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얼음장 같았던 한국영화계에 순풍이 불어올 조짐이 보인다. 지난 22일 개봉해 10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한 <서울의 봄>이 부흥의 물꼬를 튼 가운데, <노량: 죽음의 바다>가 12월 20일 개봉을 확정 지으며 최후의 출정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과 <노량: 죽음의 바다> 두 편 모두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 외에도 또 하나의 교집합이 있다. 바로 배우 박훈의 존재다. 박훈은 <서울의 봄>에서는 ‘문일평’ 역으로,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한산: 용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이운룡’ 역으로 출연한다. 오늘은 박훈이 출연한 주요 작품들을 다시 한번 짚어보자.
<서울의 봄>, 쉴 새 없이 도청하는 ‘문일평’

분노를 유발하는 인물들이 수없이 등장하는 <서울의 봄>. 반란군 측의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너무나도 실감 나게 호연을 펼쳤던 나머지, 마치 어떤 캐릭터가 관객의 심박수를 가장 빨리 뛰게 만드는지를 대결하는 듯한 141분이었다. 그중, 전두광의 비서실장이자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문일평’은 미꾸라지처럼 모든 통신에 끼어들어 능수능란하게 진압군의 대화를 도청하며 관객의 심박수를 높이는 주역이었다.

한편, 박훈이 연기한 문일평은 실존 인물 ‘허화평’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다. 허화평은 이후 5공화국의 실세로 자리 잡은 ‘쓰리 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중 한 명으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청와대비서실의 보좌관이 되었다. 이후에도 허화평은 노태우 정부 시절 14대 국회위원을 지냈고,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15대 국회위원에도 당선되었으나 파면됐다. 그는 현재 미래한국재단의 소장을 맡고 있으며 무려 올해 4월까지도 저서를 내는 등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훈은 문일평의 얼굴을 소름 끼치게 그려내, <서울의 봄> 속 전두광, 국방장관 다음으로 '제일 화나는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서울의 봄> 홍보차 참석한 무대인사에서도 박훈은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전했다. 박훈은 무대인사에서 “지인들이 ‘당분간 널 만나지 않겠다’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아마 그에게는 “화난다”라는 말이 최고의 칭찬일 터. 그는 쏟아지는 호평에 “<서울의 봄> 감상평, 제가 계속 청취하겠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 충신 ‘이운룡’

그는 <서울의 봄>에서는 전두광(황정민)의 충실한 부하, 너무나도 그에게 충성했던 나머지 반란을 주도면밀하게 실행한 부하였다면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과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에서는 이순신(박해일/김윤석)의 충실한 부하로 분했다. 물론 두 캐릭터 간에는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은 광활한 간극이 있지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부하라는 점은 동일하다.

박훈이 연기한 <한산> 속 이운룡은 이순신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충신으로, 학익진 전법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주요 인물이다. 실제로, 역사 속의 이운룡은 이순신 장군이 특별히 아끼던 인물로 알려졌다. 또 영화 속에서는 이운룡과 어영담(안성기)의 ‘사제 케미’ 역시 돋보였는데, 스승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만으로도 단단하고 진한 존경심이 느껴져 관객들에게 뭉클함을 전했다. 그는 어영담과 함께 일본 수군을 한산도로 유인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자처하며, 긴 대사 없이 행동과 몸짓, 표정만으로 놀랄 만한 존재감을 뽐냈다. 또한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는 일이 없던 이운룡이, 어영담이 화살을 맞자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단박에 동요하던 모습 역시 또 다른 감동 포인트다.

박훈은 다음 달 개봉하는 <노량>에도 동일한 역으로 출연하며, 새로운 이순신(김윤석)과의 호흡은 어떻게 그려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하얼빈> '모리 다쓰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차대표', <공조2: 인터내셔날> '박상위'
이쯤 되면 박훈은 ‘시대극이 부르는 배우’ 칭호를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위에 서술한 작품들 외에도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드라마 <해치> 등에서도 열연했으니, 그의 필모그래피는 시대극으로 빼곡히 찼다.

박훈은 <하얼빈>으로 또 한 번의 시대극 도전에 나선다. 내년 개봉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 <하얼빈>은 1909년을 배경으로, 하얼빈에서 목숨을 건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등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과 배우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유재명 등이 출연하는 가운데, 박훈은 일본군 장교 역할을 맡는다.
그가 연기할 ‘모리 다쓰오’는 일본군 육군 소령이자 조선 주둔군 사령관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설정이다. 그는 모리 다쓰오를 연기하기 위해 일본어와 승마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밝혀져, 추후 공개될 그의 모습을 기대하게 된다.


한편, 박훈은 <하얼빈>으로 배우 현빈과 세 번째로 호흡하게 됐다. 그는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하 <알함브라>)에서 유진우(현빈)의 친구 ‘차형석’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죽임을 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우의 눈앞에 나타나는 NPC를 맡아 ‘차좀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연극을 오래 해서 대사를 함축하는 데 익숙하다.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된다”라고 전하기도 했는데,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짧은 등장과 대사만으로도 놀랄 만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의 연기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

박훈이 <공조2: 인터내셔날>(이하 <공조2>)에 출연한 이유에도 현빈의 몫이 컸다. 그들은 서로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속 배역 이름대로 부르는데, 박훈은 캐스팅 후 현빈에게 전화해 “유대표(현빈의 <알함브라> 속 배역 이름), 자네가 해서 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기로 했네. 우리 또 한 번 재밌게 해보세”라고 했다고.
<공조2>에서 박훈은 북한 출시 용병 ‘박상위’ 역을 맡았다. 그는 장발의 강렬한 모습으로 총, 칼, 맨손을 가리지 않고 타격감 좋은 액션을 선보였다. 재밌는 것은, <서울의 봄> <태양의 후예> 등에서도 군인 역할을 맡았으니, ‘군인 전문 배우’ 역시 박훈에게 걸맞은 호칭이 아닐까 싶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