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미, 일 모든 야구의 시즌이 끝났다. 올해 전 세계 프로야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 성불에 성공한 한 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창단 후 가장 오랜 기간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달하지 못했던 텍사스 레인저스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4승 1패로 꺾고 62년 만에 창단 첫 우승에 성공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38년 만에 커넬 샌더스의 저주를 풀고 한신 타이거스가 오릭스 버팔로즈를 4승 3패 혈투 끝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망의 KBO에서는 29년간 우승을 하지 못하며 긴 암흑기를 보냈던 LG 트윈스가 kt 위즈를 4승 1패로 대파하고 한국시리즈의 왕좌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야말로 오랜 기간 우승의 염원을 꿈꾸던 구단들의 한풀이가 연이어 일어난 셈이다.

누구보다 우승을 바라왔던 팬들과 연고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텍사스 팬들은 창단 첫 우승에 감격하여 역대 최대 규모의 카퍼레이드를 이어갔고, 타 팀 팬들도 텍사스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아직도 우승이 없는 팀은 다섯 팀뿐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시애틀 매리너스, 밀워키 브루어스, 탬파베이 레이스, 그리고 김하성이 소속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한신 타이거스 팬들은 이번에도 역시 37명이나 되는 인원이 ‘도톤보리 다이브’에 참가했다. 오사카에는 한신이나 일본 국가대표가 우승을 차지하면 도톤보리강에 뛰어드는 전통이 있다. 38년 만의 염원을 푼 한신 타이거즈 팬은 모두가 도톤보리강에 뛰어들 기세였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는 커넬 샌더스 상을 집어던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LG 트윈스는 한국시리즈 MVP에게 수여될 롤렉스 시계는 이미 고장 났고, 94년 다음 우승을 위해 모아놓은 우승주는 증발했다는 농담을 이제는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종로에 있는 엘지 트윈스 팬들을 위한 포장마차는 영업을 마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잠실과 그 주변 일대는 유광점퍼를 가장 오랫동안 입을 수 있게 된 엘지 팬들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살을 에는 찬 바람이 외투를 뚫는 겨울이 다가온다. 겨울은 야구팬들에게는 가혹한 계절이다. 다시 3월이 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야구는 없기 때문이다. 우승의 기쁨, 부진의 한숨,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 아쉬움의 감정들과 야구를 향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고 싶다면, 야구의 박진감을 다룬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떨까? 스크린 속 선수들만큼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그라운드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메이저리그>(1989)

2016년 시카고 컵스가 ‘염소의 저주’를 깨고 무려 10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우승을 하지 못한 팀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전신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바탕으로 한 마스코트 ‘와후 추장’을 2021년까지 사용하며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1948년 이래로 75년간 무관을 겪는 클리블랜드는 인디언스에서 가디언스로 팀명을 교체하고, ‘와후 추장의 저주’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야구 영화 중 하나인 <메이저리그>는 이 오랜 부진을 겪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5년 연속 꼴지를 차지하면서 최악의 클럽 중 하나가 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가 사망하자, 쇼걸 출신의 레이첼 필립스가 구단주로 부임한다. 그녀는 마이애미로 연고지 이전과 신구장 설립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팀의 인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최악의 선수들로 스쿼드를 구성한다.

<메이저리그>의 핵심 플롯은 많이 낡은 이야기 중 하나인 오합지졸의 우승 도전기다. 포수는 무릎 때문에 2루로 송구를 못하고, 팀의 유일한 FA는 부상을 염려해서 의도적으로 몸을 사린다. 제구 안 되는 150km 좌완, 직구는 홈런이지만 변화구에 선풍기를 날리는 타자, 뛰어난 발과 형편없는 타격 실력을 보유한 외야수. <메이저리그>는 오합지졸 선수들과 리그 우승을 향한다는 클리셰를 성실하게 이행한다. 그럼에도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처럼 허슬 플레이와 그라운드 위에 타오르는 열정을 보고 있다면 가슴이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구시대적인 설정들과 주연 배우의 몰락 등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인디언스에서 가디언스로 바뀌었듯 마초적인 메이저리그 서사는 그 시절의 기록으로 남겨두고 본다면 훌륭한 야구 영화임은 틀림없다. 후술할 여러 작품 중 가장 ‘야구’ 영화에 가까운 작품은 단연 <메이저리그>가 아닐까. (후속편인 메이저리그 2,3 시리즈는 그닥 추천하지 않는다. 특히 3편은 클리블랜드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로 아예 팀이 통째로 옮겨지는 바람에 시리즈에 의의를 잃은 작품이다)
<머니볼>(2011)

"날이 따뜻해진 걸 보면, 단장의 시간은 지났습니다." 지난 2020년 대한민국을 들썩인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주인공 백승수(남궁민) 단장이 마지막 회에서 했던 대사다. 비시즌은 그야말로 단장의 시간이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우승에는 전임단장의 코리 시거, 마커스 시미언 등 공격적인 FA 영입과 마감 시한 직전 유망주를 내주고 데려온 1선발 조던 몽고메리의 영입이 컸다. LG 트윈스 역시 FA로 영입한 박해민, 박동원 등의 활약과 키움으로부터 트레이드로 데려온 최원태의 합류가 우승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전설적인 단장을 꼽자면 단연 MLB의 패러다임을 바꾼 <머니볼>의 주인공 빌리 빈이 아닐까? 이제는 야구팬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세이버메트릭스의 선구자이며 가난한 최약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2년 연속 100승 시즌을 안겨준 주인공이다. 야구팬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영화 <머니볼>은 그야말로 비시즌에 설렘을 가득 안겨주는 작품이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을 맡은 빌리 빈은 실제로도 협상의 귀재였다. 오죽하면 빌리 빈의 전성기 시절 그가 29개 구단에 사기라는 말이 나올 수준의 말도 안 되는 트레이드를 이어가며 ‘빌리 빈 vs every club’이라는 구도가 나왔을 정도다. 영화에서도 삼각 트레이드, 현금 트레이드 등 다각 트레이드를 통해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데 성공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저가의 가격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매우 유의미한 스탯을 가진 타자를 발견하는 조력자 피터 브랜드(조나 힐)의 덕에 그는 스캇 해티버그(크리스 프랫)이라는 타율-출루율이 1할 이상 차이 나는 매력적인 타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2002년의 오클랜드는 20연승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써 내려간다. 그리고 2002년의 20연승 경기는 영화처럼 스캇 해티버그의 끝내기 홈런으로 이뤄졌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기 이전에, 단장 놀음이라는 일종의 경영학적인 접근은 <머니볼>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어쩌면 <머니볼>을 보고 있자면, 당장 OOTP (야구 비즈니스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꿈의 구장>(1989)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2014)에 등장하는 옥수수밭을 보고, 야구팬인 지인은 <꿈의 구장>을 떠올렸다고 했다. 무성히 자란 옥수수밭에서 야구장을 지으라는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은 레이(케빈 코스트너)는 모두가 말리는 가운데 야구장을 짓는다. 그리고 야구장에는 과거 ‘블랙삭스 스캔들(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을 하며 8인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영구 제명을 당한 사건)’의 주인공 중 하나인 ‘슈리스’ 조 잭슨(레이 리오타)이 홀연히 등장한다. 이윽고 블랙삭스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전부 옥수수밭 야구장에 등장해 훈련하기 시작한다. 레이는 이후에도 누군가를 만나라는 계시를 끊임없이 듣는다. 그렇게 야구장은 점점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던 전설적인 야구선수들의 유령으로 가득 채워졌고, 이들 사이에서 매일 경기가 진행된다.

어쩌면 <꿈의 구장>을 ‘야구’ 영화라고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꿈의 구장>에서 야구는 차라리 아버지와 아들, 망자와 산 자의 삶을 이어주는 가교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꿈의 구장>에는 야구와 관련된 장면은 그다지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곳에 꿈과 기억, 추억과 열정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꿈의 구장>의 주제 의식은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와 공명하고 있다. 환상과 유령처럼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과 기적이 야구에서 이따금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꿈의 구장>의 촬영지 옆에 ‘꿈의 구장’이라는 야구장을 설립하였고, 2021년과 2022년 ‘꿈의 구장 시리즈’라는 경기를 진행했다. 2021년 양키스와 화이트삭스의 경기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심지어 팀 앤더슨이 9회 말 끝내기 투런포를 날리면서 짜릿한 경기 결과로 그 열기를 더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야구와 영화가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