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영화제 현장의 아리애스터 감독

<유전>(2018)과 <미드소마>(2019)에 이어 와킨 피닉스를 전면에 내세운 <보 이즈 어프레이드>로 뭇 관객들을 패닉에 빠트린 아리 애스터. 작년 8월 <인디와이어>에서 미국 영화인들에게 1990년대 최고의 영화 10편을 꼽아달라는 설문을 받았고, 아리 애스터 역시 참여해 <좋은 친구들>을 포함한 10개의 명작을 선택했다.


좋은 친구들

Goodfellas, 1990

흔히 마틴 스코세이지 하면 갱스터 영화 장인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초기작 <비열한 거리>(1973) 이후 17년 만에 만든 갱스터 영화 <좋은 친구들>은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1980) 등과 함께 스코세이지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마피아 준조직원이었던 헨리 힐과 그 주변인들의 실화를 담은 논픽션을 각색한 영화는, 조나단 드미의 <섬씽 와일드>(1986)에서 강렬한 악역을 선보인 레이 리오타를 주인공 헨리 역에 캐스팅하고 스코세이지가 사랑하는 두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조 페시까지 합세해, 순수 이탈리아 혈통이 아니어서 마피아 정식 조직원이 되지 못한 무리들의 흥망성쇠를 그렸다. 화려한 카메라 테크닉과 쉴 새 없이 배치된 195~60년대 명곡들로 눈과 귀가 두루 즐거운 걸작.


영혼의 사랑

Defending Your Life, 1991

1960년대 말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앨버트 브룩스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 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해 1979년 감독 데뷔작 <리얼 라이프>를 발표했다. <결혼과 이혼 사이>(모던 로맨스, 1981) <로스트 인 아메리카>(1985) 등 브룩스 본인이 직접 주인공 연기까지 맡아 활약한 연출작들은 대개 부부/연인 관계를 내세운 사회 비판적인 코미디가 주를 이뤘는데,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만난 커플의 이야기 <영혼의 사랑>은 날선 시선보다는 푸근한 로맨스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브룩스는 친구 캐리 피셔의 소개로 메릴 스트립을 만난 자리에서 "나를 위한 역할은 없나요?"라는 말을 듣고 스트립에 맞게 시나리오를 고쳐 써서 <영혼의 사랑>을 만들었다고. 스트립이 기존 작품에서 보여준 영화 전체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아닌 코믹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홍등

大紅燈籠高高掛, 1991

장이머우 감독의 <홍등>은 아리 애스터가 선택한 두 편의 아시아 영화 중 하나다. <붉은 수수밭>(1989) <국두>(1990)에 이어 장이머우의 페르소나 공리가 주연을 맡았다. 1920년대 중국, 계모의 강요에 못 이겨 대학을 중퇴하고 부호의 넷째 부인이 된 송련이 가문의 권력을 잡고자 점점 나쁜 선택을 거듭하다가 미쳐버리는 과정을 그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과거 중국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촬영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장이머우의 감각적인 비주얼이 특히 두드러진다. <홍등>으로 처음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감독상을 수상한 장이머우는 이후 <귀주 이야기>(1992)와 <책상 서랍 속의 동화>(1999)로 베니스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زندگی و دیگر هیچ

1992

아리 애스터가 <홍등>과 더불어 지목한 아시아 영화는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다. 실제 이란 코케르에서 촬영하고 그 지역의 사람들을 배우로 기용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키아로스타미는, 약 10만 명의 사상자를 낸 1990년 이란 대지진 이후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코케르로 향했고 강연에서 이 사연을 들은 관객으로부터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듣고, 비전문배우 파하드 케라드만드(Farhad Kheradmand)를 자기 역할에 캐스팅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만들었다. 키아로스타미는 1980년대 이후부터 수많은 서구권 감독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는데, 장 뤽 고다르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1992년 경쟁 부문에 초청하지 않은 칸 영화제를 공개 저격하며 "영화는 D.W. 그리피스로 시작해 키아로스타미에서 끝났다"고 존경을 바친 바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1994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찍는 촬영 현장 주변을 소재로 한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발표해 '코케르(지그재그) 3부작'을 완성했다.


허드서커 대리인

The Hudsucker Proxy, 1994

1990년 <밀러스 크로싱>, 1991년 <바톤 핑크>, 1994년 <허드서커 대리인>, 1996년 <파고>, 1998년 <위대한 레보스키>... 1990년대는 코엔 형제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섯 작품 모두 이야기도 스타일도 제각각이라 어느 작품을 베스트로 꼽는지도 사람마다 골고루 나뉘는 편이다. 아리 애스터의 선택은 <허드서커 대리인>이다. 허드서커 사의 회장이 중역들이 보는 앞에서 투신자살한 뒤 머스버거 이사(폴 뉴먼)는 회사를 집어삼킬 생각으로 바지회장 자리에 우편물을 정리하던 노빌 번스(팀 로빈스)를 앉히고, 노빌이 제안한 훌라후프 사업이 회사를 망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 이를 추진하지만 예기치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이야기. 감독 데뷔 전의 조엘 코엔을 <이블 데드>(1980) 편집 담당으로 만난 샘 레이미 감독은 곧 코엔 형제와 <허드서커 대리인> 시나리오를 썼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코엔 형제의 연출작으로 제작될 수 있었다.


킹덤 1 & 2

Riget / Riget II, 1994/1997

아리 애스터의 목록 중 호러를 표방한 작품은 의외로(?) TV 시리즈 <킹덤>이 유일하다. 첫 장편 <범죄의 요소>(1984)로 닻을 올린 '유럽 3부작'을 모두 발표한 라스 폰 트리에는, 1965년 방영된 프랑스 TV 시리즈 <벨파고>와 데이비드 린치의 TV 시리즈 <트윈 픽스>(1990)에 영감받아 만든 호러 시리즈 <킹덤>을 덴마크 공영방송 'DR'을 통해 공개했다. 심령술에 빠져 노년을 보내는 드루세 부인이 재미 삼아 상습적으로 입원하다가 킹덤 병원에 어린 여자아이의 원혼이 떠도는 걸 느끼고 아이가 의사 헬머의 의료 사고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호러뿐만 아니라, 병원 구성원들의 만행을 꼬집는 블랙코미디적 면모도 상당하다. 시즌 1은 1994년 시즌 2는 1997년 처음 방영됐고, 시즌 당 1시간을 웃도는 에피소드가 4개씩 모였다. 첫 시즌으로부터 18년이 흐른 2022년 가을 시즌 3 <킹덤 엑소더스>도 공개되면서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세이프

Safe, 1995

장 주네(Jean Genet)의 소설들에서 영감을 받은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첫 장편 <포이즌>(1991)으로 뉴 퀴어 시네마의 기수로 떠오른 토드 헤인즈 감독은 4년 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들에 시달리는 캘리포니아의 중산층 여성 캐롤 화이트(줄리앤 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릴러 <세이프>를 발표했다. 캐롤의 병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헤치기보다, 평화롭되 단조로운 삶을 이어가다가 돌연 병들어 육체가 서서히 망가져가는 과정을 집요하게 포착하는 데에 몰입한다. 다만 토드 헤인즈는 관객이 캐롤과 감정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도록 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 시나리오를 썼다고. 본래 수잔 노먼이 캐롤 역으로 고려되었으나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으로 주목 받기 시작하던) 줄리앤 무어가 적극적으로 <세이프>에 의지를 드러내 역할을 맡게 되면서 토드 헤인즈와 줄리앤 무어 모두에게 이정표가 될 만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헤인즈와 무어의 협업은 2002년 <파 프롬 헤븐>, 2007년 <아임 낫 데어>, 2017년 <원더스트럭>, 그리고 올해 <메이 디셈버>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스타쉽 트루퍼스

Starship Troopers, 1997

자국 네덜란드에서 걸출한 연출력을 인정받아 1980년대 중반 할리우드에 진출한 폴 버호벤. <로보캅>(1987)의 큰 성공 이후 맞이한 1990년대 버호벤의 흥행 컨디션은 둘로 극명하게 나뉜다. <토탈 리콜>(1990)과 <원초적 본능>(1992)의 성공, <쇼 걸>(1995)과 <스타쉽 트루퍼스>의 실패. 유년 시절 나치의 지배를 경험한 바 있는 버호벤은 전체주의에 대한 미화로 가득한 로버트 하인라인의 SF 소설의 비장한 분위기를 부러 B급 블랙코미디로 탈바꿈해 <스타쉽 트루퍼스>를 완성했다. 무려 1억 달러가 투입된 프로젝트를 언뜻 보기에 괴랄해 보이는 설정과 비주얼로 채운 버호벤의 야심은 결국 흥행 참패를 맞게 됐지만, 개봉 당시 악평이 잇따랐던 전작 <쇼 걸>과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인정받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온갖 과한 설정들을 위악적으로 밀어붙이는 야심만 보자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아리 애스터와 가장 닿아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뒤죽박죽

Topsy-Turvy, 1999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 마이크 리는 1960년대 말 데뷔해 영화, TV, 연극 무대를 종횡무진 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왔다. 1993년 작 <네이키드>가 칸 영화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1996년 작 <비밀과 거짓말>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연달아 차지한 90년이야말로 '영화감독' 리의 전성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터. 19세기 말 영국의 실존 오페라 단원들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시대극 <뒤죽박죽>은 90년대 마이크 리 필모그래피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사보이 시어터의 인기가 시들시들하던 1884년, 상냥하고 정중한 작곡가 설리반(짐 브로드벤트)와 허풍 많고 소란스러운 극작가 길버트(알랜 코드너)는 서로 정반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특출난 콤비플레이를 자랑하는 단짝이지만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 회복과 새 작품을 위해 힘을 합친다. 철저한 고증으로 빅토리아 시대 오페라 극단을 구현해 볼거리도 쏠쏠한 <뒤죽박죽>은 200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분장상과 의상상을 수상했다.


아이즈 와이드 셧

Eyes Wide Shut, 1999

스탠리 큐브릭이 <풀 메탈 자켓>(1987) 이후 12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자,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유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차기작으로 계획했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 <꿈의 노벨레>의 영화화가 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움직이기 시작해, 당시엔 실제 부부였던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권태기에 접어든 뉴욕(비행 공포증이 있는 큐브릭 때문에 런던에서 촬영했다)의 상류층 부부를 연기해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스토리, 스타일, 콘셉트 모두 확실했던 큐브릭의 전작들과 달리 <아이즈 와이드 셧>은 윌리엄(톰 크루즈)가 부자들의 비밀 섹스 파티에 참석하면서 모호함이 계속된다. 1996년 11월 촬영을 시작해 1998년 6월에야 완료될 만큼 큐브릭 특유의 완벽주의는 여전했고, 큐브릭 스스로 <아이즈 와이드 셧>이 가장 좋아하는 본인 작품이라며 만족을 드러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