녀가 갖고 있는 소녀다움도 표현을 해야 해서 그 범위가 너무 넓은 거예요. 이 범위 안에서 어떻게 늙을 것이냐 이게 저한테는 진짜 수학의 미적분보다 답을 내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떨 때는 “광례 똘(딸의 제주 사투리) 맞네” 소리가 절로 나오게 억센 부분이 보이게 했지만, 또 엄마는 엄마고 저랑은 다르죠. 세대가 바뀌어 가는 거니까. 근데 관식이의 변함없는 사랑, 없는 형편에서도 늘 꽃밭에 살게 해주고 싶었던 관식의 사랑과 세 해녀 이모의 사랑이 너무나 큰 사랑이잖아요. 그 큰 사랑 안에 살았던 사람은 시장에서 오징어를 팔든, 사기를 당하든, 자식을 잃든 그런 풍파를 겪어도 어떤 고운 면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럼, 애순을 연기하면서 많은 영향을 준 관식 역을 맡았던 박해준 배우와의 연기 호흡은 어떠셨어요?
해준 씨랑 같이 가면 한 20~30년 같이 하는 <전원일기>처럼 가도 재밌겠다 싶었어요. 그런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옛날에는 똑같은 작품을 매번 같은 사람이랑 하면 힘들고, 거기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아닐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혼자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근데 관식이랑 호흡을 맞추다 보니까 끝내기 아쉽더라고요. 그냥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요. 큰 거 안 하고, 관식이와 애순이가 그냥 누워서 두런두런 얘기만 해도 그 안에 인간의 오만 가지 감정과 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을 수 있는 거고 그런 게 정말 되게 좋았어요.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나 내레이션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걸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관식이를 보내면서 그런 말을 해요. “이런 복은 내리 안 와 누가 이렇게 꽃밭에 살아” 그런 대사들이 너무 좋죠. “힘들었던 적은 있지만 외로웠던 적은 없다”는 내레이션도 그렇고, 마지막에 딸한테 말하잖아요. “숱한 날이 봄이었더라”. 사람 인생이 다 어려움이 있고 좋을 때가 있고 누구나 그런데 이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부정적으로 규정하고 갈 수도 있죠. 근데 그거는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근데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봄날로 규정할 수 있다는 거. 그건 참 대단한 어른이 할 수 있는 것 같았어요. 근데 이 대본은 각본집이 좀 나왔으면 좋겠어요. 각본집을 진짜 온 국민한테 선물하고 싶은데… 작가님이 좀 내주셔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좀 강력하게 요청하는 기사를 써주세요. (웃음)
씨네플레이 추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